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49화 (49/217)

0049 / 0217 ----------------------------------------------

18. 재회

“휴우.”

스탐은 천천히 걸으며 아리아와 스웬을 떠올렸다. 그들의 자신의 두 번째 부모였다. 전생의 부모들과도 허망하게 헤어졌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때였다.

“응?”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군가가 그에게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장으로 보아 다크 매지션으로 보였는데 스탐은 다크 매지션을 오늘 처음 만나 아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분명히 크로뎀처럼 낯선 인물이 아니었다.

“루, 루시리아……?”

“오랜만이야.”

다크 매지션 여성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스탐은 두 눈을 비볐다. 분명히 오래전에 자신과 불미스러운 일로 헤어진 루시리아였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무한전선에서 만났던 엘리나도 보였다.

“나한테는 관심도 없나보네?”

“풋, 그럴 리가…, 아무튼 엘리나도 오랜만이야.”

말을 마친 스탐은 루시리아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소년단 시절에 헤어졌기 때문일까? 다 자란 그녀는 목소리만 아니면 몰라볼 정도로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세상 어느 남자라도 그 미모에 혹해 따라다닐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남이지…….’

스탐이 루시리아와 헤어질 때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상처만 주고 떠나버린 사랑. 그것은 하지 않느니만 못했다.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착각으로 말미암은 피해자가 아닌가. 사과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

“응?”

루시리아가 의아하다는 어조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그래서 스탐은 덧붙여 말하려고 했다.

“괜찮아. 벌써 한참 지난 일인데 뭐…….”

루시리아는 스탐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그런 그녀를 스탐이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루시리아…….”

“훗, 그렇게 궁상맞은 표정 짓지 말라고.”

그녀는 스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빙그레 웃더니,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삭였다.

“네가 그토록 원하는 그녀를 꼭 찾길 바래.”

“으, 응…….”

“그리고 마음속이 복잡하겠지만 힘내. 돌아가신 너희 가문의 분들도 네가 더 훌륭한 뱀파이어가 되길 바라실 테니깐.”

“고맙다.”

스탐으로선 그것밖에 할말이 없었다. 자신이 상처를 입히고 보내버린 그녀가 오히려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루시리아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고맙긴…우린 친구잖아. 친구.”

“으응…….”

“얼마동안은 같이 동행해야 될 것 같은데 잘 지내보자.”

“알았어.”

대화를 마친 둘은 두 손을 마주잡았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만났다. 연인이 아닌 친구로.

바크를 비롯한 수뇌부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들의 얼굴은 무척 심각해 보였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처억.

잠시 후, 바크가 지도를 펼쳤다. 거기에는 그들이 위치한 플로센과 그 주변의 지리가 정확히 그려져 있었다. 바크가 플로센의 정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령을 통해 알아본 결과 지금 몬스터들의 주력은 이곳에 위치에 있습니다. 점점 더 북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군.”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바르자드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몬스터들은 먹을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족속들이다. 그리고 블러드 오우거는 그들의 우두머리이자 먹이가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켜주는 안내자였다. 플로센에서 실컷 재미를 봤으니 이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모양이다.

“이동경로를 봤을 때, 놈들이 거쳐 가야 할 장애물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지요.”

바크가 지도의 한군데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거기에는 까만 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바르자드가 신음성을 흘렸다.

“흐음, 시라미아라…….”

시라미아는 캄에덴의 4번째 다크 포트리스였다. 브롬바르트보다 먼저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벨리스크에 축적된 흑마기의 양도 많았다. 문제는 주둔한 병력이었다. 브롬바르트야 1전단이 주둔해 있었지만, 시라미아에는 1전단은커녕 뱀파이어 전단 자체가 없었다. 오로지 하프 뱀파이어 2만이 다였다. 바크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았다.

“그들이 과연 캄에덴군이 올 때까지 놈들을 막을 수 있을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사실 뱀파이어 로드가 이끄는 캄에덴의 주력병력만 도착하면 몬스터들을 쓰러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더라도 그전에 시라미아가 깨질 것이 자명했다. 뱀파이어와 하프 뱀파이어의 전투력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그가 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물론 브롬바르트 때처럼 게이트 실드가 빨리 깨질 리는 없겠지만 그들만 가지고 공성병기를 막아내는 건 힘들어.’

바크는 잘 알고 있었다. 브롬바르트 때에는 1전단이 워낙 막강해 몬스터들이 성벽 위를 공략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나저나 이제 우리는 뭘 하면 되는가?”

잠자코 듣고 있던 바르자드가 한 마디 했다. 그 말인즉, 1전단과 두개의 특수부대가 만났으니 무엇이든 해야 될 것 아니냐는 소리였다. 일개 전단에 특수부대가 합류하면 그 전투력은 몇 배로 불어난다는 사실은 뱀파이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바크가 말했다.

“당연히 북상하고 있는 몬스터들을 급습해야지요. 그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모두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여기에 모인 병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수백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공격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그렇다고 이렇게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놈들은 이미 플로센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캄에덴의 명가 하나를 초토화시켰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그럼 어서 몬스터들을 치러 가세. 놈들의 머릿수를 조금이라도 줄여야 하니 말이네.”

“물론입니다.”말을 마친 바크가 회의에 참석한 천귀장들을 둘러보았다. 눈빛으로 보아 그들도 동의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용맹스러운 1전단의 정예들이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했다. 두려워하기 보다는 분노를 불태우고 있을 것이다.

회의가 끝나자 바크는 곧바로 쉬고 있던 1전단을 소집시켰다. 그들도 전단장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예상이라도 한 듯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례로 도열한 그들의 고요한 눈동자들은 하나같이 살기를 띄고 있었다.

“1전단의 용사들이여, 지금부터 우리는 두 특수부대와 함께 시라미아를 향해 북상하는 몬스터들을 치러 갈 것이다. 모두들 그때의 치욕을 잊지 않았겠지?”

순간 병사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적에 대한 분노를 은연중에 분출시키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한 자루의 잘 벼려진 칼 같았다.

“치욕을 만회할 순간은 지금 뿐이다! 모두들 준비 되었나?”

“예!”

기합소리가 하나같이 우렁찼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감정을 지니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었다.

“자, 그럼 출격!”

말을 마친 바크가 크로펫을 타고 천귀장과 함께 두 특수부대의 마스터들과 함께 크로펫을 몰고 선두를 달리자 5천여기에 달하는 1전단의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브롬바르트를 함락시킨 블러드 오우거의 몬스터대군은 플로센의 대지를 짓밟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다 더 많은 육질을 먹기 위해 시라미아를 향해 북상하고 있었다. 물경 수백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움직이고 있는 광경은 정말 장관이었다.

“쿠륵, 쿠륵.”

일단의 오크들이 발걸음을 옮기면서 한데 모여 쑥덕거리고 있었다. 셀리온 평원의 몬스터들중 수효가 가장 많은 이들은 식욕이 워낙 왕성해 어미가 배를 채우기 위해 새끼를 잡아먹는 게 당연시된다.

“쿠르륵…….”

그때였다. 한 오크가 근처에 있는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들을 다른 오크들에게 눈짓했다.

“키이이…. 저놈들이 왜 우릴 노려보는거지?”

그들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고블린 하나가 겁을 집어먹었다. 오크와는 반대로 그들은 셀리온 평원에 서식하는 몬스터들중 지능이 가장 높아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힘은 약했다.

“설마…….”

오크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의도를 알아챈 고블린이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이곳은 고블린이라곤 자신들 여섯뿐이었다. 온통 오크 천지였다.

“키아아아!”

한 고블린 입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오크들이 그들을 덮쳐버린 것이다.

“쿠어어!”

“키이이이!”

“크아아―!!”

순식간에 두 몬스터들의 비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갖가지 장기들과 살점들이 튀어 오른 것도 그 시점에서부터였다.

쩝쩝쩝, 우걱우걱

고블린의 피를 뒤집어쓴 오크들은 오랜만에 접해보는 달콤한 고기를 마구 뜯어 먹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수가 워낙 많은 탓인지 고블린들은 금세 앙상한 뼈다귀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배는 허기져 있었다.

“쿠우?”

그때 한 오크의 시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본 게 아닌지 확인하려고 두 손으로 눈을 몇 번 비벼보았다. 하지만 분명히 두 동공에 보이는 것들은 분명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쿠에에, 쿠어어어!”

다른 오크들도 그들의 존재를 확인하자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맛있는 먹잇감들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재수도 좋았다.

“크오오오!”

식욕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오크들이 고함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이 먹잇감이 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파바방, 파바바바방!!

무지한 오크들에게 날아온 건 무수히 많은 흑마탄이었다.

“쿠아아!”

“쿠에엑!”

금세 수많은 오크들의 비명소리가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뱀파이어의가 흔히 쓰는 흑마탄이었지만 오크같은 하급몬스터는 한방에 죽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흑마탄을 난사한 이 범인은 캄에덴에서 흑마술을 가장 잘 다루는 자들이었다.

“전군 돌격! 저 더러운 몬스터들의 영혼을 우리의 위대하신 벨리우드께 바치는 거다!”

바크의 우렁찬 외침에 크로펫을 1전단의 병사들이 둑 터진 강물마냥 쏟아져 나왔다.

뎅겅―

바크의 수도에 머리가 날아간 오크가 시발점이었다. 수천의 뱀파이어 기병대가 몬스터들의 대열을 금방 뚫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일방적인 살육극이었다.

“죽어라!”

“이 침략자 놈들!”

촤작, 촤아아아!

퍼벅, 퍼퍼퍽!

“쿠워어어어!”

“쿠웨에엑!”

전장은 어느새 뱀파이어들의 무차별한 공격에 별다른 저항도 홰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몬스터들의 비명성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그것은 실로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크로펫에 탄 1전단의 뱀파이어들이 벌써 수백 마리에 달하는 오크들을 죽이는 동안 단한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핑, 파팍!

“쿠어억!”

털썩!

어디서 날아온 두발의 화살에 오크 두 마리가 동시에 꼬꾸라졌다. 화살이 날아온 쪽에 있었던 크로펫 한 마리가 그 시체들을 밟고 갔다.

“간단하군.”

말을 마친 카시안은 교란부대의 급습으로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둘러보았다. 무수히 많은 몬스터들의 시체가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없어도 막강한데 크로펫을 타 엄청난 기동력을 가진 1전단의 병사들이 몬스터들의 후방을 유린하고 있었다.

“쿠워어억!”

그때였다. 별안간 오크 한 마리가 벌떡 튀어나와 검을 날려 왔다. 시체 속에 파묻혀 있어 아직 목숨이 붙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문제의 오크는 그 행운을 버리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

푹.

카시안은 태연히 자신의 검집에서 스틸레토를 꺼내 오크의 조잡한 검을 쳐내면서 미간에 박아 넣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오크는 이내 차디찬 시신이 되어 바닥에 놓여진 시체더미의 일부가 되었다.

“엘븐 스나이퍼 출신의 하프 뱀파이어라고 들었는데 사실인가보군. 데스페라도가 큰일을 해냈어.”

카시안의 무위를 지켜보고 있던 윈델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쉐도우 스나이퍼들도 카시안의 깔끔하고 정교한 궁술과 쾌검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 녀석만큼은 반드시 쉐도우 스나이퍼로 만들어야 되겠어.”

윈델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카시안은 마스터인 자신도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실력자였다. 그만큼 쉐도우 스나이퍼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도 없을 것 같았다. 결심은 이미 굳혀졌다. 윈델은 곧장 카시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카시안이라고 했던가? 참 대단한 실력이로군 그래.”

카시안은 피가 묻은 스틸레토를 검집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용건이 뭐지?”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획일적인 한 마디였다. 말이 적으면서도 핵심을 찌르는 그 질문에 만족한 윈델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쉐도우 스나이퍼의 마스터, 윈델이다. 나는 너 같이 뛰어난 실력의 저격수를 원하고 있지.”

윈델은 카시안에게 직접적으로 입단시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를 한참 보더니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자, 잠깐. 내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 보는 게 어때?”

윈델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는 카시안이 자신의 제의를 거절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몹시 당황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자신이 카시안의 행동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어 볼 필요까지야 있을까? 내가 이곳에 온 이유가 당신들 때문인데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