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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새로운 친구와의 신고식
‘하프 뱀파이어는 이종족을 뱀파이어가 물어서 수족으로 만들거나, 번식을 통해서 생겨나지. 여기 있는 녀석들은 거의 다 후자의 경우야. 캄에덴의 초중반기에는 이들의 수가 무척 적었어.’
그러나 23대 뱀파이어 로드 유엔 다르칸의 정책은 많은 것을 뒤바꿔 놓았다. 그가 시행한 하프 뱀파이어 증강계획은 수많은 종족을 납치해 수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유엔 다르칸은 인간 들과의 마찰을 우려해 밑바닥을 기는 빈민층이나 삶의 낙오자들만 추려내 납치하도록 했다. 덕분에 몇 만에 달하는 인간들을 하프 뱀파이어로 귀속시켰음에도 인간들은 끝내 뱀파이어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인간들이 대부분이지만 엘프들도 없지는 않았어. 너도 잘 알다시피 캄에덴은 엘프들과 원수지간이라, 건국 후부터 지금까지 빈번한 전쟁이 일어났지. 유엔 다르칸은 그 분쟁의 와중에 뱀파이어가 몇 명이나 죽어나가면서도 엘프를 생포해 하프 뱀파이어 화시켰지. 그래서 지금엔 엘프계 하프 뱀파이어가 수백 명이나 돼. 아, 저기 한명 보이는군.’
스탐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서는 하프 뱀파이어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외형으로 볼 때 인간출신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귀는 길었지만, 피부는 옅은 회색을 띄고 있었다. 절제되었으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이 유난히 강렬해 보였다. 허리엔 얄팍한 검집이 채워져 있었고, 등에는 활과 화살통이 메여 있는 게 영락없는 전사로 보였다.
저벅, 저벅.
그는 스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인사를 할 모양인가보다.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이 세계에서 하프 뱀파이어라면 뱀파이어에게 인사를 하는 게 당연시 되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바로 피지배층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젠장.”
하지만 스탐은 금세 깨달았다. 눈앞의 엘프계 하프 뱀파이어는 단순히 인사를 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급히 검을 들었다.
채앵!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덕분에 행인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이런!”
스탐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상대의 검은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한참 빨랐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분명 한군데가 베였을 것이다.
“누구냐?”
스탐이 카스턴을 뻗으며 소리쳤다. 배틀러인 자신을 이토록 당황스럽게 만들다니. 평범한 상대는 아니었다.
“네가 스탐 베르크냐?”
상대는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반문했다. 그 점이 스탐을 더욱 더 열받게 만들었다. 하프 뱀파이어가 뱀파이어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죽으려고 환장한 놈인가 보다.
“너 이 자식, 날 잘 알면서 이런 짓을 했어?”
스탐은 당장이라도 때려눕힐 듯한 기세로 소리쳤다. 하지만 문제의 하프 뱀파이어는 천하의 배틀러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까닥였다.
“따라와라.”
“뭐, 뭐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누구더러 따라오라는 것인가? 일개 하프 뱀파이어가 자신에게 저런 하극상을 벌이다니, 오래 살고 볼일이었다. 하지만 스탐도 그를 만만히 보지는 않고 있었기에 어디 론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그를 따랐다.
[하프 뱀파이어가 다 이렇게 반항적이냐?]
카스턴의 질문에 스탐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놈은 예외야.’
확실히 하프 뱀파이어들이 가끔씩 뱀파이어들에게 반감을 드러내기는 한다. 하지만 대놓고 앞에서 무기를 휘두를 정도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놈은 자신의 살기 앞에서도 위풍당당했다. 정말 특별 케이스였던 것이다.
“어디까지 갈 셈이냐?”
스탐이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을 냈다. 놈은 어느새 수도를 벗어나 인근의 숲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쯤이면 되겠군.”
놈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고개를 돌리더니 손짓을 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이 자식이!”
하지만 스탐은 이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놈이 자신에게 화살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거리가 워낙 가까웠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흑마기를 끌어올렸다.
팅!
몸에 부딪힌 화살이 힘없이 튕겨 나갔다. 이게 바로 배틀러의 힘이었다. 평범한 뱀파이어였다면 흑마기를 끌어 올려도 화살이 몸에 박혔을 것이다.
"제기랄!"
스탐은 욕지기를 퍼부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문제의 하프 뱀파이어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찰나에 숲 속으로 숨은 것 같았다. 정말 빠른 놈이었다. 카스턴이 기대된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후후, 첫 전투인가? 무척 기대되는군.]
스르륵
갑자기 카스턴의 검신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곡도로 바뀌었다. 스탐이 깜짝 놀랐다.
“이건 또 뭐야?”
[나는 평범한 마법 검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 이 검은 용아와 수은으로 이루어져 있지. 그래서 네 의지에 따라 검의 형태를 바꿀 수 있다.]
“그래? 이야…, 정말 대단한걸.”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검에 금이 가는 것 따위는 우려할 필요도 없었다. 이런 희한한 검은 아벨리오스 내에서 카스턴뿐일 것이다.
“아무튼 이제 그 빌어먹을 엘프 놈부터 찾아봐야겠군.”
스탐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일단 상대는 엘프 출신이니 당연히 원거리 전에 능할 것이다. 하기야 근접전을 펼치면 배틀러인 그의 백중세였다.
‘정말 귀신같은 놈이군.’
스탐은 상대의 은신술에 혀를 내둘렀다. 사실 뱀파이어가 배틀러의 경지에 오르면 엄청난 초감각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엄청난 은신술을 지니지 않은 한에야 숨으면 찾는 게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문제의 하프 뱀파이어는 종적조차 잡기 어려웠다. 아무리 정신을 집중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저건 또 뭐지?”
그때 스탐의 시야에 무언가가 보였다. 그 물체는 머리통만한 크기의 눈이었는데, 하늘에 둥둥 떠있었다. 눈동자는 스탐을 향하고 있었다.
[비홀더로군.]
카스턴의 말에 스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홀더는 지옥의 생명체였다. 그들은 소환마법으로 소환을 해야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은 특별한 전투능력은 없었지만 소환자와 시야를 공유할 수 있었다.
“아뿔싸.”
소환자와 시야를 공유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제든지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소리였다. 스탐은 급히 몸을 굴렸다.
푸욱!
"크윽."
그러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스탐의 두 눈이 고통으로 물들었다. 어느새 어깨에는 화살이 꽂혀 있었다. 여지없이 튕겨져 나갔던 아까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레이 오러(Gray Aura)? 제길."
스탐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화살을 뽑았다. 화살촉에는 회색빛의 기운이 차츰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도 그레이 오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정순하고 방대한 마나를 지닌 엘프가 흡혈을 당해 하프 뱀파이어가 됐을 경우에 생긴다는 회색의 오러. 이런 기이현상이 왜 일어나는 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단지, 두 종족이 각각 벨리우드와 아르티시앙의 후계라 일컬어지는 상극관계이기 때문이라는 추측만 있을 법이었다. 아무튼 이 그레이 오러는 파괴력 자체는 강하지 않지만, 엘프의 마나나 뱀파이어의 흑마기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말 그대로 천적관계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유엔 다르칸이 그토록 엘프를 생포하는 데 집착했던 이유도 이 점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왜 그렇게 강한지 알겠어.”
의문이 풀린 스탐이 더 이상 방심하지 않겠다는 듯 다크 오러를 끌어 올렸다. 상대가 그레이 오러의 소유자인 이상 방심할 수는 없었다.
슈슉―!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스탐이 바닥을 굴렀다. 금세 두발의 화살이 그의 바로 옆에 꽂혔다.
‘무서운 놈.’
스탐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즉사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계속 이렇게 피하고만 있으면 고슴도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는 서서히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놈이 화살을 다시 쏘면 위치를 파악하고 바로 추격할 생각이었다.
슉!
또 다시 한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이번엔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 탓에 스탐은 어렵지 않게 피했다. 그리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뛰었다. 그 동작이 너무도 순간적이었기에 마치 용수철이 튕기는 듯했다.
슈슈슉!
하프 뱀파이어가 당황한 모양인지 화살이 다량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그것들을 스탐을 허망하게 스쳐갈 뿐이었다. 평정심을 잃은 자의 화살이 정확할리 없었기 때문이다.
"흐앗―!!"
목표물을 발견한 스탐이 곧장 카스턴을 휘둘렀다. 그레이 오러까지 쓸 줄 아는 엘프계 하프 뱀파이어니 그 속도가 무척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놈은 결과적으로 상대를 잘못 만났다.
푸욱!
스탐이 쥔 검 카스턴이 냉기를 내뿜으며 밑으로 내리그어졌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놈이 두 동강났다.
‘아차, 죽이는 건 아니었는데…….’
스탐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상대는 엄청난 인재였다. 아마 쉐도우 스나이퍼들을 통틀어서도 녀석 만한 실력자는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에게 시비를 건 놈의 실수였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스탐은 금세 자신이 착각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에 감각이 없다.’
벌써 8년을 검술로 보낸 그다. 지금 손에 들어오는 감각은 익숙한 감각이 아니었다. 스탐은 하프 뱀파이어인줄로만 알았던 존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스르르~.
놀랍게도 그것은 검은 안개였다.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생명체가 두 동강났다면 절대 그런 현상을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답은 하나였다.
"허상?"
푹!
"크헉!"
놀랄 틈도 없었다. 어느새 등짝에 화살이 꽂혔다. 엄청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제기랄.”
하지만 고통은 둘째였다. 스탐은 큰 충격을 받았다. 상대를 쓰러뜨렸다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방심했는데, 기습적으로 날아온 화살에 정통으로 맞았다. 뱀파이어에 배틀러이기까지 한 자신이 말이다.
[흥분하지 마라. 진정해. 저런 상대는 냉정한 마음가짐으로 싸워야 이길 수 있다.]
카스턴의 주의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서야 스탐은 제정신을 차리고 냉정히 상황을 주시했다. 놈은 여전히 어디 있는 지 위치도 파악되지 않고 있었다. 엄폐물이 가득한 숲 속만 아니었다면 되었을 텐데.
“일단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군.”
말을 마친 스탐은 쉴 새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는 표적이야말로 사수(射手)가 가장 노리는 먹잇감이었다.
슝! 슈슉!
화살이 계속 날아와 발밑에 박혀들었다. 스탐은 그 아슬아슬한 위기를 일종의 스릴로 끌어올리면서 상대의 기척을 잡기 시작했다.
‘잡았다.’
화살을 너무 남발해서였을까. 비교적 빨리 놈의 기척을 잡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스탐은 또다시 놈의 화살에 적중 당했다.
“크윽.”
맞은 부위가 무척 고통스러웠다. 덕분에 다 잡은 기척을 잃어버렸다. 스탐은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분통을 터뜨렸다. 버닝 아머나 용아병과 싸울 때에는 처절했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달랐다. 지금은 어떻게 해보지도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비참했다.
"정말 미치겠군. 이대로라면 놈의 상판대기도 못보고 화살에 쓰러지겠어."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그럴지도 몰랐다. 또 다시 화살이 날아왔다.
슈우욱―!
간발의 차이로 화살을 피한 스탐은 본능적으로 방향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이번엔 놈을 잡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잡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