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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캄에덴의 반격
‘빌어먹을 놈들! 나를 도와 공성병기를 실컷 만들어 줘놓고선 뱀파이어들을 이길 수는 없다고 비꼬더니…….’
블러드 오우거는 10여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셀리온 평원 내에서 점점 입지를 굳혀가며 캄에덴을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던 자신에게 두 명의 인간이 찾아왔다.
정확히 말해 그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평범한 인간들이었다면 자신에게 오기도전에 흉폭한 몬스터들에게 먹잇감이 되었을 테니깐. 눈빛만으로 제압한 그들이 자신에게 요구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캄에덴을 쳐라. 도움을 주겠다.’
그 제안에 응한 블러드 오우거는 그때부터 그들의 도움으로 공성병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성전에 필요한 기본적인 사다리부터 거대한 충차까지……. 아마 그들이 없었다면 플로센을 유린하는 건 고사하고 브롬바르트도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다.
“쿠워어억!”
블러드 오우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수백 마리의 오우거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미 소집령을 내려놨기에 모이는 것은 금방이었다. 이들과 함께라면 그 어떤 무리들도 으깨어 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블러드 오우거도 이 전투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단은 발을 빼서 후일을 도모해야겠군.’
그는 벌써부터 도망친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이 병력을 다 잃는다고 해도 다시 모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몬스터가 넘치고 넘치는 곳이 바로 셀리온이었다.
‘뱀파이어 놈들…, 가만히 당하고 있진 않겠다.’
블러드 오우거는 스파이크 클럽을 꾸욱 쥐었다. 일단은 휘하의 오우거들을 이끌고 뱀파이어들을 조금이라도 더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가자! 저 건방진 뱀파이어 놈들에게 우리의 힘을 보여주는 거다!”
“쿠워어어!”
블러드 오우거의 고함소리에 맞물려 수많은 오우거들이 괴성을 지르며 그를 따르기 시작했다. 비록 지능은 떨어지긴 했지만 믿음직스러운 부하들이었다.
한편, 아이슬로너를 선두로 한 다크 나이트들은 몬스터들을 한참 죽여 나가고 있었다. 어찌나 많이 죽였는지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몬스터들의 시체로 뒤덮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자랑스러운 로드의 수족들이여! 어서 저 더러운 셀리온의 기생충들을 모조리 박멸시켜라!"
군주의 위엄 있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몬스터들을 닥치는 대로 죽여 나가고 있던 뱀파이어 군대에게로 울려 퍼졌다.
“놈들이 이 땅을 짓밟은 것에 대한 대가는 매우 크다. 놈들을 모조리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려라!”
말을 마친 아이슬로너가 한 오크의 목을 일도양단했다. 어찌나 빠르고 정교한지 잘린 목에서 한동안 피한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쿠어어!”
그때였다. 갑자기 뛰어나온 몬스터들이 너무 앞으로 나와 본대와 떨어진 그를 둘러싼 채 공격한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잠시 동안에 불과했다. 어느새 그의 근처로 검은 갑옷을 입은 거구의 전사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퍽퍽!
다크나이트들은 묵묵히 몬스터들을 향해 거대한 병장기들을 휘둘러 나갔다. 신들린 듯한 무위에 몬스터들은 추풍낙엽으로 죽어 나갔다.
"크하하하!! 이거나 먹어라!"
후욱, 콰쾅!
육중한 몸집을 자랑하는 바라크만이 게일 그레네이더를 휘둘렀다. 마치 풍차가 돌아다는 듯한 공격에 주위의 몬스터들이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오랜만에 몬스터들을 사냥하는군."
다이어가 한 리자드맨의 급소에 칼을 박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여유부릴 때가 아니었다. 또 다른 리자드맨들이 창을 날려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어쩐 일인지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고 그 창에 일부러 맞았다.
챙챙챙!
리자드맨들의 창은 갑옷에 부딪히자마자 날이 부러졌다. 아나만디움으로 만든 갑옷이 그런 조잡한 무기에 뚫릴 리가 없었던 것이다. 당황해하는 그들에게 다이어는 씨익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냥 내 갑옷이 얼마나 믿을만한지 시험해봤다."
단한번의 번쩍임과 함께 리자드맨들의 머리통이 하늘을 날았다. 옅은 웃음을 짓는 다이어의 검신에는 검고 투명한 빛깔의 흑마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퍽!
"멍청한 놈. 뭐하고 있는 거냐? 한 마리라도 더 잡아야 하는 이때 그런 여유를 부리고 있다니."
피렌시스가 그런 다이어의 머리를 때리며 말했다.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던 다이어가 항의했다.
“흥, 뭘 모르시는군요. 전 단지 제 윈드 커터에게서 풍겨지는 검의 낭만을 느끼고 있었을 뿐입니다."
"검의 낭만? 그건 또 뭐냐?"
피렌시스의 물음에 다이어는 피식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순수 뱀파이어인 피렌시스님은 모르시겠군요. 인간의 검사들은 검을 볼 때마다 모든 슬픔과, 고통, 시름, 혹은 사랑, 자애, 행복 등을 느낀답니다. 투명한 검신에는, 검이 앗아간 생명들의 영혼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죠. 검사는 그들을 느끼면서 오늘도 베어낸답니다.”
휘각!
긴 설명을 마친 다이어는 자신에게 날아드는 오크의 검을 민첩하게 피하면서 우아한 자태로 검을 가슴속 깊숙이 찔러 넣었다.
"어떻습니까?"
다이어는 웃으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피렌시스의 머리를 검면으로 후려쳤다.
깡!
“윽.”
복수를 끝낸 다이어는 아까의 자신처럼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피렌시스에게 한 마디하며 몬스터들을 향해 다가갔다.
“그럼 피렌시스 님 말대로 몬스터들이나 잡으러 가야겠군요.”
"자, 잠깐…, 야, 이 자식아! 제기랄. 한방 먹었군."
피렌시스는 그를 불러세우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그는 방금 전 다이어가 한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리곤 머지 않아 인상을 찌푸렸다.
"뭐? 검의 낭만? 생명의 영혼이니 감정이니 나발이니 해도 결국은 검이 멋있다는 걸 자랑하려는 거 아냐. 이런 약은 자식. 그깟 쇠막대기보다는 내 무기가 더 화려하고 강하다고!"
깡―!
하지만 혼자서 투덜거리던 피렌시스는 또 다시 머리에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이번 것은 힘이 더욱 들어갔는지 머리가 두 쪽이 날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을 때린 상대가 이번에도 다이어인줄 알고 빽 소리를 질렀다.
"너 나한테 원한 있냐? 그래, 오늘 너부터 박살내주…마, 말씀하세요."
"크흐흐흐. 피렌시스. 다시 한번 말해봐라. 내가 요새 귀가 나빠서 말이야."
"아, 아니…마스터. 제 말은 그게 아니라……."
어느새 피렌시스는 고양이를 만난 쥐가 되어 버렸다. 그의 앞에 있는 사내는 다이어가 아니었다. 상대는 바로 다크 나이트 마스터, 바라크만이었다.
‘빌어먹을.’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지는 꼴이다. 다른 놈도 아니고 하필이면 바라크만이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애초에 뒤도 안보고 입부터 먼저 나온 게 실수였다.
"지금은 몬스터를 잡고 있으니 봐주겠다. 물론, 이번 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내가 마음껏 귀여워해 줄 테니 걱정 말거라. 크하하하."
바라크만은 피렌시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을 늘어놓고는 어디 론가로 사라져 갔다.
“오, 벨리우드시여!”
피렌시스는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신참 시절 때도 그에게 심한 괴롭힘을 받았던 피렌시스였다. 그러다가 점점 실력이 쌓이고 어떤 계기로 인해 간신히 그의 마수에서 벗어났는데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저 참담하기 만했다.
‘개자식. 두고 보자.’
그는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다이어를 욕했다.
"모두들 잘 싸우고 있군."
아이슬로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은 평원에는 수백만 단위의 뱀파이어들과 몬스터들이 한데 뒤엉켜 한참 치열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세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룬 상태였다. 전투 초반에야 뱀파이어들이 위압적으로 몰아치긴 했지만 몬스터들도 워낙 대군이다 보니 지금에 와서는 팽팽해졌다. 아무리 캄에덴의 정예들이라도 100배에 달하는 적들을 쉽게 이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아군의 피해가 커지겠는걸.”
난감했다. 물론 질 거라는 생각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타고난 전사들이니깐 말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큰 피해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아이슬로너는 염두를 짚었다.
“적의 지휘관을 죽여야겠군.”
그게 바로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눈앞의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흉흉한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집단의식이 들어서이기도 했지만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바로 자신들이 여기까지 당도하게 만든 장본인, 블러드 오우거 때문이었다. 놈만 죽인다면 구심점을 잃은 몬스터들은 기세를 잃고 무너질 것이다.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아이슬로너는 블러드 오우거를 찾기 시작했다. 상대는 바크도 쓰러뜨린 괴물이었다.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놈을 해치울 수 없었다.
터벅 터벅.
“쿠어억!”
홀로 걸어가는 그에게 다수의 몬스터들이 덤벼들었다. 뱀파이어들을 상대하면서 떨어져 있는 한두 명의 집중 공격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법이라는 것을 몸으로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대를 잘못 만났다.
푸학, 털석!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의 근처로 덤벼드는 몬스터마다 무엇인가에 베여 머리통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런 괴현상은 아이슬로너가 걸어가면서 계속되었다.
"쿠어어억!"
트롤의 양팔과 목이 동시에 잘려나갔다. 오우거들도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팔다리가 다 잘리고 살가죽이 벗겨지는 등의 고통을 겪으며 불귀의 객이 되어갔다.
"수고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어느새 발걸음을 멈춘 아이슬로너가 그렇게 말하자 텅 비어있던 공간에 일단의 뱀파이어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바로 히든 브레이커였다. 은신의 로브를 뒤집어 쓴 그들은 마나에 민감한 배틀러나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종적도 잡을 수 없었다.
“뒤로 물러나 있어라.”
“예.”
이윽고 카라프가 히든 브레이커들을 뒤로 물렸다. 그들을 보고 있던 아이슬로너는 시선을 다시 앞으로 옮겼다. 그의 눈앞에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큰 붉은색의 괴물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기다림을 강요받았지. 하지만 난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나, 셀리온의 괴물이여!"
쿵쿵쿵쿵!
괴물은 대답 대신 발을 들어 아이슬로너를 밟으려고 했다. 아이슬로너는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듯 가뿐하게 몸을 굴리며 그 거대한 발자국을 피했다.
"크흐흐흐. 네놈이 바로 뱀파이어 로드인가보군."
아이슬로너를 밟으려 했던 그 거대한 존재의 정체는 바로 플로센을 짓밟은 침략의 원흉, 블러드 오우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