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34화 (3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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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륜드라에서의 하루

"자, 여기……."

화가는 존댓말 하는 것도 싫은 듯 말끝을 흐리면서 그림을 스탐에게 건네주었다. 자신의 초상화를 본 스탐의 눈썹이 기묘하게 꿈틀거렸다.

"이건 또 뭐야?"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초상화는 스탐이 당장 그를 두들겨 패도 상관없을 만큼 못 그린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세리아의 초상화처럼 잘 그린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어중간하다고나 할까? 정말 머리 하나는 좋은 놈이었다.

“좋아, 가봐.”

스탐이 어깨를 툭툭 치며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화가는 미술도구를 챙기는 대신 손을 내밀었다.

“뭐야?”

"3실버입니다."

"뭐야?"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스탐이었다. 화가는 역정을 내는 스탐이 무서웠는지 안색이 새파래졌지만 할 말은 다 했다.

"단 1실버만 받겠습니다."

"뭐야?"

"저 레이디의 그림은 제가 원한 것이었지만 당신의 그림은 당신이 원한 거잖습니까? 저도 먹고 살아야 되니 어서 주십시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하하. 죽고 싶나 보군. 이 건방진 새끼가."

말을 마친 스탐이 손을 모으며 뼈마디를 두둑 거렸다. 화가의 얼굴이 더욱 더 새파래졌다. 흡사 죽을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그런 화가를 구원해 준 것은 세리아였다.

"진정해, 스탐! 저 화가분도 먹고 살아야 하잖아? 네가 이해해."

“공짜로 받아먹은 주제에 말은 많군.”

“시, 시끄러!”

찔리는 게 있는 지 금세 세리아의 안색이 붉어졌다. 스탐은 화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에게 그림값은 줄 생각이었다. 저런 불쌍한 놈에게 돈 떼먹어 봤자 자신만 꼴사나워질 테니까. 그리고 자신은 머지않아 캄에덴으로 귀환할 몸이라 인간의 화폐가 필요없는 몸이었다.

“내가 세리아를 봐서 참겠어. 자 받아라.”

화가에게 은전을 던져준 스탐은 적선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불쌍한 쪽은 저놈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스탐은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동안이었다.

"아아, 이 아리따운 레이디의 이름이 세리아였군요. 직접 묻기엔 실례인 것 같아서 무척 궁금했는데. 아무튼 고맙습니다. 세리아라…, 정말 외모와 똑같이 아름다운 이름이십니다."

스탐의 표정이 있는 대로 찌그러졌다. 한방 먹은 것이다. 화가는 은전을 품에 넣으면서 환하게 웃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이디 세리아. 다시 만나길 성스러운 빛의 신 아르티시앙님께 간절히 빕니다."

다시 한번 세리아의 손에 입을 맞춘 화가는 미술도구를 챙기면서 떠나갔다. 아마 그는 어느 정도의 승리감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말 한마디로 자기보다 힘이 센 상대를 한방 먹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것 하나만큼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자신이 골탕을 먹인 상대가 뱀파이어들중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자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하, 저딴 놈한테……."

스탐은 아직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비록 말싸움이긴 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아마 세리아도 그를 비웃고 있을 것이다.

“어라?”

세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린 스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어디 론가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아까전만 해도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왔었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린 스탐이 물었다.

"너, 어디가?"

"그 화가 따라가려고. 너무 마음에 들어. 같이 지내다 보면 너보다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아, 그래? 마침 잘됐네. 잘 가."

말을 마친 스탐은 세리아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골칫덩어리가 떨어져 나가는데 말릴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대환영이었다.

“어디 잘 되나 보자.”

그렇게 중얼거린 스탐은 벤치에 앉아 어디 론가를 향해 걸어가는 화가를 쫓아가는 세리아를 주시했다. 스탐은 잘 알고 있었다. 화가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 어떤 족속인지 말이다. 아마 세리아와 오래 있지는 못할 것이다.

터벅, 터벅.

화가는 어디로 가는 건지 무척이나 분주했다. 그를 따라가는 세리아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가관이군.”

스탐은 피식 웃었다. 인간이 엘프를 쫓아가도 모자랄 판에 엘프가 인간을 쫓아가다니? 세리아는 정말 괴짜였다. 아무튼 그녀가 화가의 지척까지 다가갔을 무렵이었다.

"아, 거기 고귀하고 아리따우신 귀족아가씨. 당신의 자태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 잎의 잎사귀처럼 떠돌다가 이곳까지 왔군요. 반갑습니다."

"오호호홋~, 반가워요. 가지고 있는 물건을 보니 당신은 화가신가 보군요."

"네. 비천한 제가 할줄 아는 건 단 한분의 레이디에게 그림이라는 행복을 선사하는 것이랍니다."

"호홋, 참 낭만적인 분이시군요."

"원하신다면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한 장 담아 드리지요."

“그래주시겠어요? 그럼 부탁해요. 멋진 화가님."

“…….”

터벅, 터벅, 터벅.

어느 귀족여인과 화가가 썸씽을 나누는 장면을 본 세리아는 바로 스탐에게 되돌아왔다. 스탐은 시큰둥한 얼굴로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스탐."

"뭐해? 저 화가랑 같이 논다면서"

"역시 너밖에 없어."

“저리 가.”

세리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스탐은 그녀를 뿌리치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쯤에서 포기한다면 세리아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아까와 같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히잉, 부끄러워하지 마."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가!"

“왜 이래? 아까 한 말은 거짓말이야. 그것 때문에 삐쳤어? 그럼 미안해.”

“누가 삐쳤다는 거야?”

스탐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이 세리아의 사과를 받아주고 같이 다니게 되었다. 유혹 세리아 앞에서만은 약해지는 스탐이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어두컴컴한 밤이 되었다. 공원곳곳에는 라이트 마법이 켜진 가로등들이 시야를 간간히 밝혀주고 있었다. 그것은 오붓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밤에 많이 오는 연인들을 축복해주었다. 연인은 아니었지만, 스탐과 세리아도 같이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탐."

"음?"

세리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한참 하늘만 구경하고 있던 그녀였다. 더군다나 밤이 되면서 서로간의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탐의 궁금함은 더했다. 세리아는 손가락으로 어두운 하늘을 혼자서 날아가고 있는 새를 가리켰다.

"저기 저 새 있잖아, 참 자유로워 보이지?"

“응.”

스탐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갔기 때문이었다. 세리아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나도 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보고 싶어.”

“세리아…….”

스탐이 정색하며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엘프인 그녀가 그런 소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엘프들은 자연을 벗 삼아 빛의 숲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다. 지금 그녀가 하는 소리는 꼭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하긴, 엘프라고 다 같은 성격만 지니지는 않았겠지. 나 같아도 숲속에서의 지루한 일상은 사절이니깐.’

스탐은 뱀파이어로 살아온 지난 세월을 떠올려 보았다. 대부분이 힘든 훈련과 전투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살아가는 목표는 분명했다. 이 강자존의 세계에서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투쟁적인 목표 말이다. 엘프는 그런 뱀파이어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평화의 종족이었다. 왕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단지 연륜이 높은 소수의 장로들이 다수의 엘프들을 대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만약 스탐이 엘프로 태어났더라면, 빛의 숲이 가진 평화로운 분위기에 휩쓸려 수백 년 동안 백지신세로 살아갔을 지도 모른다.

“스탐은 어때?”

세리아가 스탐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어느새 사라져가는 새를 바라보던 그가 웃으며 대꾸했다.

“나라고 다르겠어? 나도 저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보고 싶어. 날아가 지치면 나무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나니 지난 세월이 아련히 떠올랐다. 따지고 보면 뱀파이어로서의 삶도 속박의 연속이었다. 오로지 한 여자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강해지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몸을 혹사시켰으니깐 말이다.

‘참…, 내 인생도 파란만장하군. 세현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이렇게 악착같이 살아오다니…….’

괜히 그녀의 얼굴이 떠오르자 스탐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이 비극을 사전에 막고 싶었다.

“스탐…….”

세리아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스탐은 눈을 비비는 시늉을 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오해하지 마. 눈에 뭐가 들어간 거니까…….”

스탐은 히죽 웃었다.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앞에서 눈물이나 보이다니. 하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세리아였기에 지난 기억을 되돌아보며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녀가 왠지 모르게 고마웠다.

“고마워, 세리아.”

“무슨 소리야? 갑자기 고맙다니?”

“아, 아무것도 아냐. 그런데 그 목걸이는…….”

순간 목에 걸려 있는 물건을 본 스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뱀파이어인 그였기에 대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보랏빛을 띄고 있는 저 목걸이가 미스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목걸이의 존재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세리아라는 존재의 신비성 때문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참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튼 스탐은 인상을 찡그렸다. 미스릴은 아르티시앙의 금속이다. 뱀파이어에겐 절대적으로 좋지 않은 금속인 것이다. 물론 보거나 만진다고 상처를 입지는 않지만 본능적으로 우러나오는 거부감이란 게 있었다. 덕분에 스탐은 목걸이의 형태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스탐? 이 목걸이가 뭐 어쨌다고…….”

세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한 얼굴로 스탐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직 자신이 그러는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하긴, 이유를 알았다면 내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한참 전에 알았겠지.’

스탐은 자신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세현을 찾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만든 이 목걸이는 아나만디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뱀파이어가 미스릴에 거부감을 느끼듯, 엘프도 아나만디움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런데도 세리아가 태연한걸 보면 그녀는 아직 아나만디움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서로가 미스릴과 아나만디움으로 만들어진 목걸이를 매고 있잖아?’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컬했다. 앙숙인 뱀파이어와 엘프가 서로 종족을 상징하는 금속덩이를 가지고 나란히 앉아 있다니 말이다.

“아무것도 아냐. 그나저나 이제 가봐야겠어.”

말을 마친 스탐이 벤치에서 일어섰다. 한참 밤이 깊었다. 지금쯤 일행들이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을 것이다. 세리아와 헤어지는 게 조금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는 수없지.”

세리아는 체념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스탐은 손을 흔들며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그의 등으로 짜릿한 고통이 이어졌다.

짝!

"윽."

스탐이 손으로 등을 만지며 세리아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혀를 날름 내밀었다.

“왜 갑자기 등은 때리고 그래?”

"약 오르지? 흥, 곱게는 못 보내줘."

"어라, 너 발 밑에 뭐가 있다?"

“꺄악!”

세리아는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놀랐는지 안색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힝, 속았네."

“바보. 그걸 당하냐?”

스탐이 세리아의 목덜미를 잡으며 피식 웃었다. 세리아가 울상을 지으며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바둥거리는 게 귀엽게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퍼억!

"읍."

스탐은 사타구니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강력한 육체를 가진 뱀파이어라도 남성체들의 공통적인 약점은 어쩔 수 없나보다. 스탐은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세리아를 노려보았다.

"너 지금 안 오면 죽는다."

"흥. 내가 그 말에 겁먹을 줄 알아?"

혀를 쑥 내민 세리아가 재빨리 도망가기 시작했다. 화가 난 스탐은 곧바로 뒤쫓아 갔다.

덥석.

세리아가 여유를 부려서였을까. 천천히 뛰어 쫓아갔음에도 금방 붙잡을 수 있었다. 스탐은 그녀의 귀를 잡아당겼다.

“이리 와.”

“아야야…. 스탐,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 손 좀 놓아줘.”

“웃기지 마.”

스탐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귀에서 손을 뗐다. 그리곤 아픈 귀를 어루만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마 자신이 가는 게 아쉬웠나보다.

“아무튼 잘 가.”

“응. 언제 다시 만나자.”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스탐은 멀어져만 가는 세리아를 바라보았다. 엘프면서도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참 특이한 여자였다. 캄에덴에 돌아가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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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안올려지길래..

집에 와서 뒤늦게나마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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