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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불타는 브롬바르트
[K.C. 4318년 8월 10일]
캄에덴의 남동쪽에 위치한 플로센 지방은 땅이 비옥했고 가축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셀리온 평원과 인접해 있어 몬스터들이 가장 군침을 흘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큰 문제는 없었다. 어떻게 보면 몬스터도 뱀파이어들의 먹이였으니까. 소수의 몬스터들이 와봤자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우르르르.
"쿠워어어어!!!!"
먼지구름이 일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한산하던 플로센의 드넓은 평야지대를 짓밟으며 돌격해오는 무리들 때문이었다. 새까맣게 대지를 뒤덮은 그들은 바로 셀리온 평원의 침략자들이었다.
몬스터들은 항상 플로센을 침략해 왔었기 때문에 이례적인 일은 아니었다. 문제는 숫자였다. 그들의 수효는 얼핏 보아도 수백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경우였다. 수백만이나 되는 몬스터들이 동시에 쳐들어오려면 그들을 통제할만한 존재가 있어야 했으니깐 말이다. 셀리온 최강의 몬스터라는 트윈 헤드 오우거조차도
"크크크! 나의 자랑스러운 수족들이여……."
유난히 눈에 띄는 몬스터가 하나 있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드넓은 대지와 끝없는 하늘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그는 흉물스러운 웃음소리를 뿜어내었다.
피로 범벅이 된 듯한 붉은 피부와 이마에 난 거대한 뿔. 그리고 160킷에 해당하는 거대한 몸뚱이가 주는 엄청난 위압감. 그게 바로 그 괴물에 대한 첫 묘사였다.
뱀파이어들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투귀(鬪鬼) 블러드오우거(Blood Oger)
그것이 붉은 존재를 총칭하는 이름이었다. 블러드 오우거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단지 초대왕인 캄 크리스토퍼가 오랫동안의 사투 끝에 그를 쓰러뜨렸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놈에 대한 기록은 그것뿐이었다. 블러드 오우거가 다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그때 캄의 손에서 살아남았던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모르는 일이었다.
"크흐흐흐. 든든하게 먹어두어라, 나의 충성스러운 몬스터들이여. 조만간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게 될 테니깐 말이다!"
블러드 오우거는 허기를 채우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그렇게 외쳤다. 그가 이끌고 온 몬스터들의 숫자는 거의 1000만에 육박한다. 셀리온 전역에 사는 몬스터들의 1할에 해당하는 셈이다. 아마 아벨리오스 역사상 이토록 많은 머릿수가 동원된 전쟁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몬스터들의 머릿수가 아무리 많아도 맨몸으로 눈앞에 있는 철옹성을 함락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형적인 특성상, 몬스터들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가야 플로센을 유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흑색의 거성(巨城), 브롬바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다크 포트리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러드 오우거가 미소를 띄우고 있는 이유는 믿을만한 병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크크. 저깟 성쯤이야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지."
사실 성벽의 높이만 8테킷에 달하는 브롬바르트를 장난감에 비유하는 것은 미친 소리였다. 왜냐면 다크 포트리스는 여태껏 단 한번도 외적의 침입에 점령당한 적이 없는 난공불락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전투는 처음이지만 다크 포트리스는 결코 단순한 머릿수만으로 함락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블러드 오우거가 한 말은 결코 농담이 아니었다. 후방에서 몬스터들이 끌고 오고 있는 병기들을 보면 그 사실은 더욱 더 확실해진다.
끼이이, 끼이익.
수많은 몬스터들이 무언가를 끌고 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성병기였다. 거대한 충차에서부터 이동식 사다리와 공성탑 등등…도저히 몬스터들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 이제 뱀파이어들의 성이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해볼까?"
블러드 오우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생명체의 육질에 굶주려 있는 몬스터들에게 드디어 공격명령을 내렸다.
"모두 공격! 성을 함락시켜라!"
“우워어어어!”
블러드 오우거의 괴성에 반응이라도 한 듯 수백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은 거성 브롬바르트를 향해 진군해오기 시작했다.
"성주님! 몬스터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루필리우스와 바크의 귓가로 한 병사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져왔다.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성벽위에 올라 있던 둘은 알고 있었다.
"하아……."
"많군."
루필리우스는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고, 바크도 겉으론 태연했지만 두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루필리우스가 말했다.
"단순히 많은 정도가 아니잖습니까? 이건 도대체…….“
루필리우스는 말끝을 흐렸다. 더이상 할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캄에덴 최고의 다크 포트리스, 혈왕성은 이론상 100배가 넘는 적도 막아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브롬바르트로 몰려오고 있는 몬스터 대군은 그런 정설이나 소문마저도 무색케 만들었다. 숫자만으로도 주눅이 들 정도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 전투. 이길 수는 없겠군요."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루필리우스의 말에 바크가 주의를 주려고 했다. 그는 이 곳의 성주였다. 승산이 높든 패색이 짙든 부정적인 말은 하면 안되는 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몬스터들의 수에 사기가 떨어지는 마당에 지휘관이 오히려 그런 사기를 곤두박질 칠만한 소리를 하다니? 하지만 바크는 루필리우스의 뒷말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죽을 때 죽더라도 몬스터 한 마리는 더 죽이고 갈 겁니다."
"그래, 그게 바로 다크 포트리스의 주인다운 태도다."
바크는 자신이 해줄 말이 이것밖에 없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뱀파이어에게 있어 서열 상승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일이 이 다크 포트리스를 하사받은 것이다. 1전단의 전단장인 자신이라면 모를까, 이곳이 함락된다면 그는 죽음을 택할 것이다.
"쿠어어어어!"
몬스터들은 브롬바르트 앞에 도착하자마자 곧장 쳐들어왔다. 선봉은 오크들이었다. 개미떼처럼 보이는 그들이 성벽위에 포진해 있는 하프 뱀파이어 궁수들의 유효거리에 들어오자마자 루필리우스가 소리쳤다.
"쏴라!"
쉐쉐쉐쉐엑!
금세 성벽위에서 쏟아져 나온 화살이 소나기처럼 오크들에게 쇄도했다.
파팍! 팍! 파파팍!
"쿠어어!"
"크어억!"
선두의 오크들이 비명성과 함께 뒤로 자빠졌다. 그러나 금세 뒷열의 몬스터들이 쓰러진 동료를 밟으며 계속 돌진해나갔다. 일부 오크 궁수들은 성벽 위를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조잡하고 명중률도 형편없었지만 위협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팍!
"으아악!"
가슴팍에 화살이 꽂힌 궁수 한명이 비명성과 함께 성벽 밖으로 떨어졌다. 브롬바르트의 첫 희생자였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적들이 사다리를 올립니다!"
한 병사의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몬스터들이 올린 수많은 사다리가 성벽에 거치되었다. 오크들은 그것을 타고 꾸역꾸역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바크가 운을 떼었다.
"오벨리스크를 사용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직은 전투 초반입니다. 최대한 아끼는 게 좋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바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루필리우스의 말에 수긍했다. 그도 그것을 지금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루필리우스의 심리상태가 어떤지 떠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성벽을 공략하는 몬스터들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왜냐면 브롬바르트에는 그가 이끄는 1전단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오우거들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이 오크들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푸확!
“쿠웨에엑!”
예상대로였다. 성벽위에 1전단이 자리 잡고 있자 몬스터들은 올라오는 즉시 사살 당했다. 힘들게 올라온 것이 허무할 정도로 말이다.
‘숫자 때문에 너무 당황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이대로라면 막을 수도 있겠는 걸?’
바크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몬스터가 많아도 기본적으로 공성전은 머릿수로 해결되는 싸움이 아니었다. 성벽위를 공략하는 하급 몬스터들은 1전단 병사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상에는 아나만디움으로 도금된 성문이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오우거들이 아무리 강해도 맨손으로 그것을 부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대로 상황이 좋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뭐지?”
몬스터들이 갑자기 성문 앞으로 길을 만들었다. 한참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바크로선 궁금증이 일수밖에 없었다. 놈들은 이유 없는 행동을 하지는 않으니까.
“아!”
하지만 그가 몬스터들의 의도를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느새 성문 앞으로 거대한 무언가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길이가 10테킷(50m)을 넘었는데 바퀴가 달려있는 거대한 차체위에는 단단한 틀이 잡혀있었다. 또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굵고 긴 통짜 쇠가 틀 아래로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무슨 용도로 쓰이는지는 누가 봐도 알 것이다.
"맙소사! 저렇게 큰 충차가……."
루필리우스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사다리는 어떻게 만들었다 치자. 일개 몬스터에 불과한 놈들이 어떻게 저런 엄청난 물건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겉모습만으로도 충차의 위력은 확실해 보였다. 만약 오우거들이 그 엄청난 힘을 동원해 저걸로 성문을 쿵쿵 찍어댄다면 제아무리 아나만디움으로 코팅했다고 해도 부서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충차에 붙어있는 오우거들을 집중사격 하라!”
루필리우스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수많은 화살과 흑마탄이 충차로 쇄도했다. 그들로서는 놈들을 잡아야 조금이라도 시간을 늦춰야만 했다.
푹푹푹!
"쿠어어어어!"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화살비를 집중적으로 맞고 있던 오우거 하나가 괴성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워낙에 오우거들이 많다보니 티도 나지 않았다.
“젠장.”
바크가 욕설을 퍼부었다. 충차가 성문 앞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쿵!
이윽고 충차가 성문을 두들겼다. 하지만 엄청난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성문은 흠집도 나지 않았다. 바로 게이트 실드 때문이었다. 게이트 실드는 오벨리스크에 의해 흑마기가 성문에 응집 돼 일종의 방어벽을 형성하는 것으로, 다크 포트리스가 아진 공성전기술의 꽃이었다. 아마 웬만한 물리적 타격은 거뜬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거대한 충차를 상대로 몇 방이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긴 마찬가지였다.
“블록 버스터를 사용해라!
루필리우스는 어려운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블록 버스터는 검은 구체를 쏘아 한 구역을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5서클의 현존하는 최강의 공격계 흑마술이었다. 더군다나 다크 포트리스에서 사용하는 블록 버스터는 흑마술사의 그것보다 몇 배는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 한방으로 50년을 축적한 흑마기가 날아간다. 그렇게 되면 게이트 실드도 보다 빨리 깨질 것이다. 한 마디로 이것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로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게이트 실드는 깨질 수밖에 없을 테니깐.
슈우우웅~.
첨탑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서 검은 구체가 생성되었다. 한참 증폭에 증폭을 거듭하던 그것은 어느 순간에 몬스터들을 향해 튕겨지듯 날아갔다.
파파앙!
블록버스터는 성벽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면서 충차가 있는 부근으로 떨어졌다. 금세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퍼퍼펑!!
금세 몬스터들의 살점이 허공을 비산했다. 그 파괴의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 생지옥이었다. 얼핏 보아도 몇 만 정도는 죽어 나간 것 같았다. 루필리우스도 그것을 써 보는 건 처음이었는지 입을 쩌억 벌렸다. 최강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레드 드래곤의 브레스도 그런 건 불가능할 것이다.
“맙소사.”
하지만 그런 전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망했다. 충차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각도가 부족해서였을까? 직사로 날아간 블록 버스터는 그 광대한 폭발범위에도 불구하고 성문에 바짝 달라붙어 있는 충차를 부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제 끝장이군.”
바크가 한숨을 쉬었다.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오벨리스크의 흑마기를 한꺼번에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은 혼비백산했지만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몰려들었다.
쿵! 쿵!
결국 수차례씩 퍼붓는 충차의 공세 끝에 게이트 실드는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게이트 실드가 사라졌다는 말은 오벨리스크의 흑마기가 완전히 고갈되었다는 소리였다. 또 그 말은 이제 브롬바르트가 평범한 성에 불과해 진다는 소리였다.
콰앙!
뒤이어 엄청난 타격음이 모두의 귓전을 울렸다. 좀 전의 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충차가 브롬바르트의 성문을 정면으로 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돼! 막아라!"
루필리우스가 오우거들에게 흑마탄을 미친 듯이 쏘아댔다. 궁수들도, 바크를 비롯한 1전단의 뱀파이어들도 쉴 새 없이 화살과 흑마탄을 쏘아대며 성문의 파괴를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문은 게이트 실드가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큰 균열이 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