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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죽음의 던전 알 카스턴의 무덤
퍼버벅, 퍼버버벅!
스탐은 쉴 새 없이 버닝 아머를 두들겨 대었다. 이쯤 되었으면 지쳤을 만도 한데 그의 공격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벌써 대여섯 기의 버닝 아머들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음?”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냐면 버닝 아머들이 갑자기 뒷걸음질을 치더니 도망가기 시작한 것이다.
“겁먹은 거냐?”
스탐이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생명체도 아닌 주제에 겁먹기는. 그는 그들을 쫓아가면서 박살내기 위해 곧장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잘못된 판단이었다.
처억.
“뭐, 뭐지?”
스탐이 당황했다. 걸음을 멈춘 버닝 아머들의 몸에서 스파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심상찮은 기운을 느낀 스탐은 다급히 그들에서 물러섰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지지지직!!
버닝 아머의 몸에서 흐르던 강력한 전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탐을 휘감았다.
“으으윽!”
그 전류에 감전된 스탐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서도 그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젠장, 마법이라니!?’
그것도 보통 마법이 아니었다. 이 마법은 4클래스의 전격계 마법인 버스트 볼트였다. 물론 그는 그 정도 수준의 마법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다. 이렇게 다수가 아닌 이상에야 말이다.
“하악, 하악…….”
어느새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던 스파크가 사라지자 스탐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지가 오래였다. 버닝 아머들을 처치하겠다는 의지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오로지 도망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빌어먹을, 내가 저따위 놈들에게서 도망이나 치다니!”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목숨이 먼저였다. 일행의 안위를 위해 왼쪽 갈림길을 택한 스탐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쿵!
금세 버닝 아머들이 뒤쫓아 왔다. 뒤를 돌아본 스탐이 욕지기를 퍼부었다.
"빌어먹을, 왜 거리차가 점점 좁혀지는 거지?"
버닝 아머들은 속도가 느렸다. 하지만 그들의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아마도 아까전의 마법에 몸이 정상이 아니라서 그런 것 같았다.
갑자기 절망감이 밀려왔다. 힘은 없는 데,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잡혀 죽을 것이다.
끼리릭.
“헉!”
그때였다. 스탐의 얼굴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바닥이 짚이지 않았다. 발바닥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함정이다!’
스탐은 이런 종류의 함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잘못 밟으면 바닥이 꺼져 모험가를 추락사 시킨다. 하지만 사실 흔한 함정이었기 때문에 평상시의 스탐에겐 식은 죽먹기였다. 문제는 지금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결국 스탐은 추락했다.
"으아아아~!"
비명소리가 스탐이 떨어지는 넓은 공간에 메아리쳤다. 소리를 질러도 소용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에.
‘이렇게 죽는 구나.’
스탐이 망연자실했다. 사실 버닝 아머에게 죽든, 추락해서 죽든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은 편했다. 그는 우연찮게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앞에는 벽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스르릉!
순식간에 디스트로이어가 뽑혀 나왔다. 어두운 빛의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자 스탐은 주저 없이 벽에 찔러 넣었다.
푸욱!
“으으윽!”
스탐의 입에서 신음성이 튀어나왔다. 관성 때문에 팔이 빠질 지경이었다. 물론 죽는 것보다는 백배 나았다.
“휴우, 어쨌든 살아남은 건가?”
스탐이 잠시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긴 쇠꼬챙이가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발을 뻗으면 살짝 닿을 정도였다. 아마 조금만 검을 늦게 박았어도 끔찍한 꼴이 났을 것이다.
휘이이잉~, 쿠당탕탕탕!
갑자기 요란한 소리가 그의 귓전을 자극했다. 스탐이 깜짝 놀라 검을 놓칠 뻔했다.
"뭐, 뭐야?"
이윽고 스탐이 엄청난 굉음이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입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버닝 아머들이 쇠꼬챙이에 찔려 영락없는 고철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함정의 높이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단단하기 짝이 없는 저 불의 갑옷들도 어쩔 수 없었나보다.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진작 핵이 터진 듯했다.
“휴, 고철덩어리도 끔찍한데 생명체였다면 정말…….”
말을 마친 스탐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지?”
스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벽에다 검을 꽂아서 목숨은 건졌다. 하지만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주변은 온통 단단한 벽이 자리 잡고 있고 바닥은 쇠꼬챙이 일색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자신이 추락했던 부근밖에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느 세월에 저곳까지 올라 가겠는가?
"푸하핫, 평생 이러고 살아야 되나?"
웃을 일이 아니었다. 정말 이렇게 있다가 굶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막막하기만 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응?”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가 보였다.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이었지만 뱀파이어인 스탐에겐 확연히 보이고 있었다. 사각형의 모양새를 한 구멍. 그것은 바로 통로였다. 스탐이 탄성을 질렀다.
“하아…, 스탐, 넌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구나!”
희망이 보였다. 스탐은 손가락에 다크 오러를 집약시켰다. 그리곤 한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러자 손가락이 벽을 뚫고 짚혀들었다.
“좋았어.”
그는 희열을 느끼며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그 손으로 벽을 짚었다. 그렇게 스탐은 벽에 들러붙는 데 성공했다.
푹, 푹, 푹.
스탐은 자신의 힘을 십분 발휘해 두 손으로 벽을 짚으면서 서서히 통로를 향해 올라갔다. 익숙해지니까 통로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통로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드러누웠다.
"휴. 나른한 게 잠이 오는 걸……."
스탐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버닝 아머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였을까? 피로가 물밀 듯이 몰려왔다. 문득 일행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일단은 휴식을 취하면서 만신창이가 되는 몸을 가누는 것이 먼저였다. 스탐은 그렇게 깊이 잠이 들었다.
"하아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잠에서 깨어난 스탐은 기지개를 하면서 찌뿌둥한 몸을 활짝 폈다.
“흐음…,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군.”
자신의 몸을 점검하던 스탐이 그렇게 말한 뒤 몸을 일으켰다. 보통 인간이었더라면 앓아누워도 한참 앓아누웠을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가 가진 강력한 신체는 단순한 수면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회복이 가능했다.
“그럼 들어가 볼까…….”
스탐은 통로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아마도 이곳은 일종의 통풍구로 보였다. 출구는 머지않아 나타났다.
처억.
무난히 바닥에 착지한 스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들어온 곳은 바로 이곳에서 죽어간 모험가들이 그토록 원하던 보물창고였다. 곳곳에 금은보화가 번쩍이고 있는 것이 안에 들어가 수영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스탐의 눈은 단 장소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또 뭐지?”
스탐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눈앞에 있는 진귀한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드래곤의 동상이었다.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드워프들의 작품으로 보였다. 동상의 주요 부위에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아마 저것 하나의 값만 따져도 웬만한 소국가의 몇 년 치 예산은 나올 것이다.
“나한테 쓸모 있는 물건은 아니지.”
스탐은 금세 동상에 대한 환상을 지웠다. 동상은 언뜻 보아도 규모나 부피가 장난 아니게 커 보였다.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이곳을 빠져 나가야 하는 데 미쳤다고 저걸 들고 가겠는가?
“궤짝과 검이라…….”
스탐의 시선은 동상의 근처에 있는 두 물건에게로 갔다. 궤짝은 동상의 평평한 부근 위에 올려져 있었고, 검은 동상의 옆에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궤짝과 검은 내가 가져야겠군."
스탐이 눈을 반짝였다. 아마 저 궤짝과 검은 이 던전의 가장 중요한 물건들일 것이다. 궤짝이야 열어봐야 알겠지만 검은 척 보아도 명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다이어에게서 검술을 5년 동안이나 배웠고, 3년을 용병으로 살아와 검을 보는 눈은 충분했다. 아마 저 검은 알 카스턴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최고의 검일 것이다. 물론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명검이 담보라면 그런 것쯤이야 충분히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그때였다
그르르르.
"무슨 소리지?"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자 깜짝 놀란 스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금세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뼈다귀가?”
이상한 소리의 원인은 바로 뼈다귀들이였다. 여기저기에 산재되 있었던 탓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큰 관심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스탐은 이내 그것이 평범한 뼈다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두둑, 두둑.
뼈다귀들은 갑자기 서로 모여들더니 합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느새 해골인간의 형상을 띄었다. 놈은 주변을 기웃거리더니, 스탐이 눈독 들이고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이 저절로 움직이더니 놈의 손에 잡히는 게 아닌가?
“스켈레톤은 아니군.”
그 광경을 본 스탐이 단언했다. 스켈레톤이라면 저런 짓은 못할 것이다. 스켈레톤이라면 녹슨 티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의 해골인간은 뼈가 약간의 잡티도 없이 새하앴다. 또한 뼈 사이에선 냉기가 새어나왔는데 멀리 있는 스탐도 느낄 정도였다. 그는 금세 상대가 누군지 깨닫고 소리쳤다.
"용아병이군!"
용아병. 드래곤의 이빨로 만든 최고의 전사.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고, 단지 전설상에서만 전해지는 존재였다. 하지만 스탐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저 용아병이 어쩌면 데스 나이트보다 더 강력할 것이라는 사실을.
[어리석은 침입자여, 이곳에 온 대가로, 죽음을 맞이하리라.]
"닥치고 이거나 먹어!"
제일 먼저 검을 뽑은 쪽은 스탐이었다. 금세 흑마기가 충만한 디스트로이어가 그대로 용아병의 미간을 향해 쇄도했다.
챙!
그러나 그의 검은 용아병이 뻗은 검에 의해 금방 튕겨져 나갔다.
[형편없구나…….]
용아병의 웅웅거리는 음성이 귓가를 자극했다. 스탐은 이를 악물며 용아병을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채애앵!
"크윽, 이건 뭐지!?"
자신의 일격이 허무하게 막히자 스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완력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흑마기를 불어넣은 자신의 막강한 검격이라면 당연히 자신이 우세해야만 했다. 이유가 뭔지 모르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검기?"
스탐은 금방 해답을 찾았다. 용아병의 손에 들린 검의 검신이 새하얀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갑자기 검기라니? 스탐은 금세 도리질을 쳤다.
‘아니, 검기는 아닐 거야. 아마도 검 자체에서 형상화시킨 것 같은데…….’
하지만 여유부릴 때가 아니었다. 용아병의 검이 날아왔다. 스탐은 다급히 검을 뻗어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냉기가 서린 용아병의 검은 디스트로이어를 간단히 제압하고 무방비상태가 된 그를 유린했다.
캉!캉! 촤악!
“크아악!”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스탐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보통 놈이 아니군, 제기랄!"
빌어먹을 노릇이었다. 천하의 배틀러가 생명체도 아닌 상대에게 이 꼴이 되다니! 스탐은 상처를 지혈한 뒤 검을 들어 용아병와 대치했다. 용아병도 지능이 있는 건지 섣불리 공격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빈틈을 노리려는 것이리라. 스탐은 일부러 빈틈을 내주었다.
휘아아악!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동상마냥 조용히 서있던 용아병이 괴물같은 스피드로 스탐에게 육박해 검을 찔러 들어왔다.
스팟, 퍼억!!
두 가지 소리가 방안을 휩쓸었다. 첫 번째 소리는 용아병의 검이 스탐의 배를 훑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그리고 두 번째 소리는 다크오러가 가미된 스탐의 주먹이 용아병의 머리를 휘갈기는 소리였다.
“크으으.”
스탐이 배를 부여잡으며 통증을 호소했다. 스켈레톤도 충격이 있는지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래도 남는 장사군.”
스탐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배만 베였지만 놈은 머리를 제대로 맞았다. 뼈를 주고 살을 깎은 것이다. 어찌 보면 도박이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성공적이었다. 스탐은 이 기세를 몰아 두 주먹을 불끈쥔 채 상대에게 연타를 먹였다.
퍼퍽! 퍼퍼퍽!
과연 스탐이 발휘하는 투술의 힘은 엄청났다. 순식간에 용아병의 뼈대에 심하게 금이 갔고, 갈비뼈 세 개가 박살이 나버렸다. 그런 상당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용아병은 멀쩡했다.
카캉!!
어느새 상하로 양단해오는 용아병의 공격을 막아낸 스탐은 다시 반격을 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