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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베르크 가의 비극
[K.C. 4318년 8월 11일]
캄에덴의 다섯 번째 다크 포트리스 브롬바르트는 결국 함락되었다. 성주인 루필리우스 이하 하프 뱀파이어 병사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지만 결국 모두 전사했고, 오벨리스크는 붕괴되었다.
이로서 캄에덴력 4318년 8월 11일은 타 종족의 침입에 최초로 다크 포트리스가 함락당하는 역사적인 날로 기록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이라면, 루필리우스가 사육시키던 크로펫을 모조리 동원해 필사적으로 탈출시켰던 1전단은 브롬바르트를 뒤덮고 있던 몬스터들의 포위망을 뚫고 유일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점이었다.
다닥, 다닥, 다닥.
“하아, 이게 바로 패잔병의 말로인가.”
크로펫을 타고 가던 바크가 한숨을 쉬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브롬바르트에서의 전투에서 블러드 오우거와 싸우다 실신한 바크는 휘하의 1전단의 병사들과 함께 브롬바르트를 탈출한지 근 이틀만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에 의해 목숨이 경각에 달했지만, 그는 자신의 서열만큼이나 뛰어난 정신력으로 극복해낸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병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부관."
"예."
바크의 호명에 부관으로 보이는 인물이 대답하곤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심리적으로 많이 지친 탓인지 그전의 패기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우리 1전단의 피해상황을 보고하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부관의 입에서 아군의 피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브롬바르트 공성전으로 아군은 총 5563명이 전사하고, 1820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휴우……."
한숨만 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엘리트전단으로 일컬어지는 1전단이 순수 전사자만 태반이 넘었다. 이런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브롬바르트가 점령당한지도 사흘이 지났으니, 지금쯤 놈들이 플로센의 전역에 폭풍처럼 들이닥쳤겠군."
바크가 고개를 숙이며 푸념했다. 애초에 몬스터들이 캄에덴에 쳐들어온 궁극적인 목적은 살아 숨쉬는 먹이였다. 셀리온 평원이 아무리 드넓은 곳이라고 하더라도 1억에 달하는 몬스터들의 왕성한 식욕을 감당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캄에덴만큼 먹이가 풍족한 곳도 없었다. 놈들이 인간들이 아닌, 캄에덴을 노린 것은 약간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전단장님?"
부관이 그렇게 물어왔다. 그의 말인즉,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바크는 상념에 빠졌다. 부하들은 다쳤고,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1전단으로서의 체면은 더욱 더 바닥에 곤두박질 칠 것이다. 일단은 플로센 자국민들을 한명이라도 구해야만 한다.
“일단 플로센의 국민들부터 최대한 구해낸다.”
“예. 그렇다면…어디부터 구할 겁니까?”
“글쎄…….”
바크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던 중, 그의 시선이 크로뎀에게 향했다. 브롬바르트 공성전에서 정신을 잃은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 물론 그는 자신이 아직 죽지 않은 것을 치욕적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크로뎀의 공로까지 무시하는 건 아니었다.
“자네는 어디를 가는 게 좋겠는가?”
바크는 크로뎀에게 말하면서,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하라는 눈짓을 주었다. 아마 그가 선택할 곳은 단 한 곳뿐이다.
“베르크 가입니다.”
“역시 그렇겠지.”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자 바크는 피식 웃었다. 역시 피는 물보다 진했다.
“그럼 지체할 이유가 없겠지? 어서 가자!”
그렇게 1전단의 목표는 베르크 가를 구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가주님!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검은 먼지더미를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던 병사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정말 많군."
베르크 가의 현 가주, 스웬이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의 시선은 베르크 가의 식구들에게로 옮겨졌다.
베르크 가에는 뱀파이어 식구들과 하프 뱀파이어 사병들을 다 합해도 1000명이 되지 않았다. 이들만으로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몬스터들을 막을 수 없었다. 스웬이 담담하게 말했다.
"아직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오기엔 상당한 시간이 남아 있다. 병사들을 붙여줄 테니 앞날이 창창한 어린 녀석들과 여자들은 어서 여길 뜨도록 해라."
"하지만 아버지, 저도 싸우고 싶습니다!"
한 뱀파이어가 그렇게 소리쳤다. 그는 얼굴이 앳되어 보였는데, 성인식을 마치고 소년단을 나온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스웬이 말했다.
"비렌, 잘 들어라. 나는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단다. 하지만 너는 아직 앞날이 창창하다. 가문을 빛낸 두 형을 이어 베르크 가를 재건해야만 하는 사명이 있단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개죽음당할 필요가 있겠느냐?"
비렌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한편으로는 가문을 빛냈다는 두 형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베르크 가는 오래전에 장남인 스탐이 캄에덴 역사상 최연소의 나이로 배틀러가 된 이후로 크게 번창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차남인 크로뎀은 불과 80세의 나이로 1전단에 들어가 20년 만에 백귀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니 지금, 베르크 가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영광 다음엔 이런 큰 재앙이 다가왔을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스웬은 비렌을 비롯한 소수의 어린 뱀파이어들에게 크로펫에 타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일부 하프 뱀파이어들을 호위병으로 붙였다.
"그럼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자, 어서 가거라!"
"아, 아버지…."
"어머니…."
크로펫에 올라탄 비렌과 네리앙이 울먹이며 자신들의 부모들을 바라보았다. 스웬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반드시 살아 남거라. 너희들은 베르크 가의 미래다. 비록 우리가 죽더라도 폐허가 된 가문을 다시 세우는 것은 너희들이란 말이다."
"알겠어요."
"흐흐흑."
급기야 네리앙이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격이 여린 그녀에게 지금의 상황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나 보다.
피신을 갈 채비가 갖추어지자 비렌을 비롯한 탈출자들은 몬스터들이 오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멀어져 가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스웬이 아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당신도 보낼걸 그랬어."
"호홋. 억지로 보내려 한다고 내가 갈줄 알아요? 나는 인생의 동반자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데 혼자 살려고 도망갈 치사한 여자는 아니라고요."
“풋, 역시 당신다워.”
스웬이 피식 웃으며 아리아를 바라보았다. 푸른 머리칼을 늘어뜨린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죽을 때가 임박해서였을까? 새삼스럽게 그녀와 함께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스웬은 아리아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리아…, 우리 벨리우드의 품으로 가는 그날까지 반드시 함께 가는 거야."
"물론이지. 나는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준비가 되어있어."
"고마워……."
부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한 스웬이 자신의 입술을 아리아에의 입술로 가져갔다.
"사랑해, 스웬."
"사랑해, 아리아."
키스가 끝나자 둘은 서로를 길게 포옹했다. 이것이 이승에서 하는 마지막 키스가 될 것이리라. 그들의 포옹은 주변의 긴박한 상황으로 인해 빨리 끝을 맺었다.
"가주님! 몬스터들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그럼, 최후의 저항을 해야겠군."
“그래야지.”
어느새 사랑을 나누는 부부에서 전투를 앞둔 전사로 탈바꿈된 둘은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최후의 혈전을 펼칠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은 각자 전투준비를 마친 채,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기다렸다.
“크아앙!”
“어서 뛰어! 시간이 없어!”
스탐이 크로펫의 고삐를 힘껏 당기며 소리쳤다. 일행은 지금 페리알이 전해준 뜻밖의 소식 때문에 플로센을 향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그 덕분에 비교적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설마 몬스터들이 여기까지 침범하진 않았겠지?"
말을 마친 스탐이 오랜만에 접하는 플로센의 대지를 둘러보았다. 산천초목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드넓은 평원도 뒹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다. 어릴 적 크로펫을 몰고 돌아다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데 왠지 느낌이 안 좋아. 벌써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스탐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기분 탓일 것이다. 몬스터들이 플로센을 침략하려면 브롬바르트를 함락시켜야 한다. 그러나 몬스터들이 아무리 많아도 철옹성인 브롬바르트를 함락시킬 수 있다는 말은 설득력이 없었다. 다크 포트리스의 위용을 보아왔던 스탐이었기에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하지만 그 굳은 신념이 깨지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몬스터!?”
그랬다. 흉측하게 생긴 놈들은 분명 몬스터들이었다. 물론 소수의 몬스터들이 플로센에 약탈을 하러 오는 경우는 빈번했다. 하지만 단순한 약탈자들이라면 베르크 가문을 초토화시킬 능력은 없을 것이다.
“마, 말도 안돼…….”
스탐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60여년이 지났지만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이 베르크 가문이라는 사실을. 부서진 가옥들과 드러누운 몬스터와 뱀파이어들의 시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크크큭, 참 맛있어 보이는군."
하지만 그런 스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온은 몬스터들의 피를 만끽할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어 보였다.
“쿠르르르…….”
몬스터들은 스탐을 발견하자마자 대번에 덤벼들었다. 아마도 그를 후식거리쯤으로 여겼나 보다.
“개자식들!”
그렇게 소리친 스탐이 대번에 다크 오러를 끌어 올렸다. 이미 그는 가문이 초토화되었다는 사실에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푸확, 파악!
“쿠워어억!”
“꾸에엑!”
몬스터들은 금세 포식자에서 피식자로 전락했다. 닥치는 대로 찢어발기는 스탐의 무위는 몬스터들의 방대한 머릿수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죽어 버려!”
스탐의 고함성과 함께 뻗은 손이 오크 하나를 두 동강 내버렸다. 피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크크큭. 놈,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가 보구나.”
지온의 웃음소리가 뇌리를 자극했다. 평소에 그런 말을 했다면 대번에 맞받아 쳐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스탐의 머릿속은 가문을 이 꼴로 만든 몬스터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나도 이러고 있을 순 없지. 어서 놈들을 해치워야겠군, 크크큭!”
말을 마친 지온이 나섰다. 그러자 잠시 동안 방관자로 있던 페리알과 카시안도 전투에 참전했다.
핑―!
카시안이 화살 세발을 손가락사이에 끼워 몬스터들에게 날렸다.
"쿠웩!"
"쿠륵!"
백발백중이었다. 카시안이 쏜 세발의 화살은 정확히 세 마리 몬스터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단 한번에 세발의 화살을 쏘아 세 표적을 없앤다. 과연 엘븐 스나이퍼 출신다운 솜씨였다.
쿵! 쿵! 쿵!
그때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와 함께 한 몬스터가 다가오고 있었다.
“트윈 헤드 오우거로군요.”
페리알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앞의 거대한 존재를 바라보았다. 셀리온 최강의 몬스터가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이다. 놈은 다른 몬스터들과 마찬가지로 일행을 먹잇감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스탐은 싸울 태세를 갖추고 있는 일행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모두 물러서. 놈은 내가 해치운다.”
그는 일전에 놈과 한번 붙어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모두의 합공으로 간신히 놈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스탐은 배틀러였다. 배틀러라는 이름 석자가 의미하는 바는 셀리온 먹이사슬의 정상에 위치한 몬스터보다 더 컸다.
“쿠와아아!”
휘익!
트윈헤드 오우거가 괴성과 함께 스파이크 클럽을 휘둘렀다. 그것은 정통으로 맞는다면 쇳덩어리도 조각 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하지만 그것도 맞출 때의 이야기다.
쾅!
바닥을 박살낸 스파이크 클럽을 가볍게 피한 스탐은 카스턴을 꺼내들었다.
"카스턴, 부탁한다."
[알겠다.]
카스턴은 짤막한 한 마디를 할 뿐이었다. 스탐의 목소리에 깃들어있는 감정을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 덤벼든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그렇게 소리친 스탐은 카스턴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카스턴의 검신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의 일자형 검신이 흐물흐물해 지더니 이내 검날 부분이 지그재그형태가 되어버렸다. 그것은 바로 소드 브레이커의 검신이었다.
스탐은 인간 세계에서 용병으로 활동할 때 소드 브레이커를 몇 번 써본 적이 있었다. 소드 브레이커는 톱날 같은 검날을 갖춘 무기를 부수는 무기였다. 물론 트윈 헤드 오우거의 스파이크 클럽을 부술 생각은 아니었다.
“하아압!”
트윈 헤드 오우거의 어깨위로 단숨에 뛰어오른 스탐이 카스턴을 휘둘렀다. 금세 놈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역시.”
스탐이 미소를 띄었다. 예상대로였다. 트윈 헤드 오우거의 피부는 질겼다. 소드 마스터나 배틀러도 다량의 마나를 퍼부어야 겨우 겨우 벨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릴 때의 자신은 놈의 팔과 목을 어렵지 않게 자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인간들과의 전투로 힘이 거의 다 빠진 상태였고, 눈앞에 있는 놈은 몸이 쌩쌩했다. 특별한 방법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