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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주하는 블러드 오우거
후우웅~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나무 한 채가 애꿎은 바닥에 처박혔다. 아마 조금만 늦었더라면 제아무리 날고 기는 카시안이라도 시체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쿠웅!
하지만 블러드 오우거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카시안이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젠장.”
보고 있던 스탐이 이를 악물었다. 그가 정신이 나가서 저러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블러드 오우거가 나무를 집어던진 직후 곧바로 스파이크 클럽으로 바닥을 찍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종의 쇼크 웨이브였는데, 배틀러급의 뱀파이어라면 견딜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엘프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 카시안에겐 치명타였다.
카시안은 일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그의 몸은 이미 진동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마비된 상태였다. 그는 어지러워지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온힘을 다했다.
“꼴불견이군. 내가 이따위 진동에…….”
말끝을 흐린 카시안이 블러드 오우거를 쏘아 보았다. 어느새 놈은 그에게 손을 뻗어왔다. 강철도 으스러뜨리는 블러드 오우거의 손아귀! 저것에 잡히면 끝장이었다.
"어림없다!"
푹푹푹!
스탐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곧장 블러드 오우거의 뒤편으로 다가가 강력한 일격을 날렸다.
퍼어억!
갑자기 등짝에서 고통이 느껴지자 블러드 오우거가 애꾸눈을 부라리며 스탐에게 시선을 옮겼다.
"빌어먹을 뱀파이어 놈!"
블러드 오우거가 그렇게 외치며 스탐에게 스파이크 클럽 두 자루를 휘둘렀다. 카시안이 쏜 화살이 몸 곳곳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런 자잘한 것이 자신의 행동에 제동을 걸수는 없었다.
“그런 걸로 어디 날 잡을 수 있겠냐?”
묵직한 쇳덩어리 두개를 어렵지 않게 피한 스탐은 한바퀴를 구르더니 카스턴을 역수로 쥔 채 블러드 오우거의 발등을 찍었다. 몸집이 큰 만큼 놈은 사각도 많았다.
"크으윽!"
"맛이 어떠냐!"
스탐은 블러드 오우거를 향해 외치는 한편, 속으론 카스턴에게 지시를 내렸다.
'부탁한다 카스턴!'
[맡겨만 둬라.]
카스턴과의 짤막한 대화를 마친 스탐은 곧장 몸을 뺐다.
“죽어라 이놈!”
자신의 발밑에 있는 놈을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스로 나와 주자 블러드 오우거는 주저 없이 그를 걷어차려고 했다.
팍―
다 큰 인간의 몸뚱이만한 발이 스탐에게 적중했다. 그러나 카스턴이 전개한 프로즌 실드 때문에 큰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스탐이 카스턴을 뻗으며 외쳤다.
"이거나 먹어라!!"
파파파팟!!
어느새 카스턴에서 다양한 공격마법들이 튀어나와 블러드 오우거를 강타하기 시작했다. 가장 약한 에너지 볼부터 프로즌 스피어까지 가지각색의 마법들이 놈의 온몸을 두들겼다.
“끄으으!”
블러드 오우거의 괴기스러운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항마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놈이었지만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특히 빙계 마법이면 견딜 수는 있겠지만 얼어붙어 제대로 운신을 할 수 없었다. 반대로 빙계 마법도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이제 접근전으로 승부를 보는 게 좋을걸. 지금의 내 마법은 어디까지나 보조수단이다.]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스탐도 잘 알고 있었다. 놈을 제대로 죽이려면 목을 끊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는 카스턴의 마법으로 인해 아직까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블러드 오우거에게로 뛰어들었다.
콰쾅!
그렇게 치열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스탐은 블러드 오우거의 목을 베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지만, 셀리온의 우두머리도 만만치 않았다. 놈은 가슴이 뚫리는 치명상을 입은 몸에도 불구하고 분전했다.
쌍방은 전투가 계속될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는 스탐에게 흘린 피가 너무 많아서, 그러는 스탐은 계속된 흑마기의 소모로 내부가 점점 피폐해져갔다.
"크크큭. 넌 아마도 날 죽이려고 이 자리에 왔겠지?"
전투 중에 나온 뜬금없는 소리에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하면 잔소리지."
"후후. 당연히 네가 날 쓰러뜨릴 가능성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네놈의 손에 의해서 죽을 지경에 처하더라도 넌 내 목숨을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무슨 뜻이지?"
"무슨 뜻이긴. 네놈은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외친 블러드 오우거가 스탐을 향해 두 개의 스파이크클럽을 동시에 내려쳤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글쎄, 단순히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소리 같은데?]
카스턴조차도 블러드 오우거의 내심을 알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건 놈의 스파이크 클럽을 피하는 것이었다.
“까짓 거!”
스탐은 몸을 굴려 스파이크 클럽을 가까스로 피했다. 방금 전에 서있던 부근에는 거대한 쇳덩어리가 처박혀 있었다. 삽시간에 소름이 끼쳐왔지만 그것은 오히려 기회였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카스턴!'
[알았어. 흥미롭군.]
평범한 장검의 모습을 지니고 있던 카스턴은 어느새 도(刀)의 형상을 지니게 되었다. 일격 필살에 유용한 도말이다.
스탐은 이것 한방에 모든 것을 걸었다. 더 이상 싸우고 있다간 체력과 흑마기 둘 다 지쳐 놈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에야 모험을 하는 게 백배 나았다.
“하아압!”
몸을 구부린 블러드 오우거의 몸을 순식간에 타고 올라탄 스탐의 모습은 마치 한 마리의 들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놈의 목덜미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네놈만 죽인다면!!'
복잡한 생각들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블러드 오우거를 해치운 구국의 영웅이 된다는 웅장한 꿈에서부터 당장 단잠을 잘 수 있다는 점까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실타래처럼 엉켜있었다.
하지만 검이 닿는 순간, 그런 상념들은 깨끗이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뒤이어진 소리는 처절한 금속음이었다.
푸우욱 촤아아아아악!
막강한 예기를 머금은 카스턴은 기어코 블러드 오우거의 목을 베는 데 성공했다. 목에서 다량의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게 눈에 선하게 보였다.
‘성공이다!’
스탐이 탄성을 질렀다. 비록 목뼈가 완전히 잘려나가지 않아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지진 않았지만 생명체라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다.
"이거 먹고 지옥에나 떨어져라 빌어먹을 자식."
스탐은 비참한 꼴이 된 블러드 오우거에게 중지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는 가슴 한군데가 뻥 뚫려도 죽지 않는 괴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부스럭.
천천히 걸어가던 스탐이 걸음을 멈췄다. 페리알은 기절해 있었고, 카시안은 이제야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는 대체 뭐란 말인가?
‘설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스탐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앞에는 블러드 오우거가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버젓이 서있었다. 목뼈를 훤히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돼!”
믿을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어떻게 목을 베이고도 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스탐은 뒤이어진 블러드 오우거의 말에 더욱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크쿠쿠쿠! 네놈의 공격은 아주 강했다. 하지만 나 블러드 오우거는 목이 완전히 잘리지 않는 이상 불사신이다.”
블러드 오우거는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자신의 목을 어루만지며 만연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맙소사.”
자신이 간과했던 한 가지 사실에 스탐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아벨리오스 최강의 몬스터라 불리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건 정말이지 상식이 먹히지 않는 괴물이었다.
[진정해라 스탐!]
카스턴이 온 몸을 떨고 있는 그를 독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놈을 무슨 수로 막지?’
그것은 카스턴에게 한 질문이기도 했고,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기도 했다. 방금 전의 공격은 정말 혼신의 힘을 담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격이 수포로 돌아가다니?
하지만 스탐은 그 상념들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황급히 몸을 움직여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거대한 스파이크 클럽이 지척까지 날아왔기 때문이다.
쾅!
맨 바닥에 작렬하자 흙이 튀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스파이크 클럽이 스탐을 향해 날아왔다. 정확한 타이밍에 날아온 것이었기에 피할 틈도 없었다.
[프로즌 실드!]
카스턴의 순간적인 판단이 빛났다. 스탐의 주변에 쳐진 푸른 빛의 구가 무시무시한 쇳덩어리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앙!
하지만 6클래스의 방어 마법 프로즌 실드도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블러드 오우거의 스파이크 클럽 앞에서 단 몇 초를 못 버티고 깨져버렸기 때문이었다.
“쿨럭.”
바닥을 뒹군 스탐이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그래도 프로즌 실드가 깨지면서 튕겨나간 덕분에 목숨은 건졌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잘 다져진 고깃덩어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고통 없이 깨끗이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휘이이익
“하아.”
또 다시 날아오는 거대한 쇳덩이를 보며 스탐은 체념했다. 몸을 움직이려 아무리 애를 써도 한계에 다다른 육체는 고통에 아우성치며 뇌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운이 나빴던 걸까?'
스탐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 보면 천하의 블러드 오우거를 상대로 이만큼 분전했으니 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죽음이 임박해오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촤아아악!
한차례의 잔인한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고통은 없었다. 아마도 즉사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