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56화 (5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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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시라미아 공성전

“키이이이이이―!”

“뭐, 뭐야?”

귓가를 파고드는 무시무시한 소음에 깜짝 놀란 에스프리안이 소리쳤다. 그리고 잠시 후, 하늘을 올려다본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너무 일방적으로 흘러간 나머지 그들을 잊고 있었다.

“블러드 와이번!”

“키아아아아!”

에스프리안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는 건지 블러드 와이번이 다시 한번 괴성을 질러대었다.

“젠장…….”

흑마기로 귀를 보호한 에스프리안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놈의 괴성은 전투에서 어떻게 보면 강력한 무기였다. 단순히 소리만 질렀을 뿐인데 병사들이 엎드린 채 귀를 감싸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고통스럽기는 몬스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러던 중, 에스프리안은 한 가지 궁금증이 들었다.

‘저놈이 갑자기 여기엔 왜 나타난 거지?’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목적 없이 오는 놈들은 아니었다. 전투 초반에도 섬광같이 날아와 투석기들을 다 부수고 사라졌지 않은가. 하지만 에스프리안은 블러드 와이번들이 자신들이 있는 성벽 위를 향해 날아오자 그제서야 놈들이 어떤 짓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

“모두 피해!”

에스프리안이 병사들에게 다급하게 외쳤다. 물론 그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알고 있었다. 비좁은 성벽 위에서는 피할 곳도 없었다.

쏴아아악!

이윽고 블러드 와이번들이 입을 척 벌리더니 거기에서 붉은 안개 덩어리가 성벽 위에서 혼잡하게 돌아다니고 있던 병사들을 덮쳤다.

“크으으윽!”

“으아악!”

그 붉은 안개에 휩싸인 병사들이 고통스럽다는 듯 온몸을 비틀고 비명을 질러대며 죽어나갔다.

“브레스!?”

에스프리안이 경악했다. 브레스라면 드래곤이 자랑하는 최강의 공격수단이다. 물론 와이번도 드래곤과 유사한 형태의 브레스를 뿜어낸다고는 들었지만 그것은 사실 브레스라고 불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블러드 와이번이 내뿜은 브레스는 단숨에 수십 명의 병사들을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쏴라!!”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정신을 온건히 유지하고 있는 궁수들은 브레스를 뿜고 지나간 블러드 와이번을 향해 화살을 쏘아댔다. 그러나 고작해야 수십 발에 지나지 않는 화살들은 놈들의 꽁무니만 쫓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에스프리안이 바닥을 치며 욕지기를 퍼부었다. 이렇게 되면 블러드 와이번에게 더 이상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또 다시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으아악!”

“커어억!”

수많은 비명소리가 에스프리안의 귓가를 자극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블러드 와이번들이 나타난 지 불과 몇 분 만에 병력의 태반이 전멸했다.

‘아, 시라미아의 성주인 내가 이런 실책을 범하다니.’

성벽 위만 막으면 된다는 생각에 병력을 너무 밀집 시킨 게 화근이었다. 후회가 막심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공성탑의 몬스터들은 눈앞에 펼쳐진 붉은 안개를 보고선 더 이상 성벽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저능하다곤 하나 그들도 머리는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 나오는 게 자살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스프리안이 그런 몬스터들을 욕했다.

“약아빠진 새끼들.”

“어떡하실 겁니까?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전멸입니다.

시로스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말 대로였다. 아군의 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배틀러인 자신들이야 브레스가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병사들은 아니었다.

“하는 수 없지. 일부 병력을 제외하고 모두 성벽 밑으로 대피하라!”

에스프리안은 결국 어려운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몬스터들에게 성벽 위를 거저 주는 꼴이다. 물론, 병사들을 대피시키지 않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우르르―

성주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이 미친 듯이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동료가 비참하게 죽어갔던 것을 보았던 그들로선 저 브레스가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쏴아악, 쏴아아!

“으아악!”

“크어어어!”

그러는 와중에도 브레스는 또 다시 다가왔다. 성벽 밑으로 내려가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밀집되었던 탓에 사상자는 늘어만 갔다.

퍼덕, 퍼덕, 퍼덕.

블러드 와이번들은 그 브레스를 끝으로 꼬리를 보이며 퇴각했다. 하지만 에스프리안은 안심할 수 없었다. 놈들이 하는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을 테니까.

“쿠우어어.”

예상대로였다. 블러드 와이번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공성탑의 몬스터들이 일제히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아까전과는 달리 흉포한 빛을 내뿜으며 시라미아의 병사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전만 해도 겁에 질려 도망가던 놈들이…….”

시로스가 놈들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지금은 아까전과는 양상이 판이하게 바뀌었다. 아군은 반 이상이 죽거나 다쳐 온전한 몸을 가진 병사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에스프리안의 명령에 따라 대부분의 병력이 성벽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지.”에스프리안이 두 주먹을 꾹 쥐었다. 소수의 병력을 이곳에 남긴 이유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기 위해서였다. 숫적으로 아무리 불리하다고 해도 배틀러가 둘이나 있는 이상 금방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두 손에 캄에덴의 미래가 걸려있다. 우리는 위대한 캄에덴의 군인들이다. 저따위 미개한 종족들 따위에게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을 마친 에스프리안은 곧바로 튀쳐나가 한 오크의 목을 베었다. 금세 머리통이 하늘에 떠올랐다.

“모두 공격! 살이 발리고 뼈가 부러질 때까지 싸운다!”

“와아아아아!!”

“쿠워어억!”

채채챙! 채챙! 푸욱!

어느새 병기와 병기가 맞부딪혀 울리는 쇳소리와 병사들의 괴성, 그리고 그 와중에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로 인해 조금전만해도 침묵이 흐르고 있던 성벽 위는 그야말로 피바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다니? 정말 용하군, 용해.”

언덕너머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바크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브롬바르트와는 달리 시라미아는 오랫동안 쌓아온 흑마기를 게이트 실드를 유지하는데 다 썼습니다. 더군다나 원군이 올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열악한 병력으로도 버텨낼 수 있는 거겠지요.”

“나도 알고 있으니 잠자코 있게.”

부관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자 바크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최강이라 불리는 자신의 1전단을 포함해 수많은 병력이 주둔해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락당한 브롬바르트와 주둔한 병력이라곤 고작 2만 가량의 하프 뱀파이어 병사들이 다인 시라미아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 부끄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음?”

그때 바크의 귓가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동물의 발소리였다. 그리고 그 발소리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듣는 것만으로도 대규모의 군대가 온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드디어 온건가?”

바크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수없이 많은 크로펫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1만에 달하는 크로펫과 거기에 탄 뱀파이어. 캄에덴의 어느 누구에게 물어도 그들이 무슨 전단 소속인지 대답해줄 수 있을 것이다.

“2전단이라, 오랜만에 보는군. 참 대단한 위압감이구나.”

한참 쳐다보던 바크의 시선이 1전단에게 시선을 보내었다. 분명히 1전단이 한 수 위의 전단이었지만 그들에 비해서 무척이나 초라해 보였다.

“잠깐, 저들은 혹시…….”

찬찬히 바라보던 바크가 눈을 크게 뜬채 한곳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2전단의 선두에는 버서커와 다크 나이트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놀란 건 아니었다. 또 다른 특수부대를 보고 놀란 것이었다.

“히든 브레이커들이? 더군다나 저렇게 많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히든 브레이커는 베일에 가려진 존재들이었다. 개개인의 힘은 무척이나 강한 그들은 서열 상위권을 거의 독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특수부대들과는 달리 한번 단합하는 게 힘들다고 해서 알려진 자들이다. 그런 그들이 80여명이나 모였다니?

그때였다. 한 뱀파이어가 빠른 속도로 바크에게 다가왔다. 무척이나 빠른 것이 마치 싸우려고 덤벼드는 것 같아 바크가 순간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입니다 바크님. 무척 지쳐보이시는군요.”

눈 깜빡할 사이에 바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꾸벅 인사했다. 바크는 흠칫 놀라면서도 눈앞의 뱀파이어가 자신에게 낯익은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자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빠르군, 카라프.”

“하지만 바크님을 이길 정도는 아니지요.”

카라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바크는 예전에 저 날고 기는 히든 브레이커의 마스터를 쓰러뜨린 전적이 있다. 그 덕에 서열 1위의 자리에 오르긴 했지만 절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너희 히든 브레이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긴 아는가보군? 이렇게나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되었다니 말이야.”

바크가 카라프를 뒤를 따라오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속에는 히든 브레이커들에 대한 조롱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개개인이 강하긴 하나 콩가루 특수부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할 정도로 단체로 움직이니 않으니 말이다.

“뭐, 어쩔 수 있겠습니까? 캄에덴 최강의 전단이라는 명함을 달고계시던 바크님의 1전단이 주둔하고 있던 브롬바르트가 한낯 몬스터 패거리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충격적이긴 충격적이었으니까 말입니다.”

“뭐야?”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바크가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카라프의 짙은 미소를 짓고 있자 이내 입을 다물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것이 바로 히든 브레이커의 생활신조였다. 자신이 먼저 시비를 걸었기 때문에 반박할 명분도 없었다. 그때였다.

다닥, 다닥, 다닥.

“뭐하나? 명색이 캄에덴의 내노라 하는 뱀파이어들 둘이서 적을 바로 코앞에 두고 한가하게 말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바크의 시선이 한 사내에게로 옮겨졌다. 그는 서열1위였고, 카라프는 서열2위였다. 그런 그들에게 함부로 그런 말을 늘어놓을 작자는 넓은 캄에덴에서도 단 한명뿐이었다.

“뱀파이어 로드를 뵙습니다.”

바크가 오랜만에 만난 자신의 주군에게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다. 1전단의 뱀파이어들도 바크를 따라했다. 아이슬로너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꼴이 말이 아니로군. 바크. 도대체 어떤 녀석이 그랬지? 캄에덴의 이인자와 최강읮 전단을 이꼴로 만들었느냔 말이다.”

“…….”

아이슬로너의 추궁에 바크는 할말을 잃었다. 그의 갑옷은 깨끗하게 패배했을 때나 가능할 정도로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다.

바크는 잘 알고 있었다. 아이슬로너가 비록 그렇게 묻긴 했지만 그는 자신들을 이꼴로 만든 존재의 정체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블러드 오우거라, 참 시기적절한 때에 맞춰서 잘 나타났군.”

아이슬로너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바크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여겨졌다. 비록 뱀파이어는 강자를 원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참패를 당했을 정도면 뱀파이어 로드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저 웃음의 의미는 뭐란 말인가?

“음, 저건?!”

하지만 바크는 이내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아이슬로너의 팔에 황금빛이 감돌았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그저 착시현상일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새 아이슬로너의 팔 전체가 황금빛을 머금고 있었다.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어떤가, 바크. 이정도의 힘이라면 블러드 오우거를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아! 로드께선 이미 배틀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하셨구나.’

바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4000여년의 긴 세월을 자랑하는 캄에덴의 역사에서도 배틀 마스터는 단 여섯 명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한명의 배틀 마스터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다.

“충분합니다. 그 정도면 반드시 블러드 오우거의 목을 베어버릴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들으니 흡족하군.”

바크가 정색을 하며 단언하자 아이슬로너가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도 사실 이 지고의 경지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힘을 시험해줄 상대가 필요했다. 그런데 블러드 오우거라는 괴물 놈이 서열 1위의 바크를 패퇴시켰다고 한다. 시험하기에 더 없이 훌륭한 상대였다. 아이슬로너의 시선은 어느새 시라미아를 향했다.

“아직 시라미아가 함락 당하진 않은 모양이군.”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함락 당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서 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바크가 뒤편의 병사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아이슬로너가 끌고 온 캄에덴의 정예는 실로 엄청난 전력이었다. 뱀파이어 정규군 전단만 자그마치 여덟 개로, 총 8만의 대군이었다. 물론 몬스터들은 그들보다 수십 배는 더 많았지만, 뱀파이어 전사들은 하나하나가 일당백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이 자리에는 캄에덴이 자랑하는 다섯 개의 특수부대가 모두 모여 있었다.

“그래야겠지…, 바르자드!”

“예, 로드.”

언제부턴가 옆에서 서 있던 바르자드가 대답했다. 아이슬로너는 수없이 많은 몬스터들로 우글거리는 시라미아 앞의 드넓은 평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 아이슬로너 바리스칸이 명한다. 너의 다크 매지션으로 위대한 캄에덴군이 치르는 전투의 신호탄을 올려라.”

“끌끌끌, 영광입니다.”

말을 마친 바르자드는 다크 매지션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 캄에덴은 최강의 병력이었다. 일방백의 뱀파이어 전사들과, 절정의 실력자인 다섯 개의 특수부대원들. 이들을 막을 수 있는 종족들은 아예 없어 보였다. 다크 매지션들이 다 모이자바르자드가 소리쳤다.

“끌끌끌. 나의 자랑스러운 다크 매지션들이여! 어서 저 멍청한 몬스터들에게 지옥을 맛보여 주자꾸나!”

말을 마친 바르자드는 이윽고 크로펫의 고삐를 세게 잡아당기면서 몬스터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뒤를 백여 명의 다크 매지션이 따랐다.

“다크 스피어 발사 준비!”

몬스터들의 근처로 어느 정도 접근하자마자 바르자드가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다크 매지션들은 크로펫들을 세우고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모았다. 어느새 그들의 두 손에서는 강렬한 흑마기의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쏴라!”

추상같은 고함성과 함께 바르자드의 손이 빛살같이 빠르게 내려갔다. 그리고 그것은 놓아진 활시위요, 당겨진 방아쇠가 되었다.

챙챙! 푹, 투캉!

“흐아아아압!”

“쿠워어어어어!!”

병장기들이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과 비명이 한데 뒤섞여 이루어진 기괴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시라미아의 성벽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어느새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성벽 위는 시라미아군에게 일방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블러드 와이번의 재등장을 시발점으로 전세는 뒤틀렸다. 이제는 시라미아의 두 배틀러가 앞장서서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자랑스러운 캄에덴의 아들들이여!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버티자!”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악전고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을 지휘하는 에스프리안이 일선에서 직접 몬스터들을 죽여 나가며 소리쳤다. 시로스도 그를 보좌하면서 신들린 듯이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아무리 배틀러인 그들이라고 하더라도 병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빛을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으아악!”

한 병사가 오크의 검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금세 그를 향해 몬스터들의 무수한 난도질이 가해졌다. 그것이 성벽 위를 사수하고 있던 마지막 병사의 최후였다.

“시로스! 이제 내려가자!”

에스프리안이 소리쳤다. 이제 성벽 위에는 두 배틀러밖에 남지 않았다. 물론 좁은 계단에서 싸운다면 시간은 얼마든지 벌수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때가 된 건가.’

오벨리스크를 힐끔 바라본 에스프리안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첨탑 오벨리스크의 꼭대기 끝에 아른거리고 있는 흑마기는 이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계산대로라면 게이트 실드는 몇 분 이내에 깨질 것이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몇 백 년을 축적해온 흑마기가 하루 만에 다 소진돼 버리다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어서 병사들을 이끌고 내성으로 대비해야겠군.’

에스프리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몬스터들이 그에게 덤벼들었다.

“어림없다, 이놈들!”

시로스가 그런 몬스터들의 행태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괴성을 지르며 뛰어 내려오는 오크의 두 눈알을 손가락으로 터뜨린 뒤 놈이 장님이 된 것에 절망하기도전에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잔인한 살수에 몬스터들은 겁을 먹었는지 계단 밑으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서 내려가지요.”

“그러지.”

대화를 마친 그들은 빠르게 계단을 밟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높이를 가진 시라미아의 성벽인지라 계단이었지만, 배틀러인 그들에게 크게 장애가 되는 건 아니었다.

“성주님!”

성벽 밑으로 다 내려오자마자 한 하프 뱀파이어가 다가왔다. 에스프리안은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말하게.”

“게이트 실드가 조만간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래, 어서 내성으로 대피하자.”

말을 마친 에스프리안은 병사들을 이끌고 내성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푹.

“으어억.”

그때 한 병사가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졌다. 에스프리안의 시선이 그리로 갔다. 병사의 등짝에는 화살이 박혀있었다. 그가 다급히 외쳤다.

“모두 피해!”

쉐쉐쉐쉐엑!

금세 한 떼의 소나기처럼 쏟아진 화살세례가 병사들을 덮쳤다. 곳곳에서 비명성이 난무했다.

그 화살은 바로 성벽위를 점령한 몬스터의 궁수들이 쏘아대는 화살들이었다. 다크 포트리스가 자랑하는 8테킷의 성벽이 물론 명중률은 형편없었지만 8테킷밑의 수천이나 되는 적들에게 쏘아대는 화살에는 명중률이 별다른 필요가 없었다. 쏘다보면 맞을 수밖에 없으니까.

“살고 싶다면 모두 나를 따르라!”

어지러운 와중에서도 정신을 차린 에스프리안은 병사들을 선동하며 서 미친 듯이 뛰었다. 숨이 가빠왔다.

“빌어먹을.”

에스프리안은 욕설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색이 배틀러라는 자신이 몬스터들의 조잡한 화살 따위에 쫓기고 있다니. 웃기는 일이었다.

“성문이 부서집니다!”

그때였다. 고개를 돌려 성문 쪽을 바라본 한 병사가 고함을 질렀다. 병사의 말 대로였다. 언제부터 게이트 실드가 사라졌는지 어느새 시라미아의 성문에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나 있었다. 모양새로 보아 이제 한 방이면 부서질 것으로 보였다.

콰아아앙!

“결국 깨졌군.”

에스프리안이 이를 악물었다. 거대한 타격음과 함께 성문이 바닥에 쓰러졌다. 브롬바르트에 이어 캄에덴의 네 번째의 다크 포트리스. 시라미아가 드디어 성문을 적에게 내준 것이다.

“쿠우우어!”

금세 무너진 성문을 밟고 수백 마리의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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