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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라미아 공성전
[K.C. 4318년 8월 20일]
“흐흐흐, 저곳만 깨면 뱀파이어 놈들의 본거지까지는 금방이라고 했겠다.”
블러드 오우거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흑색의 성을 바라보며 두 눈을 번뜩였다. 그가 이끄는 몬스터대군은 시라미아 앞에 도착한 상태였다. 시라미아도 다크 포트리스였지만 이미 블러드 오우거는 브롬바르트를 초토화시키고 플로센을 유린했다. 전혀 두려울 게 없었다.
“크크크크! 어서 투석기를 준비해라!”
블러드 오우거의 외침이 온 천지에 울려 퍼졌다. 그 드래곤 피어와 비견되는 괴성은 시라미아에서 전투를 준비하고 있는 뱀파이어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아군인 몬스터들마저 공포에 떨 정도였다.
“크후후후, 네 녀석들도 준비하고 있어라.”
블러드 오우거가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한 떼의 붉은 새들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모, 몬스터들이 온다!”
“어마어마하게 많군.”
“저놈들을 어떻게 막아?”
한편 시라미아 안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블러드 오우거를 선두로 한 몬스터 대군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왔군.”
그런 와중에서도 태연히 성벽위에서 성벽 밖의 전경을 감상하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아나만디움 코팅제 갑옷이 그가 평범한 뱀파이어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스프리안 그레이스. 몬스터들이 노리고 있는 이 시라미아의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성주였다. 그는 끝없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한참 쳐다보았다.
“휴우…….”
겉으론 태연했어도 저절로 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로선 지금 처한 이 암담한 현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저것이 바로 블러드 오우거란 말인가? 초대왕 캄 크리스토퍼와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는?”
에스프리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눈앞에 정면으로 우뚝 서있는 붉은색의 거대한 마물을 응시하였다. 마치 누군가의 피를 뒤집어 뜬 듯한 블러드 오우거는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걱정 마십시오 성주님. 머지않아 뱀파이어 로드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와서 저 간악하고 무지한 몬스터들을 처단하실 겁니다.”
한 뱀파이어가 그에게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그는 시로스라는 이름을 가진 뱀파이어로 서열123위의 중급 배틀러였는데, 에스프리안이 가장 신임하는 심복이었다.
“….”
하지만 가장 신임하는 시로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에스프리안은 굳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시로스도 자신의 말이 큰 설득력을 가지긴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지 정작 그렇게 말하고 나서도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저 정도의 몬스터들이라면 아무리 시라미아라도 힘들겠군. 하긴, 브롬바르트도 점령시킨 놈들인데.”
에스프리안이 그렇게 푸념을 했다. 그는 브롬바르트가 얼마나 견고한지 잘 알고 있었다. 비록 혈왕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서열1위의 바크가 지휘하는 최강의 1전단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시라미아보다는 상황이 몇 배는 더 좋았다. 그런데 그런 브롬바르트가 하루아침에 떨어졌다. 불안하지 않을래야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성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시라미아는 브롬바르트보다 나은 한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유일한 한가지라.”
시로스의 말에 에스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의 말대로 시라미아는 브롬바르트보다 나은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단 한 가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 눈앞에 몬스터들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일지도 몰랐다.
“응?”
에스프리안이 이채를 띄웠다. 몬스터들 사이를 비집고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투석기?”
그랬다. 길다란 지렛대를 받치고 있는 차체의 정체는 분명 원거리 공성병기인 투석기가 분명했다. 투석기뿐만이 아니었다. 그 외의 갖가지 공성병기들도 눈에 보였는데 사실 그것들을 일개 몬스터들이 단독으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걸 놈들이 어떻게 만들었지?”
에스프리안으로선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몬스터들의 능력으로 저만한 공성병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블러드 오우거가 있다고 해도 말이다.
“오, 온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 자리를 잡은 투석기들이 돌덩어리를 날려 왔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으아악!”
“으어어어!!”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단 병사들뿐만이 아니었다. 무식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담은 돌덩어리들은 어느새 시라미아의 곳곳을 유린하고 있었다.
“성주님!”
시로스가 다급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에스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자신을 부르는 이유야 뻔했다. 이대로라면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해 보기도전에 초를 치는 셈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에스프리안이 잠시동안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말했다. 몬스터들에게만 투석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라미아에도 투석기는 있었다.
“투석기를 발사하라! 목표는 놈들의 투석기다!”
퉁, 투퉁!
에스프리안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시라미아의 성곽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투석기들이 일제히 돌덩어리를 날렸다. 비록 몬스터들에 비해선 수효가 적었지만 지리적인 잇점이 있었기 때문에 유리하다면 이쪽이 유리했다.
휘이이잉~, 콰아아앙!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거대한 돌덩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몬스터들의 투석기를 처부수고 한참을 굴러갔다. 덕분에 뒤쪽에 있던 재수 없는 몬스터 몇 마리가 깔려 죽었다.
투석기 한 대가 파괴되자 열불이 난 오크들이 미친 듯이 투석기를 쏘아댔다. 그러나 조잡하고 위치까지 불리한 그들의 투석기가 시라이마의 투석기를 부순다는 것은 벌거벗은 오크가 중무장한 정예병을 이긴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휘이이잉― 콰콰아앙 콰앙!
양측이 쉴 새 없이 돌덩어리를 주고받았지만 번번이 박살나는 쪽은 몬스터들의 투석기였다. 시라미아의 투석기들은 단 한 대도 망가지지 않았다. 결국 시간이 지나 십여 개에 달하던 몬스터들의 투석기는 모조리 잔해더미가 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하하핫.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요.”
상황이 급반전되자 시로스의 입가에 미소가 배였다. 그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크 포트리스의 성주들은 매년 그 다크 포트리스가 위치해있는 지역에서 자금을 지원받는데, 성벽 보수나 병사들의 급료로 여기저기에 돈을 쓰더라도 항상 3할 가량은 남는다. 워낙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다보니 남는 자금이 점점 누적되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가만히 놔두기가 아까운 다크 포트리스의 성주들은 그 자금으로 군사력의 증강을 꾀했다. 브롬바르트의 성주가 5000마리의 크로펫을 양성한 게 그랬고―결국 그 크로펫들은 엉뚱하게도 1전단에게 넘어가게 됐지만 말이다―시라미아의 성주인 에스프리안이 다크 포트리스의 성곽에 다수의 투석기를 만든 것이 그러했다.
키이이이이!
그때였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큭, 이건 또 뭐야?”
에스프리안이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그것은 분명 새가 우는 소리로 들렸지만 평범한 새의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크으으!”
“으으으으, 이 소리는 대체 뭐야?”
비단 에스프리안뿐만이 아니었다. 시라미아내의 모든 병사들이 정체불명의 괴성에 인상을 찌푸리며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그 괴성에는 피의 냄새가 진득진득 묻어나고 있었는데 마치 누군가에게 피를 마시고 싶다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흑마기를 풀어 그 무시무시한 소음을 견뎌낸 에스프리안이 점점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한 무리의 새떼를 바라보고선 순간적으로 온몸이 경직되었다. 그것은 와이번이었다. 그것도 블러드 오우거처럼 전신이 붉게 물든. 저런 형상의 새는 들어본 적도 직접 본적도 없었다.
“아니, 저것들을 본적이 있어. 저놈들은 분명히…….”
도서관에서 본적이 있었다. 기억이 맞는다면 저들은 바로 블러드 와이번일 것이다.
와이번이라는 단어가 박혀있다고 해도 블러드 와이번은 와이번의 파생종은 아니다. 즉, 둘은 번식적인 관련이 전혀 없다는 얘기다. 그들도 원래는 셀리온 평원의 지붕인 세리포스산 등지에 사는 보통 와이번에 불과했다. 그러나 블러드 오우거에게 사로잡히면서 그들의 운명은 바뀌었다. 피부의 색깔은 점차 붉은색으로 변했고 근골과 근육은 점점 팽창하면서 블러드 오우거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저건 대체 뭡니까?"
하지만 시로스는 저 붉은 와이번들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블러드 와이번은 초대왕이 저술한 낡은 고서에서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러드 오우거의 파수꾼 블러드 와이번이다. 시로스, 어서 궁병들에게 어서 사격준비를!”
“예! 궁병들은 저 놈들을 사격할 준비를 해라!”
성대에 흑마기를 담아 외치는 시로스의 천둥같은 고함소리가 병사들을 일깨웠다. 혼란에 빠져있던 시라미아의 병사들은 어느새 언제 그랬냐는 듯 대열을 정비한 채 블러드 오우거에게 활을 겨누었다.
“젠장.”
블러드 와이번들이 날아가는 방향을 본 에스프리안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놈들의 목적은 바로 투석기였다.
“전원 발사!”
파파파파팟!
시로스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천발의 화살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중력이 거꾸로 되어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화살들은 대부분이 빗나갔지만 일부는 명중시키는 데 성공했다.
“키아아아악!”
날개가 달린 고슴도치가 된 블러드 와이번이 비명과 함께 추락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 한 마리에 불과했다. 나머지 놈들은 아무런 피해없이 투석기를 향해 날아갔다.
“아, 안돼!”
에스프리안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쿠당탕탕!
블러드 와이번은 그대로 몸을 부딪혀 투석기를 박살내었다. 잔해더미가 된 시라미아의 투석기가 병사들과 함께 추락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도미노처럼 하나하나씩 무너져 갔다.
“맙소사.”
마지막 한 대의 투석기가 블러드 와이번에 의해 나무 조각이 되는 것을 목격한 에스프리안이 탄식했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원점이었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될 것같군요.”
성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로스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시로스.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놈들이 이곳을 뚫고 비치요드를 통해 수도로 기어들어가는 걸 막아야 한다.”
말을 마친 에스프리안이 시로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놈들을 막는다면 우린 영웅이 되겠지만, 놈들을 막지 못한다면 우린 무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예. 제 명예를 걸고서라도 반드시 막을 겁니다.”
시로스가 말아 쥔 두 주먹에 힘을 주며 자신의 의지를 불태웠다. 성밖에는 몬스터들이 충차를 위시한 갖가지 공성병기를 동반한 채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을 본 에스프리안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본격적인 전투는 이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