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55화 (55/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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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라미아 공성전

“엄청 크군.”

“블러드 오우거는 진정한 괴물이로군요. 저런 것까지 준비해놓다니…….”

시로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켜야 할 그들이 이렇게 얼어붙어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면 지금 그들의 눈앞에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공성탑들이 시라미아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저건 또 뭐야?”

“마, 맙소사…….”

공성탑을 본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그들은 벌써부터 눈앞의 거대한 공성병기에 넋이 나가 있었다.

“모두 침착해라!”

그런 그들에게 에스프리안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막상 큰소리는 쳤어도 정작 그 자신마저도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잘 느끼고 있었다.

‘평정을 유지하자. 해결책은 있다.’

에스프리안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시라미아에는 브롬바르트보다 견고한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주둔중인 병력으로만 보면 브롬바르트가 월등히 강했지만 성문의 내구력은 시라미아가 한참 강했다. 물론 성문 자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바로 게이트 실드를 말하는 것이었다. 시라미아는 브롬바르트보다 더 일찍 만들어진 다크 포트리스였기 때문에 오벨리스크에 축적된 흑마기가 더 많았고, 따라서 게이트 실드의 힘도 더 강했다. 사실 성벽 위만 공략당하지 않는다면 캄에덴의 정예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는 있는 것이다.

“모두 겁먹지 마라! 우리의 손에 캄에덴의 미래가 달려있다! 궁병 사격!”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에스프리안이 손을 높이 치켜들며 외쳤다.

쉐쉐쉐엑! 푸푸푸푹!

궁병들의 화살세례에 일단의 오크들이 동시에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오크들의 시체를 밟고 사다리로 다가온 전사들이 검으로 사다리를 지탱하고 있던 갈고리의 끈을 잘라내었다.

기이이잉.

“쿠에에에엑!”

“쿠워어억!”

사다리가 뒤로 넘어지자 들러붙어 있던 몬스터들의 대부분이 추락해 죽어나갔다.

“사다리는 이제 다 제거한 것 같군요.”

주위를 둘러보던 시로스가 말했다. 에스프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문제는 사다리가 아니었다.

“하아, 어떻게 놈들이 저런 거대한 공성병기를 만들 수 있을까?”

에스프리안이 궁금증이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그렇다 치자, 저능한 몬스터들이 어떻게 저토록 고도의 건축기술이 필요한 공성탑을 만들었을지는 정말 의문 중에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저 공성탑을 일분일초라도 빨리 깨는 것이다.

“오우거를 쏘아라! 공성탑이 움직이고 있는 건 바로 저 오우거들 때문이다!”

에스프리안의 명령에 궁병들의 활시위가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지휘관의 지시대로 그들의 목표는 바로 오우거였다.

“쿠어어!”

금세 한 마리의 오우거가 소나기같은 화살세례를 정면으로 뒤집어썼다. 순식간에 수십 발의 화살이 오우거의 몸뚱이를 고슴도치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 셀리온의 간판괴물은 피가 철철 넘쳐흘러 대지를 적혀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버텼다.

푸푹! 푸푸푸푹!!

“쿠어어헝!”

하지만 오우거도 생명체였다. 목줄기에 대여섯 발의 화살들이 꽂히자 놈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병사들이 환호상을 질렀다.

“장전.”

하지만 에스프리안의 한 마디에 그들은 다시 화살통에 손을 가져갔다. 이제 한 마리였다. 공성탑을 미는 오우거는 수십 마리에 달했다. 여유를 부릴 틈이 없었다.

“쏴라!!”

쉐에엑!

또다시 공성탑을 밀고 있는 오우거들에게 화살세례가 퍼부어졌다. 벌써 대여섯 마리의 오우거들이 바닥에 드러누웠지만 죽은 오우거의 자리를 다른 오우거가 메워서 밀고 있었다. 상황은 누가 보아도 오우거들이 다 죽기 전에 공성탑이 성벽까지 닿을 게 확실할 것으로 보였다.

“성주님,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오벨리스크에게 명령을 내리십시오. 블록 버스터 한방이면 공성 탑 하나쯤은 우습게 무력화 시킬수 있잖습니까?”

시로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높다란 첨탑을 가리키며 그렇게 소리쳤다. 에스프리안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봐 시로스. 자네도 오벨리스크에 축적된 흑마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잖은가.”

“태평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저 공성탑들이 모두 도하되어 몬스터들이 성벽으로 쏟아져 나오면 끝장이잖습…….”

퍼억!

순간 묵직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시로스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에스프리안이 노기를 띠며 시로스를 다그쳤다.

“배틀러인 자네가 여기서 동요하다니. 실망이네 시로스.”

“…….”

시로스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에스프리안은 그런 그를 측은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도 마음속으로는 시로스만큼이나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말해줘야 할 부분은 있었다.

“우리의 생명선은 바로 게이트 실드다. 오벨리스크에 있는 흑마기 모두를 게이트 실드에 투자해야 돼.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책이다. 성벽 위의 몬스터들은 어떻게든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버틸 수 있지만, 성문을 부수고 쏟아져 나오는 오우거들은 막을 수 없다.”

“잘 알겠습니다.”

“사실, 나도 이 상황에서라면 블록 버스터를 원 없이 쓰고 싶다.”

에스프리안이 시로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것은 솔직한 심정이었다. 실제로 본적은 없지만 책에서 보아온 블록 버스터에 대한 묘사를 생각해본다면 얼마나 통쾌한 장면이 나타날지는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하지만 기회비용은 그것을 허락하고 있지 않았다. 왜냐면, 블록 버스터를 쓴다면 그만큼 게이트 실드의 지속시간은 줄어들 테니까.

에스프리안의 시선은 어느새 성벽너머로 갔다. 그곳에는 몬스터들이 자랑하는 공성전의 최종병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멀리서 대충 보기는 했지만 정말 무시무시한 충차로군.”

에스프리안이 그는 몬스터들의 충차를 오늘 처음 보았지만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게이트 실드를 갖춘 브롬바르트를 하루만에 함락시킬 정도라면 저 정도의 충차는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니까.

“사격중지!”

공성탑들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을 확인 에스프리안의 입에서 서릿발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한 발짝 물러서면서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모두 뒤편으로 물러서서 대열을 갖추어라. 궁수들은 공성탑이 도하되기 전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도하되는 순간 곧바로 몬스터들에게 화살을 먹인다. 그리고 전원 돌격. 성문이 부서질 때까지 싸운다.”

이를테면 결사항전이었다. 물론 병사들도 몬스터들이 시라미아 앞에 들이닥쳤을 때부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루이드.”

“네 성주님!”

에스프리안의 호명에 한 병사가 앞으로 튀어나왔다. 성주씩이나 되는 작자가 보잘것없는 하프 뱀파이어의 이름을 안다는 사실은 그가 시라미아에 주둔중인 병사들의 지휘권을 가졌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자네는 밑으로 내려가서 지원 병력을 데리고 오게.”

“알겠습니다.”

그루이드가 내려간 것을 확인한 에스프리안은 시선을 다시 공성탑 쪽으로 돌렸다. 어차피 충차는 이 병력으로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성벽을 사수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병력을 성벽위로 밀집시키는 것이다.

‘성벽 위만 막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하지만 에스프리안은 그것이 큰 화근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쿵!

그때 육중한 타격음과 함께 다리가 흔들려왔다. 그것은 긴장하거나 지쳐 그러는 게 아니었다. 바로 충차가 시라미아의 성문을 후려침으로 인해 일어나는 굉음이었다.

성벽위의 병사들은 거기에 동요하기는커녕, 흔한 기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성벽 위는 완전히 침묵지대였다.

쿠쿵!

침묵을 깨는 소리가 에스프리안의 귓가를 들쑤셨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지나가는 개도 알 것이다.

공성탑들이 일제히 성벽에 달라붙자 병사들은 전열을 가다듬었다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겼다. 전사들은 검을 고쳐잡고 있었다.

쿠웅!

공성탑의 전면을 막고 있던 최상층부의 철판이 성벽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하프 뱀파이어 궁수들이 당기고 있던 활시위를 놓았다.

쉐쉐쉐엑! 푸푸푸푹!

“크어억!”

“쿠웨에엑!”

“으어억!”

비명을 지른 쪽은 몬스터들뿐만이 아니었다. 몬스터측도 도하되자마자 화살을 날린 것이었다.

“돌격!”

쌍방이 화살을 주고받아서 혼란스러운 와중에, 에스프리안의 서릿발 같은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양측은 함성을 지르며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와아아!”

“쿠워어어!”

챙챙챙채앵! 푸악!

좁은 성벽 위였기 때문에 금세 괴성과 함께 칼부림이 일었다. 비명이 쏟아졌고, 피가 흩뿌려졌다. 하지만 대부분은 몬스터들의 것이었다. 일단 상황은 하프 뱀파이어들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시라미아측의 병사가 오크같은 소형 몬스터보다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다.

“흐아압!”

푸우욱!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에스프리안의 오크의 복부에 손을 박아 넣었다. 재수 없게도 상대를 잘못 만난 오크는 제대로 된 칼질 한번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차디찬 시체가 되었다.

털썩!

“크크크크!”

에스프리안이 피로 물든 손을 핥으며 광포한 웃음을 흘렸다. 그는 방금전 죽인 오크에게서 꺼낸 심장을 입에 가져가더니 씹어먹기 시작했다.

우걱우걱.

이빨이 상하운동을 하면서 오크의 심장을 잘게 찢었다. 씹어 먹는 과정에서 피분수가 휘날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피를 즐기는 뱀파이어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심장을 잔인하게 씹어 먹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쿠르륵.”

“쿠우우우…….”

동료의 심장을 삼키는 에스프리안의 모습에 몬스터들이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아무리 동족의 잡아먹는 저능한 몬스터들이라도 그의 그로테스크한 모습에 공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몰아붙이고 있는데 몬스터들이 기세를 잃자 전세는 확실하게 기울어졌다. 시라미아의 병사들이 휘두르는 칼날 아래 수많은 몬스터들의 목이 떨어졌다. 일부 병사들은 오히려 공성탑을 점거하고 있을 정도였다. 상황은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괜한 걱정을 한 것 같군요.”

“그러게 말이야.”

시로스의 말에 에스프리안이 대꾸했다. 피로 칠갑을 했지만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트롤도 서넛이면 이길 수 있는 시라미아의 병사들이다. 더군다나 배틀러인 자신들까지 있는데 하급 몬스터들만 가득한 공성탑에게 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에스프리안은 머지않아 자신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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