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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라미아 공성전
“아무리 생각해봐도 블러드 오우거란 놈은 참 진정한 괴물이라는 생각이 드는군. 어떻게 셀리온 평원에서 저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동원할 수 있었을까?”
크로펫을 탄 채 언덕위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바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우거들과의 큰 격전을 벌인 바크일행은 남은 병력들을 이끌고 시라미아에서 한참 떨어져있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블러드 오우거겠지요. 초대왕께서 왜 놈을 높이 평가하셨겠습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부관이 바크의 말을 거들었다. 바크가 책으로 본 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백만에 달하는 몬스터들을 동원할 정도로 블러드 오우거의 통제력은 막강했다. 더군다나 브롬바르트 공성전때 보여줬던 그 무시무시한 공성병기들의 경우, 적어도 수천의 몬스터들을 풀어서 만들었을 텐데, 하루에 수없이 많이 먹고 먹히는 몬스터들이 그런 쓸데없는 데에 시간을 투자할 만큼 여유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모두 관리하면서 그런 무시무시한 공성병기들을 만들었다는 것만 생각해봐도 블러드 오우거는 괴물이었다.
“아무튼 간에, 우리가 해야 할 임무는 끝났어. 이제 이 전쟁의 열쇠는 뱀파이어 로드가 쥐고 있어.”
말을 마친 바크가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아이슬로너는 반드시 올 것이다. 캄에덴의 주축을 이루는 대군을 이끌고 말이다. 바크는 바로 자신이 이끄는 1전단과 다크매지션과 쉐도우 스나이퍼, 이 두 특수부대가 캄에덴의 본군과 합류할 그때를 노리고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 이놈, 브롬바르트에서의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바크가 이를 갈면서 지금쯤 시라미아 앞에서 수많은 몬스터들과 함께 공성전을 치르고 있을 블러드 오우거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다. 캄에덴의 대군만 온다면 반드시 선봉에 서서 박살을 내버릴 것이다.
“하지만 저 녀석들은 절대 안정을 취해야 되겠어.”
어느새 바크의 시선은 풀밭에 드러누워 잠을 자고 있는 두 뱀파이어에게로 갔다. 그들은 바로 지난번의 전투에서 블러드 오우거를 상대하다가 죽기직전의 상태까지 갔었던 스탐과 페리알이었다. 전투에서 그들이 한 활약은 대단한 것이었다. 천하의 블러드 오우거를 한참동안이나 붙잡고 있었으니깐 말이다.
“그래, 몸은 괜찮냐?”
그들에게로 다가간 바크가 물었다. 스탐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러드 오우거 놈 참 세긴 세더군요.”
페리알이 아직도 몸이 아픈지 어깨를 주무르며 투덜거렸다. 바크가 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희는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어라. 내가 네 녀석들 몫까지 합해서 블러드 오우거 놈을 작살내 줄 테니.”
“그건 뱀파이어 로드께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요?”
스탐이 물었다. 그러자 바크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한 탓인지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나보다.
“그, 그건 그렇지…, 쳇! 내 손으로 놈을 죽일 수 없다니…….”
바크가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블러드 오우거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다. 그도 브롬바르트에서의 일전으로 잘 알고 있었다. 놈은 서열 1위인 자신마저도 허무하게 쓰러뜨릴 정도로 강했다. 뱀파이어 로드가 나선다고 해도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물론 결과는 싸워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너희는 아무 걱정 말고 편히 쉬고 있거라.”
스탐들에게 그렇게 당부한 바크는 볼 일이 있는 지 어디 론가로 사라졌다. 스탐은 바크를 한참 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수는 없죠. 전 놈에게 빚진 것이 있기 때문에 절대 포기 못합니다.”
스탐은 이를 갈았다.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철천지 원수인 블러드 오우거를 눈앞에 두고 아무런 활약조차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다니.
“블러드 오우거 놈,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다.”
스탐이 주먹을 꾹 쥔 채 두 눈을 불태웠다. 자신이 놈에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복수의 대상이 두려워서 꽁무니를 빼는 건 겁쟁이나 하는 짓이었다.
“준비는 됐겠지?”
라이플 건을 손질하고 있던 카시안이 한마디 했다. 윈델에게서 선물 받은 지 며칠 되지도 않았지만, 파괴력 때문인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그는 그것을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론이지.”
스탐이 그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슴을 탕탕 쳤다. 바크가 전투에 나서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 나선다고 하면 억지로 말릴 이유도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무소속의 배틀러이니 말이다.
저벅저벅
그때였다. 크로뎀이 스탐에게 다가왔다. 그는 상처로 가득한 스탐의 면면을 슥 훑어보더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흥! 한심하군. 꼬락서니 하고는…….”
그 말에 스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심경이 거슬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겐 크로뎀의 말을 반박할만한 건수가 있었다. 스탐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꾸했다.
“푸하하. 한심하다고? 블러드 오우거의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은 겁쟁이가 지껄일 말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
“난 적어도 놈에게 덤비긴 했다. 하지만 네놈은 뭐지? 뭐가 잘났다고 큰 소리야?”
순식간에 크로뎀의 얼굴이 붉어졌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블러드 오우거와 싸워 단 몇 분을 버티는 인물도 뱀파이어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이다. 그리고 스탐은 그중의 하나였다. 큰 소리를 칠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스탐이 말했다.
“크로뎀. 네놈의 목표는 뭐지?”
“?”
뜬금없는 질문에 크로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도를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스탐을 한참 노려보다가 한 마디 했다.
“베르크 가의 재건이다. 몬스터들에게 무참히 짓밟힌 베르크 가에 싹을 피워 예전처럼 번창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의 내 목표다.”
“그렇겠지.”
스탐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마음에 드는 녀석은 아니지만 놈은 자신의 가문에 절대적인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만큼은 인정해야 했다. 물론 자신은 그와 전혀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내 목표는 베르크 가와 플로센을 작살낸 더러운 몬스터들의 우두머리 블러드 오우거의 목을 베는 일이다.”
“뭐라고?”
상당히 충격적이었는지 크로뎀의 눈이 크게 떠져 있었다. 격정으로 가득차 있는 스탐의 눈빛은 지금 자신이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스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소리쳤다.
“나는 블러드 오우거를 죽일 수 있다. 아니, 반드시 죽여야만 한다. 그게 끓어오르는 내 감정을 식힐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니까!”
“오는군요.”
“그래.”
시로스의 중얼거림에 에스프리안이 묵묵히 대답했다. 배틀러인 그들조차 긴장하고 있을 정도로 몬스터들은 많았다. 아니, 많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했다. 끝이 없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것이다.
“사격준비.”
하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벌써 몬스터들이 지척까지 다가왔기 때문이다.
“7초…6초…5초….”
시로스가 조용히 숫자를 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벽위에 포진한 궁병들이 감행할 대규모사격의 카운트 다운이었다. 에스프리안은 긴장을 완화시키기 위해서인지 시로스와 함께
“…2초…1초….”
“발사!”
푸푸푸푸웅! 쉐에에에엑!
시로스의 외침은 불이 붙은 도화선이었고 그와 동시에 터져나온 무수한 화살세례는 폭발하는 화약이었다. 화약이 폭발하자 성벽위에서 몬스터들을 향해 겨누고 있던 하프 뱀파이어 궁수들이 쏜 수천발의 빗줄기들이 선두의 몬스터들을 뒤덮었다.
“크아아!”
“쿠어어억!”
선두의 몬스터들이 그대로 벌집이 되어 꼬꾸라졌다. 하지만 시체가 된 그들은 동료의 발에 파묻혀 금세 사라졌다. 물론 화살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푸푸푸풍!
시라미아에서 쏟아져 나온 화살이 또 다시 몬스터들을 저세상으로 보내었다. 그것은 평범한 성에서는 나올 수 없는 굉장한 화력이었다. 과연 철옹성 다크 포트리스의 궁병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쏴라! 한놈도 남기지 말고 쏴 죽여버려라!”
에스프리안이 목청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는데, 마치 맹수의 왕이 먹잇감을 향해 포효하는 것 같았다. 시라미아의 궁병들은 자신이 쏜 화살이 목표물에 꽂히기 도전에 다시 쏘아댔다. 그것은 숙련됨을 떠나 초인적인 속사능력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시라미아에 포진한 궁병들의 막강한 화살세례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돌격해오던 몬스터들은 어느새 시라미아의 지척까지 다가왔다.
쿠웅―
선두의 오크들이 사다리를 성벽에 걸친 뒤 거침없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날아오는 화살에 다수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세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쿠워어어엇!”
사다리를 타고 성벽위로 진입한 오크 한 마리가 화살을 재고 있던 궁수에게 투박한 검을 들이대었다. 뒤늦게야 그의 존재를 눈치 챈 궁수가 활을 들었지만 오크의 강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이익!”
궁수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오크의 검을 보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챙챙챙!
하지만 아직 그는 죽을 운명이 아니었나 보다. 어느새 나타난 병사가 그 오크를 상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그는 뱀파이어 전단에 비하면 한참 약했지만 하급 몬스터들을 처치할만한 실력은 충분했다.
푸욱!
한참동안 오크와 교전을 벌이던 병사의 장검이 오크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리고 축 늘어진 오크의 시신을 확인한 그가 궁병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 다친데 는 없나?”
“어, 없다.”
“그럼 어서 활을 쏴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말을 마친 병사는 다시 성벽위로 올라온 오크들을 상대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를 한참 보고 있던 궁병도 이내 성벽 밖의 몬스터들을 향해 다시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성벽위에서의 전투는 비교적 순조로웠다. 오크를 주축으로 한 하급 몬스터들에 비해 시라미아의 하프 뱀파이어 병사들의 전투력이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배틀러인 에스프리안과 시로스까지 직접 움직이다 보니 궁병들이 화살을 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프리안은 성밖을 지켜보면서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