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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주하는 블러드 오우거
파앗! 데구르르.
몸뚱이와 작별을 고한 리자드맨의 머리통이 하늘을 날았다. 얼마나 깔끔한 일격이었는지 한동안 피가 뿜어져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스탐은 놈의 시체를 한참 바라보면서 블러드 오우거도 반드시 저렇게 만들 거라고 다짐했다.
스탐은 페리알, 카시안과 함께 크로펫을 탄 채 전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길을 막는 몬스터들은 끝이 없었지만 애당초 소형몬스터들에게 그들이 가는 길을 막을만한 능력은 없었다.
“모두들 준비는 됐겠지?”
“물론이죠.”
페리알은 활기를 띈 얼굴로 대답했고, 카시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스탐은 주먹을 꾹 쥐며 의지를 불태웠다.
‘기다리고 있어라, 블러드 오우거. 반드시 네놈을 죽여줄 테니.’
며칠 전에 싸웠을 때는 별다른 힘도 써보지 못하고 밀렸지만, 지금은 달랐다. 반드시 놈의 명줄을 따 버릴 것이다. 그래야만이 먼저 간 이들의 넋을 달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키아아악!”
어지러운 전장의 소음이 셋의 귓가를 자극했다. 몬스터들의 비명성과 날카로운 것이 살을 가르는 소리. 그것은 전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그때였다.
“크크큭! 다 죽어라!”
스탐의 시야로 한 뱀파이어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는 놈 중 한명이 거기 소속이었기 때문에 그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버서커로군. 지온도 이놈처럼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몬스터들을 죽이고 있겠지?’
하지만 머지 않아 스탐은 금세 눈앞의 놈이 그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저 녀석, 지온이잖아!”
“그, 그렇네요?”
일행들은 처음엔 몬스터들의 피에 가려 보이지 않다가 잠시 후에야 문제의 버서커가 지온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온 녀석. 뭔가 이상한데.”
“그렇군.”
스탐은 지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항상 광기어린 얼굴로 고수하고 있던 그였지만 평소의 그로 보이진 않았다. 붉은 물감으로 샤워를 한 그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야수 같았는데 다가오는 어느 누구도 베어버릴 것만 같았다.
“에이, 이상하긴요. 버서커들이 다 저렇게 괴기스럽잖아요. 괜히 광기의 대명사들인가요? 지온님!”
하지만 페리알은 별다른 의심 없이 지온에게 다가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근처에 있던 몬스터들이 전멸한 덕분에 지온은 금세 페리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크르르르.”
“!?”
페리알은 그제서야 눈치를 챘는지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온의 눈에는 동공이 사라졌다. 핏줄만 자리 잡고 있는 흰자위뿐이었다. 입에선 피와 침이 섞여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 그로테스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있었다.
“위험해 페리알!!”
파앗!
스탐이 다급히 외쳤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지온의 손이 번쩍이더니 페리알에게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으윽!”
페리알은 끔찍한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빠른 반사신경을 가진 히든 브레이커라는 사실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지온의 손톱에 몸뚱이가 두 동강나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큭캬캬캬!!”
후우욱―!
지온이 광소를 터뜨리며 또다시 페리알에게 손톱을 휘둘러오기 시작했다. 아마 저걸 또 다시 맞는다면 페리알은 여섯 토막이 나버릴 것이다.
푸콰콱!
살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그것은 페리알의 것은 아니었다. 페리알은 그의 손톱이 쇄도하기전에 크로펫위에서 뛰어내린 상태였다. 지온이 벤 것은 다름아닌 페리알의 크로펫이었다.
“페리알! 내손을 잡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페리알에게 다가온 스탐이 손을 뻗으며 외쳤다. 페리알은 있는 힘껏 뛰어 스탐의 손을 붙잡아 그의 크로펫에 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지온은 여전히 목표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스탐은 급히 크로펫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그를 피할려고 했지만 어느새 버서커의 날카로운 손톱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타앙!
요란한 총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바로 카시안의 것이었다. 카시안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라이플건을 한번 후 불고는 총집에 꽂아 넣었다. 지온이 괴성을 질렀다.
“크어어!”
“자, 어서 뛰어!”
기회를 잡자 스탐은 미친 듯이 크로펫의 고삐를 잡아당겨대었다. 상황의 급박함을 진작 알고 있던 크로펫도 젖먹던 힘을 다해 다리를 굴려 마침내 지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크르르.”
어느새 지온과의 거리가 벌어지자 지온은 스탐들을 한참동안 노려보다가 이내 포기한 듯 다른 몬스터들에게 달려들었다.
“휴우, 다행이군!”
가까스로 지온의 마수에서 벗어난 스탐이 한숨을 쉬었다. 하마터면 블러드 오우거를 구경해보기도전에 더러운 꼴을 당할뻔했다. 스탐은 자신을 위기에 빠지게 한 페리알에게 면박을 주었다.
“야이, 멍청아. 흑마술사들이 버서커들한테 블러드 러스트를 걸어주는거 못 봤냐?”
“아하하. 지온님을 보니까 저도 모르게 반가워서 그만.”
페리알이 멋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스탐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속편한 놈이군. 넌 죽을 때도 그렇게 웃으면서 죽을 거냐?”
“뭐, 그럴지도 모르겠지요.”
“……말을 말자.”
두 마리의 크로펫은 빠르게 땅을 디디며 뛰어가고 있었다. 수백만의 몬스터들이 도사리고 있는 전장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그들이 가는 길을 막는 몬스터들은 거의 없었다. 기뻐해야 할 일이지만 스탐은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처억
“크우우우”
“뭐지?”
멈추어선 스탐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페리알과 카시안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수백 마리의 오우거들이 일단의 뱀파이어들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은 오우거의 스파이크 클럽들을 피하면서 빠른 속도를 이용한 기습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었는데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움직임은 감탄이 나올 법했다.
“동료들이군요.”
히든 브레이커인 페리알이 말했다. 스탐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무위를 가지고 있는 자들은 히든 브레이커들밖에 없었다.
“넌 저들하고 같이 안 싸울 거냐?”
“예. 같은 동료라곤 해도 자기가 싫으면 굳이 같이 싸우지 않습니다. 그게 히든 브레이커죠.”
“그러냐?”
페리알의 말에 스탐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버서커나 다크 나이트들은 집단의식이 굳어 있기 때문에 항상 몰려다니면서 싸운다. 하지만 히든 브레이커는 아니었다. 콩가루 특수부대니, 뭐니 하는 별명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전투에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는 없었다. 자신들의 목적은 블러드 오우거였으니까. 그때 카시안의 시선이 바닥으로 갔다.
“왜 그래, 카시안?”
의아한 얼굴로 다가간 스탐이 그가 보고 있는 방향에 시선을 두자마자 두 눈을 부릅떴다. 그곳에는 거대한 발자국이 있었다. 오우거나, 트윈 헤드 오우거보다도 더 큰 발자국이 말이다. 발자국은 피로 까맣게 물들어 있었는데, 피가 아직 완전히 말라붙지 않은 걸 보면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안 되어 보였다.
“블러드 오우거다.”
“!”
카시안의 말이 확정적이었다. 설마하고 있던 스탐의 생각에 쇄기가 박혔다.
“이러고 있을 틈이 없지. 어서 가자!”
“예!”
“크와앙!”
그들은 곧바로 추격을 시작했다. 저번의 전투에서도 깨달은 사실이지만, 블러드 오우거는 그 몸집만큼이나 속도가 빨랐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추격하지 않으면 놓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