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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주하는 블러드 오우거
“쿠아악!”
“음?”
하지만 뒤이어진 블러드 오우거의 괴성에 스탐은 눈을 떴다. 확실히 방금 전의 소리는 자신이 스파이크 클럽에 맞는 소리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했다. 스탐은 입술을 깨물어 보았다. 고통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분명 현실이었다.
"위대한 뱀파이어의 땅을 짓밟고도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줄 알았나? 셀리온의 추악한 오우거여."
스탐의 시선은 블러드 오우거의 앞에서 선 낯선 뱀파이어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낮은 톤이면서 블러드 오우거의 귀를 울릴 정도로 패기 있는 목소리의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스탐과 페리알, 카시안을 번갈아보았다.
"호오. 너희들, 여태까지 이놈과 싸우고 있었나?"
“당신은 누구죠?”
스탐은 사내의 질문에 오히려 반문을 했다.
"내 이름은 카라프 덴슬립이다."
"카라프?"
스탐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카라프라면 쉐도우 핸드라는 별칭을 가진, 서열2위의 히든 브레이커 마스터였다. 배틀러인 스탐이 그의 위명을 모를 리가 없었다. 캄에덴에서 가장 빠른 뱀파이어라고 알려진 그가 아니던가?
“아까 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는데 실력이 대단하더군.”
“과찬이십니다.”
스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무리 눈앞의 적이 강하더라도 명성이 높은 강자가 자신을 칭찬하자 기분이 나쁠 리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놈의 목숨은 내가 취하겠다. 가문의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이제 네 힘으로는 무리겠지?”
“좋을 대로 하십시오.”
스탐이 체념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말 대로 자신은 이제 더 이상 블러드 오우거를 쓰러뜨릴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셀리온의 우두머리 나리?”
카라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블러드 오우거를 향해 자신의 엄지를 뒤집었다. 그것은 명백한 도발이었다.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이놈!”
블러드 오우거가 괴성을 토해내며 선제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카라프는 몸을 굴려 육중한 스파이크 클럽을 간단히 피했다. 그리고는 무서운 기세로 날아들어 강력한 공격을 퍼부어대었다.
“크허어억!”
금세 거구의 붉은 괴물이 왜소한 체구의 뱀파이어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 시작했다.
“대단하군.”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스탐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비록 블러드 오우거가 크게 다친 상태이긴 하지만, 배틀러인 자신을 제압한 상대가 아닌가? 그런 놈을 카라프는 마치 어린애 다루듯 가지고 놀고 있었다. 조그만 체구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카라프의 공격은 정말 강력하고, 매서웠다.
퍼퍼퍼퍼퍽! 퍼퍼퍽!
마치 한 자루의 기관단총이 무차별로 쏘아지듯 카라프의 공격은 블러드 오우거의 전신을 가격하고 있었다. 한방 자체에서 나오는 타격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누적되어 놈을 점점 더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이놈!"
블러드 오우거가 괴성을 질렀다. 그 또한 명색이 아벨리오스 최강의 몬스터가 아닌가?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휘익 휘이이익!
두 자루의 스파이크 클럽이 바람을 가르며 카라프를 향해 날아들었다. 카라프는 특유의 신들린 듯한 움직임으로 그것들을 피해 다니면서 계속 공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도 넓은 공간을 차지하며 날아드는 스파이크 클럽을 다 피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팅!
“큭.”
무언가에 의해 바닥에 튕겨져 나간 카라프가 신음성을 흘렸다. 금세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중얼거렸다.
“과연 블러드 오우거. 스쳐 맞았는데 이 정도라니.”
“크크크. 셀리온에서 이 것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남은 놈은 없었다. 한방에 죽여주마!”
블러드 오우거가 그렇게 소리치며 덤벼들었다. 그러자 카라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띄어졌다.
“어디 그 한방을 먹일 수 있을지 기대해보지.”
샤샤샥
말을 마친 카라프가 순간 사라졌다. 그렇게 되자 상대를 하는 당사자인 블러드 오우거는 물론이고 스탐과 페리알까지 깜짝 놀랐다.
“사라진 게 아니야.”
“카시안?”
스탐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카시안이 묵묵히 서서 블러드 오우거와 카라프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궁금증이 치민 스탐이 물었다.
“무슨 소리야? 사라진 게 아니라니?”
“단순한 착시현상일 뿐이다.”
“착시현상?”
스탐은 순간 멈칫했다. 카시안의 말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같다면 카라프는 순간적으로 사라졌다고 여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는 소리가 아닌가?
“크학!”
과연 카시안의 말 대로였다. 어느새 블러드 오우거가 빠르게 움직이는 무언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얻어맞기 시작했다. 물론 놈도 사력을 다해 공격을 해 보지만 번번이 허탕만 칠뿐이었다.
퍼벅 우지끈!
그 사이 카라프의 일격이 블러드 오우거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뼈가 부러진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괴성이 땅을 진동시켰다.
“쿠아아아! 이놈! 죽이고야 말테다!”
하지만 놈의 포효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일방적이었다. 귀신같이 사라졌다가 공격을 펼치는 그의 신위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봐도 블러드 오우거가 카라프를 잡아 죽이기 전에 놈의 목숨이 끊어질 것으로 보였다.
처억.
충분한 타격을 입혔다고 여긴 듯, 카라프가 공격을 마치고 뒤로 물러났다. 얼마나 빠른지 마치 갑자기 나타난 것 같았다.
"역시 질긴 목숨이구나. 이거 한방으로 네놈의 더러운 얼굴을 단숨에 작살내주마! 으으으읍!"
말을 마친 카라프는 흑마기를 끌어올려 한손에 밀집시키기 시작했다. 하이 배틀러인 그였기에 그의 손은 금세 풀 다크 오러로 물들었다.
“이 너클 오브 디스트로이어(Nukle of Destroyer)가 목에 정면으로 꽂히고도 멀쩡한지 궁금하군."
“크으… 제길.”
“박살을 내버리세요!”
스탐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쳤다. 그만큼 그는 블러드 오우거란 존재에 대해 크나큰 한이 맺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까지 뿐이었다. 이제 놈은 히든 브레이커 마스터 카라프의 손에 죽는 것이다.
끼우우우!
그때였다. 하늘에서 갑자기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새의 울음소리로 들렸는데, 평범한 새의 울음소리가 귀가 찢어질 것처럼 강렬하진 않을 것이다.
“크크크크.”
블러드 오우거가 그 소리를 들은 직후 갑자기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카라프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죽기 전에 지어보는 마지막 웃음이냐?”
“글쎄. 일단 내 귀여운 아이들이나 보고 생각하시지.”
“뭐라고?”
순간 카라프가 하늘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한떼의 새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새라고 하기엔 너무 붉었고, 컸다. 새라기 보단 날개달린 괴물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블러드 와이번!”
그 괴조들을 보고 있던 스탐이 놀라 소리쳤다. 그도 아까전에 똑똑히 보았다. 이들로 인해 시라미아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블러드 와이번이라니? 난감하게 되었군.”
카라프의 표정이 순식간에 납빛으로 변했다. 물론 블러드 와이번의 힘 자체는 강한 게 아니었다. 배틀러의 다크 오러 앞에서는 이들의 브레스도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말이다. 까놓고 말해 카라프 혼자서도 스무 마리나 되는 이들을 모두 처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었다.
‘놈들이 블러드 오우거를 태우고 날아가면 끝장이다!’
블러드 와이번의 몸뚱이는 가히 그 주인에 비견될 정도였다. 저 정도 크기라면 능히 놈을 태우고 셀리온으로 도망갈 수 있었다.
“어서 막아!”
카라프는 그 말과 동시에 바닥에 내려앉아 제 주인을 등에 태우고 날아가려고 하는 블러드 와이번들에게 덤벼들었다.
“이크! 가자 카시안, 페리알!”
그제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스탐이 그렇게 소리치며 카라프를 뒤따랐다. 놈이 도망치는 것만큼은 필사적으로 막아야만 했다!
키이이이
화아아악.
카라프들이 오는 것을 본 일부 블러드 와이번들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리곤 금세 놈들의 입에서 시라미아의 병사들을 떼죽음 당하게 만든 블러드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트롤과 같은 중급 몬스터도 잘 부식된 먹잇감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강력했다.
"타핫!"
물론 카라프가 그런 것에 맞을 리는 없었다. 그는 히든 브레이커 특유의 빠른 몸놀림으로 블러드 브레스를 피하면서 블러드 와이번 한 마리의 눈을 쑤셨다.
쿠웨에에엑!
금세 블러드 와이번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하지만 그것은 죽기 전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카라프는 다크 오러로 넘실거리는 다크 오러로 놈의 목을 쳤다.
푸악 팍! 털썩.
두 차례의 수격(手擊)에 목이 잘린 블러드 와이번은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다. 비록 죽었지만 다크 오러까지 가미되었음에도 단번에 목을 베지 못하다니, 과연 제 주인을 닮았다.
“가자, 카스턴!”
어느새 블러드 와이번들의 지척까지 다가온 스탐이 소리쳤다. 붉은 안개가 몸을 뒤덮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은 배틀러니까.카라프가 브레스를 피한 이유는 순전히 뭐든지 일단 피하고 보는 히든 브레이커의 습관 때문이었다.
[블러드 와이번들이 주인을 태우고 도망가기 전에 놈들을 해치울 수 있을까?]
‘그런 건 생각할 필요 없어! 일단 놈들을 해치우고 보는 거야!’
카스턴의 우려에 스탐이 그렇게 대답했다. 선택사항은 없었다. 일단 블러드 와이번들부터 죽여야만 했다. 블러드 오우거 놈이 제 발로 캄에덴을 빠져 나갈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하아압!”
블러드 와이번들 사이로 뛰어든 스탐이 카스턴을 휘둘렀다. 어느새 카스턴의 검신은 마치 창처럼 기다란 형태로 변해 있었다. 블러드 와이번은 크기가 엄청나기 때문에 하이 배틀러인 카라프라면 모를까, 평범한 검의 형태로는 빨리 죽이기가 힘들었다.
키아아!
블러드 와이번이 괴성을 지르며 날개를 휘둘렀다. 평범한 와이번이었다면 코웃음부터 쳤겠지만 저들의 주인은 블러드 와이번, 쉽게 볼 수 없었다.
채앵!
카스턴으로 그 일격을 막아낸 스탐이 몸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아직 놈에겐 발톱이 남아 있었다.
“큭.”주인이 주인이니만큼, 발톱은 매서웠다. 금세 가슴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탐은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흐아압!”
푹!
카스턴이 육중한 몸뚱이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긴 비명소리와 함께 블러드 와이번 한마리가 또 죽음을 맞이했다.
퍼어억!
"아까 전에도 봤었지만 그 쇠붙이 쓸만한데? 과연 블러드 오우거를 상대할만해."
이제 막 두 마리째 블러드 와이번을 잡아낸 카라프가 감탄사를 터뜨리며 말했다. 왠지 비아냥거림이 깃든 어조였지만, 그렇다고 비난하는 건 아니었다. 이기기 위해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이놈들을 어서 해치우지 않으면 안 될 텐데요."
"나도 알아!"
스탐이 여유롭게 말을 거는 카라프를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 그들은 블러드 와이번들과 노닥거릴 시간도 없었다. 벌써 한 마리가 블러드 오우거를 태우고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