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39화 (39/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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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새로운 친구와의 신고식

[K.C. 4318년 8월 2일]

후르릅.

그가 무언가를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투명한 유리잔에 들어 있는 것은 유난히 붉어보였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원천이라 불리는 피였다. 그가 말했다.

"후후후, 역시 인간 처녀의 피는 그 어떤 피도 따라올 수가 없을 정도로 맛있어. 엘프의 피도 깔끔하긴 하지만 맛은 없었지."

사내는 의자의 느긋하게 앉은 채 실없는 소리를 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해 보였지만 그가 내뿜는 기운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압감 그 자체였다. 스탐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로드."

"어서와라, 스탐. 임무를 맡느라 수고했다."

“수고라니요, 오히려 좋은 경험이 되었습니다.”

아이슬로너는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스탐은 그에게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제가 3년 동안 모든 인간 세계의 정보입니다.”

아이슬로너는 그 서류를 받아 들었다. 그리곤 한참을 훑어보다가 흥미가 없다는 듯 내려놓았다.

“난 이런 자잘한 정보에는 관심이 없네. 그나저나 그 일은 잘 해냈나?”

스탐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말하는 그 일이라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로드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던 물건도 찾아주었고 말입니다.”

말을 마친 스탐은 아이슬로너를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참 궁금했다. 몹시 화를 낼까, 아니면 아쉽다는 표정을 지을까?

“잘했다.”

놀랍게도 아이슬로너는 흡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을 본 스탐은 뭔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주제 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척 궁금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해보게.”

“그 물건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로드께서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도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기에 인간들에게 그것을 준 것입니까?”

스탐이 궁금한 것도 당연했다. 드래곤 하트의 존재는 엄청난 힘의 집결체였다.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귀중한 물건이었다. 인간들에게 마법사가 있듯이, 뱀파이어들에게도 흑마술사가 있었으니까.

“자네가 알아야할 이유가 없네.”

아이슬로너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것이 스탐의 궁금증을 더욱더 증폭시켰다.

“어째서 제가 알면 안 된다는 겁니까? 저는 당신의 명을 따라서 그것을 인간들에게 주었습니다. 가르쳐 줘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자네가 알아야할 이유가 없다고 했네.”

스탐은 똑같은 응답에 화가 나 뭐라 항변하려고 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아이슬로너의 살기가 자신에게 줄기줄기 뻗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이마에선 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온 몸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한 가지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이 나라의 실권을 좌지우지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말해줄 것이네.”

아이슬로너는 금세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했다. 방금 전 사정없이 짓누르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아이슬로너가 축객령을 내렸다.

"그럼 어서 나가 보도록. 흉폭한 뱀파이어 놈 하나가 자네를 무척이나 기다리고 있으니깐 말이야."

“알만한 녀석이군요.”

스탐은 피식 웃었다. 아이슬로너가 말하는 그 사내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스탐은 말을 마친 뒤 문밖을 나섰다. 그러면서 아이슬로너를 홀끗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계획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알아낼 것이다.

“3년 만이군.”

어느새 혈왕성을 빠져 나온 스탐이 레버쿠젠의 시내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같은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캄에덴과 인간 세계는 확연히 달랐다. 비교하자면 인간 세계에서 흐린 날이 캄에덴에서 가장 화창한 날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지금 시각에 돌아다니는 뱀파이어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하프 뱀파이어였다.

“캄에덴에 온 소감이 어때?”

말을 마친 스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행인들이 자신을 미친놈 마냥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혼자서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니까. 하지만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분명히 있었다.

스탐이 드래곤의 무덤에서 얻은 검은 에고 소드였다. 자아를 가지고 있어 자신의 주인에게 의사를 전할 수 있다는 그 에고 소드 말이다.

‘이 검이 알 카스턴이라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에고 소드는 자신이 무덤을 만든 장본인, 화이트 드래곤 알 카스턴이라고 주장했다. 당연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그의 방대한 지식은 스탐이 그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오랜만에 오니 감회가 새롭군.]

“드래곤이라는 놈이 뱀파이어의 땅에 와서 뭐가 감회가 새로운 거야?”

[너도 알 텐데? 내가 초대왕을 도왔다는 것을 말이야.]

스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화이트 드래곤 알 카스턴은 캄 크리스토퍼와 사투를 벌인 끝에 친구가 되었다. 그리곤 그를 도와 캄에덴을 건국했다고 한다.

그에게 입을 여는 대신, 스탐은 속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했다. 검을 잡은 직후로 스탐과 그는 정신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에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그래서 동족들에게 이단아로 낙인 찍혔겠군?’

스탐은 4000여 년 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암흑신 벨리우드와 빛의 신 아르티시앙이 격돌했다는 천마대전 이후, 아벨리오스는 하이오크와 드래곤들의 세상이었다. 드래곤들은 드래곤 필드(Dragon Field)에서 절대자로 군림했고, 하이 오크들은 타 종족을 노예처럼 부렸다. 하지만 그들의 부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뱀파이어 캄 크리스토퍼가 지옥의 문(Hell Gate)을 연 것이다.

지옥의 문을 열고 들어온 지옥의 군대는 아벨리오스 대륙을 피로 물들였다. 드래곤과 하이 오크는 서로 연합해 강대한 지옥의 대군에게 맞서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그들의 처참한 파멸이었다. 하이오크들은 아예 멸망했고, 드래곤들도 대부분이 죽었다. 하지만 서로의 힘이 워낙 강력했던 탓에 악마의 군대도 일망타진 되었다. 그리고 그 어부지리를 노려 인간과 뱀파이어들은 각자의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상황이 그렇게 됐는데 드래곤들이 뱀파이어들을 좋아할 리 없었다. 그들은 뱀파이어라는 종족 자체를 철천지원수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동족인 알 카스턴이 캄 크리스토퍼가 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이단아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캄 크리스토퍼가 죽고 난 뒤 나는 드래곤 필드로 돌아갔지. 네 말대로 처음엔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정말 냉담했지. 나는 그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폐허가 된 드래곤 필드를 복구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다행히 성과가 있더군. 당시 살아남은 웜급의 드래곤은 나를 비롯해 레드 드래곤 듀리케르와 골드 드래곤 아스테리온 뿐이었지.]

그 당시는 알 카스턴의 힘이 워낙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그가 어느 정도 복구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일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특히 아스테리온은 과장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환대하면서 한 가지 부탁을 했다고 한다.

[그는 나에게 천마대전 직후 사라졌던 어둠의 창과 빛의 날개를 구해달라고 했지. 일족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자신이 있었던 나였지. 수없이 긴 세월동안 아벨리오스 대륙 전역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것만 찾아 다녔다.]

수천 년의 긴 시간 끝에 결국 두 물건을 찾는 데 성공한 알 카스턴은 아스테리온에게 곧장 그것을 주었다. 그러자 그는 한 가지 물건을 더 찾아달라는 부탁을 했다고 한다.

[내가 그를 의심하게 된 건 그 즈음이었다. 정상적인 의도라고 보기엔 지옥의 서는 너무도 의심 가는 물건이었지.]

‘지옥의 서?’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물건이었다. 비단 지옥의 서 뿐만이 아니었다. 캄에덴의 역사엔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하는 스탐이었다. 하지만 어둠의 창이나, 빛의 날개와 같은 물건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만약을 대비해서 갤비스 산맥 깊은 곳에다 던전을 만들었지. 그리고 마법을 걸어 내가 죽었을 경우 영혼을 저절로 공간 이동해 합치게 만들었지. 바로 이 검에다가 말이야.]

‘사실이야?’

스탐은 알 카스턴의 검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평범한 검이 아니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알 카스턴의 뇌가 깃든 검이라니? 물론 그러니까 그가 이 검의 자아가 되었겠지만 말이다.

그는 스탐을 신경 쓰지 않고 계속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예상대로였다. 놈은 내가 지옥의 서를 주자마자 날 죽였다. 1:1로 싸웠다면 내가 이겼겠지. 하지만 놈은 듀리케르와 합세했다. 덕분에 난 다른 드래곤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빨리 죽어버렸지.]

‘듀리케르가 그렇게 강해?’

스탐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는 것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알 카스턴의 무위는 질릴 정도로 들었다. 화이트 드래곤 자체가 마법과 실전에 골고루 능했으니 말이다. 그런 그를 합공했다곤 하나 그렇게 빨리 처치해버리다니?

[아벨리오스 대륙 최강의 드래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놈의 브레스에는 그 어느 것도 살아남을 수 없다. 같은 에인션트 드래곤인 나나, 아스테리온도 말이야.]

‘그랬구나…….’

[아무튼 그렇게 해서 나는 내 무덤이 되어 버린 던전 안에서 수백 년 동안을 검으로 지냈다. 그리고 넌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버닝 아머와 용아병을 처치하고 날 가지게 되었지.]

‘너도 참 나만큼이나 불행한 녀석이구나.’

스탐이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바라보았다. 일족에게 버림받고 이용당한 알 카스턴과 전생을 기억을 지니고 뱀파이어로 태어난 자신. 둘이 만난 것도 어쩌면 이것도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알 카스턴…….’

[카스턴이라고 불러. 용족의 언어로 알이라는 단어는 살아있다는 뜻을 지녔지. 지금의 난 죽은 몸이나 다름없어.]

‘아, 알았어. 아무튼 카스턴. 넌 이제부터 어쩔 셈이야?’

[어쩌긴 뭘 어째? 듀리케르와 아스테리온, 그 두 놈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겠어?]

카스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깃든 검은 용아로 만든 마법의 검이었다. 그 점을 빼면 평범한 무기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는커녕,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검이 부서지지 않는 한 나는 평생을 이 꼴로 보내야 하지.]

카스턴의 말에 스탐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가 부셔줄까?’

어떻게 보면 솔깃한 제안일 것이다. 지성체인 드래곤이 한낱 검에 영혼이 갇혀 버리다니, 치욕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스턴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듀리케르와 아스테리온이 살아 있는 한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 몇 백 년이 걸릴 진 모르겠지만 너와 같이 있겠다. 어쩌면 네가 놈들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를 테니깐.]

‘풋, 꿈같은 소리를 해라.’

스탐이 피식 웃었다. 캄 크리스토퍼는 알 카스턴과의 치열한 승부 끝에 이겨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당시 알 카스턴은 웜급이었고, 초대왕은 캄에덴 4000년 역사를 통틀어도 최강의 전사였다. 그럴진대 어떻게 자신이 에인션트급의 드래곤 둘을 죽일 수 있을까? 그때였다.

"안녕하십니까."

지나가던 하프 뱀파이어 하나가 인사를 했다. 스탐은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같이 보고 있던 카스턴이 물었다.

[저 녀석은 너와 좀 다르게 생긴 것 같은데, 아니 이 주변의 놈들이 다 너와 달라.]

‘하프 뱀파이어니까.’

[하프 뱀파이어?]

무척 궁금하다는 어조였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캄에덴 초창기에는 하프 뱀파이어가 없었으니까. 스탐은 천천히 카스턴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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