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7 / 0217 ----------------------------------------------
17. 베르크 가의 비극
“실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거기 있는 친구들 소개나 하게.”
사내가 지온의 뒤에 서있는 셋을 가리켰다. 로브를 뒤집어 쓰고 있어서 잘 몰랐는데, 목소리로 보아 한참 노년기로 보였다. 스탐은 그 정체불명의 존재들을 둘러 보았다. 도합 200여명에 달하는 그들은 하나같이 후드나 로드를 입고 있어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모두 체구가 작다는 점이었다. 스탐보다 더 작은 인물도 몇 명 보였다. 저런 몸으로 수천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해치웠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제 이름은 스탐이라고 합니다.”
제일 먼저 스탐이 지온과 이야기하고 있던 노인에게 다가와 말했다. 그러자 그가 놀랍다는 어조로 말했다.
“호오? 자네가 바로 그 최연소 배틀러, 스탐 베르크인가?”
“네, 그렇습니다.”
“껄껄껄! 이거 참 우연이로구만…….”
말을 마친 그는 스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스탐은 피식 웃었다. 이름만으로도 자신을 바로 알아보다니, 최연소 배틀러라는 것이 단순한 성질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스탐의 소개가 끝나자 이번엔 페리알이 나섰다.
“전 페리알이라고 합니다. 히든 브레이커죠.”
“호오, 내 자네도 익히 잘 알고 있지.”
바르자드가 페리알을 바라보며 반갑다면서 악수를 했다. 사실 웬만큼 한다고 하는 뱀파이어들은 캄에덴의 배틀러들에 대한 신상에 대해선 거의 통달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가 페리알을 아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흐음…, 그리고 자네는?”
이윽고 노인의 시선이 카시안을 향했다. 카시안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한참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스탐이 대신 그를 소개해주었다.
“이 녀석은 카시안이라고 합니다. 엘프계 하프 뱀파이어죠.”
“흐음, 그렇구먼. 알만해.”
노인이 카시안을 한 차례 훑어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대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카시안이 어떤 성격을 지녔는지를 말이다. 그는 자신이 인정한 상대가 아니면 관심조차도 주지 않는다.
스탐은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쓴 한 사내가 카시안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무척이나 관심이 있는 듯했다. 노인은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덕분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훤히 들어났다. 백발은 성성했고, 피부는 쭈글쭈글 해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두 눈에서 뿜어지는 기품은 그가 결코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리 와 보게.”
노인이 뒤에 있던 후드를 쓴 인물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바로 카시안을 눈여겨 보고 있던 사내였다. 그가 옆에 서자 노인은 일행들에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반갑네, 캄에덴의 젊은 피들이여. 나는 바르자드 프론델이라고 하네. 다크 매지션의 마스터지. 그리고 이쪽은 윈델. 히든 브레이커의 마스터라네.”
다닥, 다닥.
드넓은 플로센의 대지를 달리는 크로펫의 무리가 있었다.
"서두르십시오! 언제 몬스터들을 만날지 모릅니다!"
한 하프 뱀파이어가 뒤쳐지고 있는 이들을 향해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얼핏 보아도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르크 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빠져나온 피신자들이 한참 질주를 한지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상태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몬스터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다. 그곳이면 어디든지 좋았다.
"지금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겠지……."
비렌이 쓰라린 표정을 지은 채 중얼거렸다. 베르크 가의 식구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그 어마어마한 수효의 몬스터들을 막아낼 순 없을 것이다. 그들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함께 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난 왜 이 꼴이 되어버렸지? 가문의 몰락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어야 된다니, 이 무능력자 같으니라고!"
비렌은 머리를 싸맨 채 자신을 비난했다. 아직 얼굴도 못봤지만 큰 형인 스탐은 최연소 배틀러가 되었고, 둘째 형인 크로뎀은 1전단의 백귀장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아직 태어난 지 100년도 되지 않은 어린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죄책감가질 필요 없어. 스탐오빠나 크로뎀오빠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
"네리앙……."
비렌의 시선이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에게로 향했다. 네리앙의 말 대로였다. 플로센을 침략해 온 몬스터들은 그 숫자만 수백만이라고 했다. 베르크 가의 식구들이 가문을 사수하기로 작정한 뒤부터 그들의 죽음은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비렌은 그제서야 마음을 바로잡았다. 한편으로는 네리앙을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베르크 가를 떠날 때에는 울음보까지 터뜨렸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을 격려해주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슬픔을 간신히 참고 있을 것이다. 부모와 친척들이 죽어가는 것을 외면한 채 떠난다는 것은 둘에게 모두 곤혹스러운 일이었으니깐 말이다.
쉐에엑, 푹!
"아아악!"
그때였다. 선두에서 크로펫을 몰며 달리고 있던 하프 뱀파이어 한명이 비명성과 함께 크로펫에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그것은 단순한 낙마가 아니었다. 그의 등짝에는 화살이 하나 꽂혀져 있었다. 금세 비렌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적이다!"
"모, 몬스터들이다!"
"크워어어어!"
조용하기만 하던 들판이 고함소리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비렌이 뒤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늑대를 몰고 뒤쫓아 오고 있었다. 비렌은 이를 악물었다. 들판에는 아무런 엄폐물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을 따돌릴 수도 없었다. 그저 도망치기만 하다간 고슴도치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뒤쪽의 적들은 저희가 맡을 테니 뱀파이어들께선 어서 이곳을 벗어나십시오!"
그때 한 하프 뱀파이어가 비렌에게 소리쳤다. 그는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에게 붙여준 호위병들의 대장이었다.
“하지만 너희들의 목숨은 어떡하고?”
비렌이 소리쳤다. 따지고 보면 그들이 이신들을 챙길 이유는 없었다. 베르크 가는 황폐화되었고, 이제는 쫓기는 판국이었다. 도망가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 같은 일개 하프 뱀파이어야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당신들은 베르크 가를 다시 일으켜 세울 유일한 핏줄들이십니다. 둘 다 죽을 바에야 저희들의 목숨으로 당신들을 구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비렌이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가 붙여준 호위병들은 뼛속까지 베르크 가문에 대한 충성심으로 다져져 있었던 것이다.
“그럼 반드시 살아남으시길 바랍니다.”
비렌은 뱀파이어들을 이끌고 다시 질주하기 시작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들은 결국 죽을 것이다. 저 많은 오크들을 감당하기엔 그들은 너무도 수가 적었으니까.
“아무튼 이제 한숨 돌리는 건가…….”
어느새 오크들과 교전을 벌이고 있는 호위병들을 보던 비렌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결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정면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맙소사…….”
그들의 앞으로 수백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바크가 이끄는 1전단은 크로뎀의 의견에 따라 제일 먼저 베르크 가를 향했다.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인지라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가봐야 알 일이었다.
“로드의 문책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태연히 가고 있던 부관이 그렇게 물어왔다. 그러자 바크는 그를 흘끗 바라보더니, 이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그것은 진심이었다. 상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자신은 전쟁의 패배자, 그것도 자기가 이끄는 병력의 반수나 잃은 엄청난 패배자였다. 캄에덴은 예전부터 승리자에겐 관대하였고 패배자에겐 엄격했다. 아마 큰 처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난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
바크가 두 손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자식과도 같던 1전단의 병사들이 반이나 죽었다. 정말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내가 그때 블러드 오우거 놈에게 죽었더라면…….”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앞서간 병사들은 바크님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그들 때문에서라도 바크님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합니다.”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바크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죽을 생각은 없었다. 아직까지 자신은 죽기엔 해야할 일들이 너무 많았으니깐 말이다. 그때였다.
“저건 또 뭐지?”
바크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일단의 무리들이 몬스터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알 것이다.
“아마도 생존자들 같군요.”
고개를 끄덕인 바크가 병사들에게 외쳤다.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겠지? 누가 저들을 도와줄 백귀장 없나?”
바크는 병력을 다 이끌고 가지 않고 백귀대만 동원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몬스터들의 수효가 수백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 잡는 칼로 쥐를 잡을 순 없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바크가 손을 번쩍 든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름 아닌 크로뎀이었다. 당연할 것이다. 이 근방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베르크 가였으니까 말이다.
“그럼 어서 가보도록.”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크로뎀은 곧바로 휘하의 병사들을 이끌고 뱀파이어들을 구원하러 갔다. 전원이 크로펫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전투를 치르게 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죽어라 이놈!”
촤작! 촥!
“쿠웍!”
금세 몬스터들의 비명소리가 머리를 동반한 채 하늘로 솟구쳤다. 오우거같은 대형 몬스터도 없었고 숫적인 우세도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쿠아아!”
오크 대여섯 마리가 크로뎀에게 일시에 덤벼들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명은 죽이자는 심보였다. 크로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크로펫의 고삐를 잡아 당겼다.
“크아하항!”
크로펫이 울음소리와 함께 한 오크를 덮치고 지나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로뎀은 기수를 돌려 자신을 노리는 오크들을 유린했다. 크로펫을 지나가게 하면서 손만 휘두르면 머리가 썩은 짚단처럼 날아갔다.
푸학! 뎅구르르.
마지막 오크가 목이 달아나 바닥을 뒹굴었다. 그렇게 크로뎀의 선전에 힘입어 몬스터 무리는 금세 전멸했다.
뚜벅, 뚜벅.
어느새 쫓기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크로뎀을 본 그들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크로뎀 형!"
“오, 오빠!”
놀란 건 크로뎀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물었다.
“비렌, 네리앙…너희들이 여긴 어떻게?”
“피신하라는 아버지의 명을 받아서 베르크 가를 빠져 나왔어요.”
“그렇다면 설마…….”
비렌의 말에 크로뎀이 두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몬스터들이 한참 활개치고 있는 이 상황에서 피신을 왜 보냈을까? 크로뎀은 이 의문의 해답이 무엇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잠시 후, 크로펫들의 발소리와 함께 1전단의 본대가 다가왔다. 선두에 서있던 바크가 물었다.
“무슨 일인가?”
“아무래도 베르크 가문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서두르는 게 좋겠군요.”
“그렇겠군.”
비렌을 비롯한 베르크 가의 뱀파이어들을 바라보던 바크가 수긍했다. 뒤이어 그가 천귀장 한명을 불러내 말했다.
“일단 본대가 천천히 따라갈 테니 네 천귀대를 선발대로 베르크 가에 가라.”
“알겠습니다.” 서릿발처럼 또렷하고 힘차게 소리친 그의 명령에 바크는 마음이 놓였다. 더군다나 천귀장은 배틀러였기 때문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다.
다닥, 다닥, 다닥.
이윽고 1전단에서 일부 병력들이 튀어 나와 베르크 가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는 백귀장인 크로뎀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발…버티고 있어만 다오…….’
크로뎀은 제발 상황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는 않기를 바랬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쭈욱 살아온 자신의 베르크 가문이 아니던가?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참혹했다.
“이럴 수가…….”
크로뎀이 몸을 부르르 떨며 눈앞의 광경에 넋을 잃었다. 베르크 가는 완전히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건물은 마구 부서져 잔해가 되어 있었고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체만이 즐비할 뿐이었다.
“너무 늦었나 보군. 유감이네.”
천귀장이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 크로뎀의 귓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이곳이 폐허가 되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이것은…….”
베르크 가를 거닐며 주위를 둘러보던 크로뎀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무덤이 있었는데, 아마도 누가 먼저 다녀간 듯했다.
“어머니…아버지…….”
크로펫에서 내린 크로뎀이 무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무덤에는 아리아와 스웬이라는 이름이 생생히 적혀져 있었다.
“안돼, 이럴 수는 없어!”
이내 크로뎀이 통곡했다. 그래도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몬스터들이 베르크 가를 황폐화시켰다고 해도 미리 도망가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 무덤은 그의 막연한 기대를 배신한 것이다.
“음? 저들은…….”
그때였다. 천귀장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일단의 무리들이 모여 있었는데, 몬스터들로 보이진 않았다.
“아군으로 보이는데…. 아무튼 저쪽으로 가봐야겠군. 크로뎀, 어서 일어나거라.”
하지만 크로뎀은 일어서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무덤을 부여잡고 있을 뿐이었다.
“백귀장님…….”
병사들이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크로뎀은 그동안 휘하의 병사들에게 냉철한 면을 보여 왔다. 하지만 그는 결코 냉혈한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감정이 겉으로 잘 표현되지 않을 뿐이지. 잠시 후, 천천히 무덤에서 일어난 그는 증오로 가득 찬 두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몬스터 놈들. 언젠가는 반드시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