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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베르크 가의 비극
그래서 꺼낸 것이 바로 소드 브레이커의 검신을 가진 카스턴이었다. 용아로 만든 검신에 톱날바퀴같은 검날은 트윈 헤드 오우거의 피부를 어렵지 않게 찢을 수 있는 것이다.
촤아악!
날카로운 카스턴의 칼날이 트윈 헤드 오우거의 손목을 종잇장처럼 찢어버렸다. 동맥이 절단되었는지 피가 뿜어져 나왔다. 놈이 금세 괴성을 질러 대었다.
"하앗―!!"
스탐은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어느새 카스턴의 검신이 부메랑의 형태로 바뀌었다. 스탐은 트윈헤드 오우거의 목을 향해 카스턴을 힘껏 날렸다.
휘리리릭!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카스턴은 손목이 잘려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트윈헤드 오우거의 목 하나를 날려버렸다. 그리곤 마치 마법이 걸린 듯 날아간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마지막 목을 다시 잘라낸 뒤 스탐의 손으로 돌아왔다.
쿠웅!
어느새 목 두개를 잃은 트윈 헤드 오우거가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놈은 이번에도 제로 헤드 오우거가 되어버렸다.
“이야, 대단한데요?”
페리알이 놀랍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탐은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스턴을 검집에 넣었다. 지온이 이죽거렸다.
"크큭! 신기한 장난감이로군."
“마음대로 지껄여.”
스탐은 그렇게 쏘아붙여준 뒤 다급히 뛰었다. 평상시라면 치열한 말싸움을 치고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이럴 수는 없어…….”
스탐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현실이 아니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현실이다. 곳곳에는 몬스터들의 시체와 뱀파이어, 하프 뱀파이어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건물들은 불타고 있었다. 고개가 저절로 떨어졌다.
“하…,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군요. 브롬바르트가 함락 당했다니…….”
스탐의 뒤를 따르던 페리알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몬스터들이 이렇게 활개 칠 수 있다는 소리는 브롬바르트가 함락당한지 꽤 되었다는 소리였다. 단순히 숫자가 많다고 해서 그 철옹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응?”
그때였다. 부서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스탐은 주저 없이 그리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피로 얼룩진 손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마도 건물이 부서지면서 깔린 것 같았다.
“기, 기다리세요. 얼른 꺼내드릴 테니.”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퍼뜩 든 스탐이 얼른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리고 나서 볼일이었다.
잔해를 치우고 생존자의 정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두 분…무사하세요?”
스탐이 부들부들 떨면서 생존자를 일으켰다. 놀랍게도 잔해 속에는 그의 부모 아리아와 스웬이 있었다. 하지만 스웬은 아리아를 껴안은 채 죽어 있었다.
“스탐…….”
어느새 스탐의 품에 안긴 아리아가 천천히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그녀는 말을 잇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스탐이 소리쳤다.
“정신 차리세요! 여기서 죽으면 안돼요!”
아리아는 미소를 지으며 죽은 스웬을 가리켰다.
“훗, 그이가 죽은 마당에 나 혼자 살 수는 없단다. 살고 싶어도 이미 늦었지만…….”
“어머니…….”
스탐은 깨달았다. 그녀는 더 이상 살수도, 살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어느새 그의 눈에서 투명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이럴 줄 알았다면 조금만 더 오래 그녀 곁에 남아 있었을 텐데…….’
60여년의 시간동안 잠깐이라도 들렀더라면 이렇게 후회되지는 않았을 텐데.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에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아리아는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아마도 할말이 있는 듯했다. 잠시후, 그녀는 스탐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베르크 가의 생존자들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피신을 갔단다. 부디 그들을 도와 폐허가 된 베르크 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거라…쿨럭!”
“어머니!”
스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이제 아리아는 더 이상 말을 하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스탐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말했다.
“이제 가야할 때가 되었구나. 먼저 간 그이가 부르고 있어…….”
그 말을 끝으로 아리아는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몸이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탐은 천천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을 자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숨을 쉬고 있지는 않았다.
“왜 이러세요? 정신 차려보세요, 어서요.”
그는 이미 아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그녀를 흔들어댔다.
“안돼!”
스탐이 절규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페리알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참, 안됐군요.”
베르크 가는 그도 잘 알고 있는 명가였다. 그리고 최연소의 나이에 배틀러가 된 스탐은 페리알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런 스탐이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에 슬퍼 하고 있었다. 보는 자신이 가슴이 아파올 정도였다.
"스탐님……."
페리알이 스탐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지온이 그를 제지하면서 나지막하게 충고했다.
"페리알. 놈의 근처로 가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지금 제정신은 아닐 테니까."
“예.”
페리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스탐은 갖가지 감정으로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이다. 괜히 건드려서 화를 부를 필요는 없었다.
스탐은 별안간 손으로 흙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흑마기로 뒤덮인 그의 손은 금세 바닥을 일정 깊이까지 파는데 성공했다. 아마도 바닥을 판 모양과 깊이로 보아 무덤을 만드는 듯했다.
“벨리우드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두 부모를 무덤 속에 집어넣고 흙으로 덮은 스탐이 이마에 손을 짚었다. 목소리는 무척 조용하고 간결했다. 하지만 슬픈 감정을 더 이상 참기 힘든 듯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사실 뱀파이어는 눈물을 함부로 흘리는 게 아니었다. 나약함의 상징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음?"
그때였다. 낯선 소리에 페리알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했다. 그는 고도의 오감훈련을 받은 히든 브레이커였기 때문에 그 소리만으로도 무엇이 얼마나 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페리알이 말했다.
"몬스터들이 서쪽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수효는 대충 3, 4천 마리로 보입니다."
“크큭, 상당히 많군.”
지온의 말에 페리알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상당히라니요? 우리가 도저히 감당해낼 수 있는 숫자가 아닙니다!”
그의 말 대로였다. 일행은 배틀러가 셋, 그리고 거기에 비견되는 실력자가 하나. 실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머릿수가 1000배나 차이가 난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배틀러라도 단독으로 맞서 싸우다간 체력과 흑마기의 고갈로 죽기 십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온은 몸을 풀며 몬스터들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터벅, 터벅.
제정신이 아닌 건 비단 지온뿐만이 아니었다. 카시안도 어느새 활을 꺼내들고 화살을 메기고 있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면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몬스터 놈들. 다 죽여 버릴 테다."
스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검을 빼든 그는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향해 이성을 잃은 듯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그가 유일하게 납득이 갔다. 몬스터들에게 가문이 박살이 나버렸으니까 말이다.
‘젠장, 모두들 정상이 아니군.’
페리알이 이를 악물었다. 맞서 싸운다면 죽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설사 기적적으로 놈들을 다 처치한다고 치자. 셀리온 평원은 몬스터들로 득시글거리고 있다. 머지않아 또 다른 무리들이 덤벼들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피하는 게 최선책이었다.
“지온님, 지금 싸우기엔 상대 몬스터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페리알이 용기를 내어 지온에게 그렇게 물어보았다. 상대가 천하의 지온이었기 때문에 배틀러급의 히든 브레이커인 그조차도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하지만 지온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예상 밖이었다.
“크크큭.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 거냐. 이 멍청한 놈아. 설마 저 머릿수만 더럽게 많은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그, 그럼 아닙니까?”
“크큭, 난 놈들과 싸운다는 소리는 안했다.”
지온은 특유의 기괴한 웃음소리를 동반한 채 몬스터들을 가리켰다.
“히든 브레이커인 네놈의 눈으로 몬스터들을 봐라.”
그 말에 페리알은 몬스터들을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몬스터들을 관찰해 보았다.
몬스터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면 뭐든지 먹는 놈들이다. 그래서 먹잇감을 향해 달려들 때에는 적대적인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심, 패배감이 배여 있었다.
"아!"
그제서야 그 사실을 파악한 페리알이었다. 하긴, 그 많은 몬스터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알고 오겠는가. 지온의 말대로였다. 몬스터들은 패잔병이었다. 사냥하기 위해 뛰는 게 아니라, 사냥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이었다.
"누구한테서 도망치는 거지?"
몬스터들을 한참 지켜보고 있던 카시안이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 캄에덴의 정규군은 수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수백만의 몬스터들이 한참 활개 치는 플로센이 아닌가.
퍼퍼펑!!
그때였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몬스터들의 분해 된 육체가 사방으로 뿌려지는 게 보였다.
“크큭, 흑마술이로군."
지온이 그 파괴의 현장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그것도 단순한 흑마술이 아닙니다. 저것은 다크 스피어입니다!”
페리알이 그렇게 소리쳤다. 다크 스피어는 3서클의 공격계 흑마술이었다. 다크 매지션에 속하는 흑마술사만이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배우기 힘들면서도 막강한 이 마법은 직사와 곡사의 두 가지 공격 방식이 있었다. 직사는 엄청난 관통력을 발휘해 강력한 적에게 강했고, 곡사는 폭발 반경이 엄청나 다수의 적에게 강했다. 아마도 방금 전에 떨어진 것은 후자의 것으로 보였다.
‘정말 대단하군.‘
페리알은 눈앞의 전경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천에 달하던 몬스터들은 이미 태반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한 차례의 다크 스피어로 말이다.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자들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일단 가보는 게 좋겠군.”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카시안이 한 마디 했다. 스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들이 누구인지부터 알아보자고.”
이미 그는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린 상태였다. 하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튀어나가는 것을 보면 여전히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일행은 우왕좌왕하고 있는 몬스터들에게 달려가 그들을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의 숫자는 여전히 많았지만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푸아악!
“쿠웨에에!”
“끄오오!”
몬스터들의 비명소리가 피분수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단 넷임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제대로 덤비지 못하고 죽어 나갔다.
“크와아앙!”
“음?”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몬스터들을 찢어발기고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수백 마리나 되는 그들은 덩치가 매우 큰 늑대였다.
“다이어 울프로군요.”
“다이어 울프? 아, 그 소환수 말이야?”
“예.”
페리알의 대답에 스탐은 그제서야 저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이어 울프는 흑마술사가 소환하는 하급의 소환수였다. 하급이라곤 하지만, 다수가 모이면 몬스터들도 간단히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쿠워어어!”
퍼억!
하지만 오우거한테까지 강하지는 않았다. 놈의 스파이크 클럽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다이어 울프 하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른 다이어 울프들도 오우거 앞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탕!
그때였다. 난데없는 천둥소리와 함께 오우거 한 마리가 쓰러졌다. 그것이 시발점이었다.
타타탕! 타타타타탕!
“쿠우어어…….”
무려 십여 마리에 달하는 오우거들이 차례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말도 안돼!”
페리알이 놀라 소리쳤다. 오우거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오우거들을 단숨에 죽여버리다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정말 강력한 병기였다.
몬스터들이 전멸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체불명의 병기가 오우거들을 너무도 쉽게 처치해버린 탓에 다이어 울프들이 남은 몬스터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해버린 것이다.
“크크큭. 잘 있었나, 영감?”
지온이 천천히 몬스터들을 전멸시킨 무리들에게 다가와 한 사내에게 말했다. 아마도 그는 상대가 누군지 잘 아는 듯했다.
“껄껄껄, 자네야말로 잘 있었나? 뭐, 말할 필요도 없겠군 그래. 항상 피에 굶주려 있으니 말이야.”“영감의 목을 따면 굶주림이 해소될 텐데 말이야.”
말을 마친 지온이 광소를 했다. 농담 같아 보였지만 지온은 정말 그럴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