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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륜드라에서의 하루
"후후후 얘들아, 그럼 시작해라!"
"옙!"
스르륵.
그들이 부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탐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이 얼마나 재롱을 부릴지 기대해 보았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은 물론 세리아도 예상 못했던 광경이 벌어졌다. 스탐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이건?”
그로선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봐도 양아치들이 확실한 그들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바닥에 폈다. 그것은 바로 돗자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은 배낭에서 빵을 꺼내 돗자리 위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내뱉은 우두머리의 말이 가관이었다.
"음하하핫! 륜드라의 명물인 걸어다니는 빵가게의 만 번째 손님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
"일단 저희 업소의 빵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드리지요. 일단 이 첫 번째 빵. 이것은 '달고 맛있는 빵'이란 이름을 가졌는데 말 그대로 달고 맛있죠. 그리고 두 번째는 '쓰고 맛없는 빵'으로 진짜 쓰고 맛없죠. 그리고 세 번째건 '더럽게 맛있는 빵'인데 정말 더럽고 맛있죠. 그리고 네 번째 빵은……."
스탐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협박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빵 장사라니,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세리아가 역정을 내며 그들에게 소리쳤다.
"흥, 난 빵 먹기 싫으니까 저리 가!"
“세리아…….”
스탐이 세리아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쩐 일인지 이번만큼은 그녀가 도움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지그시 쳐다보고 있던 우두머리의 한 마디에 태도가 싹 바뀌었다.
"후후후. 아리따운 엘프분께서 그렇게 매정하게 뿌리치시면 쓰나. 일단 커피한잔 마시고 마음을 평안히 놓으시죠, 사모님? 여기 맛있는 과일은 덤입니다.
"사모님? 피힛, 고마워!"
“사모님…?”
스탐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느새 세리아는 입꼬리가 귓가에 걸려 있었다. 그만큼 사모님이라는 단어가 그녀에게 큰 호감을 준 것 같았다.
"마침 출출한데 잘됐다. 한번 먹어봐야지."
"세리아, 무슨 소리야?"
“뭐, 어때. 스탐 너도 먹어 봐.”
“난 싫어.”
“그럼
말을 마친 세리아는 돗자리에 놓여진 빵을 이것저것 먹어보기 시작했다. 빵을 하나 둘씩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소리치며 계속 먹어댔다. 스탐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빵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
“아, 잘 먹었다.”
세리아가 포만감에 배를 두드리며 말했다. 어느새 돗자리에 놓여 있던 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가 다 먹어 치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는 부르지 않은 게 무척 신기해 보였다.
“얼마지?”
그런 세리아를 한참 보고 있던 스탐이 값을 물었다. 생긴 걸로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다니, 상당히 기분 나쁜 놈들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은 아까전보다 더 황당했다.
"4실버입니다."
“뭐? 4실버라니? 어째서 돈이 그렇게 되는 거지?"
"하하, 이 공원같이 먹을 것을 팔지 않는 곳에선 부가금이 붙는 답니다. 게다가 엘프분께서 도합 스무 개나 되는 빵을 드셔서 이 빵 스무 개의 비싼 원가와 부가금을 합치면 4실버는 당연한 겁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이 받을 계산금액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들이대었다.
‘이거 날강도 아냐?’
4실버면 평범한 용병의 두 달 치 수입이다. 완전 바가지였다. 잠시 동안 염두를 굴리던 스탐은 자신이 지금 바보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내가 돈을 낼 필요는 없잖아?”
자신은 빵 한조각도 먹지 않고 세리아가 다 먹어치웠다. 그러니 계산은 세리아가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리아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스탐, 너 내 것까지 계산하는 거 알지?"
"내가 왜 그래야 되지?"
“내가 지금 돈이 없거든. 입장료랑 주스를 사고 나니 남는 돈이 없더라고."
"아, 그러셔?"
스탐은 세리아의 능청스러움에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엘프들은 뻔뻔하다더니 그 말에 틀린 점은 없나보다.
스탐은 이제 저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힘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돈이고 뭐고 간에 알아서 길 것이 아닌가. 하지만 상대는 먼저 폭력을 행사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너무 꺼림칙했다. 그러던 중, 놈들의 우두머리가 제 발로 묘안을 제시해 주었다.
"이보세요, 뭐하는 겁니까? 경비원 눈에 걸리면 우리 끝장납니다."
"호오, 그래? 조금만 기다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돈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허가도 받지 않고 이 짓을 하고 있는가보다. 스탐은 돈을 찾는 척 하면서 품을 뒤졌다. 그러면서 경비원이 눈에 띄자 바로 목청껏 소리쳤다.
"어라, 웬 이상한 사람들이 허가도 안받고 음식물을 팔고 있네?"
"헉!"
스탐의 말과 동시에 사내들은 기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에 곧바로 경비원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그들은 황급히 물건들을 가방 안에 챙겨 넣고는 쏜살같이 뛰었다. 그 뒤를 경비병이 쫓았다.
"너 이놈들 여기 또 왔냐? 거기 안서?!"
"빌어먹을, 너 같으면 서겠냐?"
경비병과 그 양아치의 탈을 쓴 불법상인(?) 패거리들은 그렇게 쫓고 쫓기면서 스탐의 앞에서 사라져갔다. 스탐은 고소하다는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쌤통이군."
이렇게 되면 실컷 빵은 먹여놓고 본전도 못 뽑고 쫓기는 처지가 된 저들만 불쌍하게 되었다. 뭐,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 속편한 일이었지만. 귀찮은 문제가 해결되자 스탐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스탐, 같이 가~.”
세리아가 따라오며 추근덕 거렸다. 스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끄러. 따라 오지 마."
“왜 그래? 내가 싫어? 나대신 돈을 내려고 했으면서…….”
스탐은 세리아의 말에 할말을 잃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세리아를 뿌리치지 못하고 같이 돌아다니게 되었다, 아니 그녀에게 이끌려 다니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스탐, 저 꽃 참 예쁘다. 그치?”
“그래.”
“뭐야, 그 가식적인 말투는? 똑바로 말해!”
“알았어.”
스탐은 계속되는 세리아의 행패에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혼자서 조용히 사색이나 즐기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타나 훼방을 놓다니? 그는 그녀를 어떻게 떼어 놓을까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 지나가고 계신 신사분과 숙녀분!"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둘의 걸음을 묶어놓았다. 스탐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한 사내가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부른 신사와 숙녀는 자신들인 듯했다.
"무슨 볼일이지?"
스탐이 짐짓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사내는 파리한 마리 잡을 힘도 없을 정도로 유약해 보였다. 단지 곱상하게 생긴데다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여자 한명 낚아채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스탐은 상대가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고 그가 어떤 목적으로 다가왔는지 대충 짐작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화가랍니다. 그래서 이 신성함이 감도는 공원의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어떤 그림을 그릴지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지요. 그때 마침 아름다운 여성분들께서 보이시더군요.”
“여성분만 보인단 말이지.”
스탐이 피식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예상은 했는데 역시나였다. 놈은 자신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로지 세리아를 목적으로 이 자리에 온 것이다. 그는 세리아의 면면을 살펴보더니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엘프였군요. 참으로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그는 무릎을 꿇고 세리아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엘프가 워낙 드문 존재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그런 행동은 당연했다. 하지만 인간 세계가 초행길인 세리아는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이었다. 사내는 고개를 들면서 그녀에게 부탁했다.
“실례지만 레이디, 당신의 초상화 한점을 그려도 되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모습을 하얀 여백에 담아내지 못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군요."
"초상화요? 훗, 그려서 주신다면야 저야 좋죠."
“물론입니다.”
화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의자를 내밀었다. 그러자 세리아는 우아한 자태로 거기에 앉았다. 보고 있으면 토할 듯한 그들의 작태에 스탐이 한 마디 했다.
“놀고 있네.”
그러면서도 스탐은 내심 잘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되면 세리아를 떼어놓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스탐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리아와 화가의 한마디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스탐 조금만 기다려~ 금방 될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애인 되시는 분도 참 친절하신가보군요. 조용히 기다려 주시다니……."
스탐이 인상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그들의 말에는 가시가 돋혀 있었다. 지금 가면 재미없을 거라는 뜻이 담긴 듯. 하는 수 없이 그는 근처의 벤치에 앉았다. 화가는 손가락으로 네모를 그리며 세리아의 얼굴을 담아내고 있었다.
"자,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그립니다."
“예.”
슥삭 슥삭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어느새 붓을 집어 채색을 하던 그의 입에서 초상화를 다 그렸다는 소리나 나왔다.
"휴우, 레이디께서 고생하신만큼 그 아름다움을 많이 끌어내지 못하여 혹시나 실망하실까 걱정이 되는군요."
스탐의 입장에선 역겹지만, 세리아에겐 부드러울 듯한 화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이 세리아에게로 넘어갔다. 그림은 그가 한 말과는 다르게 그녀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이야! 이 그림, 내 얼굴을 꼭 빼닮았네? 정말 예술이야."
"하하하, 그렇게 좋아하시다니 다행이십니다."
"호호, 고마워요. 잘생긴 화가님."
세리아는 겉으론 별달리 내색을 하지 않았다. 물론 속으론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화가는 그림을 들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는 세리아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이건…?"
"제 명함입니다. 실례된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필요하시다면 반드시 절 찾아주십시오."
"호호, 정말 친절하시네요. 이런 그림을 그냥 주시다니……."
"하하. 아리따운 레이디의 이 정도는 당연한 거죠."
‘놀고 있군.’
스탐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한심하다 못해 웃기기까지 했다. 더 이상 보고 있으면 구역질을 할 것 같았다. 그래서 한마디 던졌다.
"아리따운 레이디가 아니면 않으면 줄 필요가 없다는 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화가는 물론이고, 세리아까지 똥씹은 얼굴이 되었다. 그 표정이란 참 볼만했다.
"스탐, 무슨 실례되는 말을 하는 거야?"
"실례는 무슨…, 말이야 바른 말이지. 네가 못생겼으면 저 자식이 관심이라도 가졌을 줄 아냐?"
그것은 정곡을 찌르는 소리였다.
"으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상대로 화가는 얼굴이 붉어진 채 그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스탐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딜 가냐?”
덥석.
스탐이 미술도구를 챙기는 화가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당황한 화가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한참을 바둥거렸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가 약간은 겁먹은 어조로 물었다.
“도대체 저한테 뭘 바라는 겁니까?"
“별거 아니야. 나도 초상화 한 장을 그려줬으면 싶어서 말이지."
말을 마친 스탐은 화가를 풀어준 뒤 의자에 앉았다. 자유로운 몸이 된 화가는 그를 한참 보더니 다시 연필을 들었다.
슥슥.
과연 힘의 논리는 대단했다. 화가는 금세 스탐을 보면서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림을 스케치하는 모습은 얼핏 보아도 대충대충 하는 티가 가득했다. 인상을 굳힌 스탐이 엄숙한 어조로 충고했다.
"대충대충 그리면 재미없을 줄 알아."
"크으…."
화가는 양심이 찔렸는지 그리고 있던 그림을 구겨서 풀밭에다 집어던졌다. 제국의 법대로라면 공원에다 쓰레기를 버리면 벌금을 내야 하지만 열 받은 모양인지 그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는 듯했다. 신경질적으로 던지는 것이 그것을 증명해 주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우여곡절 끝에 스탐의 초상화는 드디어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