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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주하는 블러드 오우거
퍼덕 퍼덕.
“블러드 오우거를 태운 와이번이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여섯 마리 째 블러드 와이번을 처치하고 있을 무렵, 페리알이 절규하듯 외쳤다. 그 말에 스탐과 카라프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붉은 와이번이 자신과 같은 색의 오우거를 태운 채 날개를 젓기 시작했다.
“젠장!”
스탐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지금이야 천천히 오르고 있지만, 가속이 붙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오르면 잡을 길이 없었다.
타앙!
꾸웨에엑!
그때였다. 요란한 총성과 함께 블러드 오우거를 태우고 있던 와이번이 바닥에 추락했다. 누군가가 라이플건을 쏜 것이다. 물론 블러드 와이번이 총탄 한방에 쓰러질 정도로 약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명사수였다. 머리에 총알이 박혀 즉사한 것을 확인한 스탐이 환호성을 질렀다.
“좋았어, 카시안!”
“쓸만한 녀석이로군.”
카라프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하프 뱀파이어들은 다크 나이트를 제외하면 다 약자라는 것이 정설인데, 그게 지금만큼은 예외로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진 건 아니었다. 어느새 다른 와이번들이 블러드 오우거를 태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들 뭐하고 있어? 어서 막아!”
카라프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하지만 아직까지 블러드 와이번은 13마리나 남아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를 태운 놈을 죽이려면 나머지 놈들부터 처리해야만 했다.
퍼억!
키에에에!
“개자식들, 더럽게 안 죽는군!”
자신이 날린 일격에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와이번을 본 스탐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배틀러가 둘에, 하이 배틀러가 하나임에도 그들의 수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았다. 이제 여덞 마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벌써 태반이상을 죽였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벌써 블러드 오우거가 떠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빌어먹을, 큰일이다!”
"크크큭. 멍청한 놈들. 네놈들은 날 죽일 수 없다!
자신들을 조롱하는 블러드 오우거의 목소리가 그렇게 얄미워 보일수가 없었다. 스탐이 대뜸 카시안에게 외쳤다.
“쏴!”
탕!
블러드 오우거쪽을 겨냥해 쏜 총탄에 머리를 맞은 블러드 와이번 한 마리가 순식간에 꼬꾸라졌다. 순간 스탐과 카라프, 페리알의 얼굴이 환해졌다. 처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번에 블러드 오우거가 다시 떨어진다면 충분히 목을 벨 수 있었다. 블러드 와이번 일곱 마리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들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아니, 이럴수가?!”
스탐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놀랍게도 블러드 오우거는 서서히 하늘을 오르고 있었다. 밑에 있는 와이번과 함께!
정황은 이랬다. 카시안이 쏘아 맞춘 건 블러드 오우거를 태운 놈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던 놈이었는데, 겹쳐 보여서 착각한 것이었다. 관찰력이 뛰어난 카라프마저 착각할 정도였으니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철썩.
카시안은 라이플 건을 집어던졌다. 라이플건은 워낙 재장전시간이 길기 때문에 다시 쏠 때가 되면 이미 늦었을 것이리라.
"제기랄. 내가 날개만 가질 수 있다면! 아니, 적어도 투척무기만 있었어도 놈을 죽일 수 있을 텐데!"
카라프가 땅을 치며 절규했다. 이제 셀리온의 패자를 실은 붉은 와이번들은 서서히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뱀파이어들의 힘이 닿지 않는 상공으로.
"투척무기?"
카라프의 말을 듣고 있던 스탐이 카스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공격형 흑마술과 투척무기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흑마술의 경우 다크 매지션같은 전문가가 아니면 그 정확도나 파괴력에 한계가 있지만, 투척무기의 경우엔 사용자의 흑마기를 버텨낼만한 무기만 있다면 누구나 다 쓸 수 있었다. 카스턴은 그 모든 조건을 만족하고 있었다.
"이건 기회다."
점점 멀어지고 있던 블러드 와이번의 무리를 바라보던 스탐이 카스턴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어느새 카스턴은 그의 의지에 따라 투척하기에 알맞은 부메랑의 형태로 변해있었다.
[좋아. 어서 던져라. 네 다크 오러와 내 마법이 융합된다면 분명 가능한 일이다.]
“알았어.”
둘 간의 대화가 끝나는 것은 찰나였다. 스탐은 자신이 가진 모든 다크 오러를 쥐어짜 카스턴에게 집약시켰다.
웅웅웅.
깨끗한 물에 먹물을 부은 듯, 냉기 어린 백색의 검신을 띄고 있던 카스턴은 어느새 다크 오러의 검은 빛에 휩싸였다.
“음? 뭐하려는 건가?”
스탐에게로 고개를 돌린 카라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그는 금세 스탐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히든 브레이커 특유의 직감으로. 카시안과 페리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스탐이 하는 것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좋았어. 간다!”
체내의 모든 흑마기가 고갈된 것을 확인한 스탐은 곧장 카스턴을 집어던졌다.
휘릭 휘릭 휘릭!
아직까지 블러드 오우거의 무게가 무게라 높이 날아오른 상태가 아니었기에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고 있는 카스턴의 경로는 정확했다!
“맞아라, 맞아라!”
카스턴이 블러드 오우거의 지척까지 다다르자 스탐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놈은 카스턴의 이동경로에 정확히 걸려 있었다. 다크 오러를 머금었기에 안심하고 있을 놈을 두 동강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제 몇 초만 있으면 스탐은 블러드 오우거 슬레이어가 될 것이다.
키이이익!
하지만 블러드 와이번의 충성심과 영리함은 자신의 주인을 살리고야 말았다. 위기의식을 느낀 놈은 순간적으로 몸을 비틀더니 자신이 태우고 있던 블러드 오우거를 떨어뜨렸다.
촤자자작!
카스턴은 놈을 일도양단했다. 만약 블러드 오우거가 타고 있었더라면 놈도 같이 몸이 두 동강 났을 것이다. 하지만 공중에서 한참을 추락하던 놈은 다른 와이번에 의해 재 탑승되었다. 잠시 동안 주인의 낙하에 의해 배가된 무게에 짓눌려 있던 놈은 천천히 상공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
쿠우웅!
지켜보던 모든 이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충성스러운 블러드 와이번 한 마리의 시체뿐이었다. 스탐이 날렸던 카스턴은 힘을 잃고 내려오더니 땅위에 깊숙하게 꽂혔다.
"말도 안돼!"
무릎을 꿇은 스탐이 땅을 치며 통곡했다. 세상이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어디 있을까?
다른 이들도 아쉽긴 마찬가지였다. 카라프는 연신 하늘만 쳐다보았고, 카시안은 나무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페리알은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있었다.
“이건 말도 안돼! 저 빌어먹을 와이번 새끼가 어째서 저 따위 짓을 하냐고? 말도안…커헉… 으헉… 제길, 으으……."
한참 욕설을 퍼붓던 스탐은 갑자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쓰러지고야 말았다. 그러자 카시안이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그전에 카라프가 손을 내밀었다.
"안심해라. 이 녀석은 단순한 오버 오러(Over aura)현상에 걸려서 기절한 것뿐이니까. 곧 흑마기를 주입해 줄거니 잠시 후면 깨어날 거다."
말을 마친 그는 스탐의 배에 손을 얹었다. 오버 오러란 뱀파이어가 무리한 흑마기의 사용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뱀파이어에게 있어서 흑마기는 생명과도 같은데, 체내의 흑마기가 원래의 10%이하를 몇 분 이상 유지하면 열에 아홉은 죽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현상을 해결하기 위한 기술이 바로 지금 카라프가 쓰고 있는 기빙 오러(Giving aura)였다.
"그럼 난 가보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스탐에게서 손을 떼어낸 카라프가 그 말을 끝으로 어디 론가로 사라졌다. 카시안과 페리알은 조용히 그의 뒷모습만을 지켜보았다. 서열 2위의 히든 브레이커라는 위명을 가진 그였지만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힘없어 보였다.
시라미아 앞의 대평원에서 벌어진 캄에덴군과 몬스터들 간의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러 있었다. 살아있는 몬스터들의 수를 죽은 몬스터들의 수가 압도한지도 오래였다. 블러드 오우거가 전장을 이탈한 직후, 우두머리를 잃은 몬스터들은 급속도로 무너진 것이다.
하지만 시라미아 내부에서의 전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쿠웅! 쿵!
“성주님! 몬스터들이 성문을 치기 시작합니다!”
“휴우.”
한 병사가 다급한 외침에 에스프리안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몸에는 오랜 격전에 의해 온갖 상처가 나있었지만, 지금은 육체보다는 정신이 더 지쳐있었다.
“성벽위의 병사들을 모조리 이곳으로 집합시켜라.”
“아, 알겠습니다.”
성벽위로 달려가고 있는 병사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에스프리안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도대체 얼마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단 말이야.”
사실 그는 지금 살아있다는 것 자체도 신기해 할 정도였다. 게이트 실드를 동반해 단단하기 그지없는 다크 포트리스의 외성문을 깨뜨린 몬스터들의 물결은 어느새 내성문까지 다다랐다. 몬스터들의 엄청난 기세로 볼 때 내성문이 깨지는 순간 자신들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휴우.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원.”
시로스가 답답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몬스터들과 싸우기도 바쁜 그들에게 아군이 구원을 온 것을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캄에덴군이 한참 전에 몬스터들을 제압한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쿵! 쿠웅!
어느새 성문에 구멍이 뚫렸다. 에스프리안은 두 주먹을 꾸욱 쥐며 그곳을 주시했다. 이제 저 성문만 뚫리면 시라미아는 함락이다. 하지만 자신은 성주답게 끝까지 이곳을 지키다 죽을 것이다. 브롬바르트의 성주가 그랬던 것처럼.
쿠웅!
결국 성문은 부서졌다. 바닥에 엎어져 굉음을 내는 성문을 밟고 일단의 군대가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니!?”
에스프리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랍게도 그들은 몬스터들이 아니었다. 바로 아군 뱀파이어들이었다.
“당신들은 1전단… 바크님!”
뱀파이어의 갑옷에 새겨진 숫자를 보고 그렇게 말하려던 에스프리안이 선두에서 걸어오고 있는 사내를 보고 소리쳤다.
“후후후. 대단하구나, 에스프리안. 이 곳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다니 말이야.”
바크가 쓴웃음을 지으며 쥐고 있던 오크의 머리통을 내밀었다. “몬스터들은 다 처치했다. 우리 캄에덴의 정예군들이 다 쓸어버렸지. 아직 상당수가 남아있긴 하지만, 오늘 아니면 이틀 내로 다 처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군요.”
바크의 부연설명에 에스프리안은 그제서야 모든 것을 이해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쟁이 끝났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린 것이다. 바크가 그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용케도 지금까지 버텼구나.”
“뱀파이어 로드께서 제때에 병사들을 데리고 온 덕분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저희도 브롬바르트와 같은 운명이었을 겁니다.”
“그렇겠군.”
바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1전단이 주둔한 브롬바르트는 버티지 못했고, 하프 뱀파이어들로만 이루어진 시라미아는 버텼다.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결론적으로 바크의 자존심에는 큰 상흔이 남게 되었다.
“그나저나…바크님의 1전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조만간 대대적인 전단의 재편성이 이루어질 거야. 불문율을 어길 순 없을 테니까.”
에스프리안의 질문에 바크가 그렇게 대꾸했다. 1전단의 병사들 중 절반은 반드시 서열 1만 위 이내에 들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언제부턴가 굳혀진 캄에덴군의 불문율이었다. 재편성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는데, 1전단의 재편성은 곧 뱀파이어 정규군 전체의 재편성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1전단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제 모습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저벅 저벅 저벅
그때 누군가가 바크와 에스프리안에게로 걸어왔다. 그는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둘 앞에 나타나고 나서야 발견했을 정도로 은밀했는데, 바크는 상대가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디를 갔다 온 거냐, 카라프? 한참 전장을 돌아다녀도 보이지 않던데 말이야.”
바크가 궁금하다는 어조로 자신의 눈앞에서 걸음을 멈춘 카라프에게 물어왔다. 카라프는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블러드 오우거를 추격하다 왔습니다.”
“호오 그래? 그러면 잡았나? 아니,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실패한 것 같군.”
“잘 아시는군요. 그나저나 몬스터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다 잡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블러드 오우거를 못 잡았으니 우리는 의미 없는 희생만 치른 셈이지.”
“네.”
카라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죽은 자들의 피가 증발된 듯.
드디어 전쟁은 끝났다. 훗날 '블러드 워(Blood War)'라고 명명된 이 전쟁은 난공불락의 브롬바르트가 함락했다는 점에서부터 플로센이라는 한 지방이 거의 사라질 정도로 수많은 희생자를 낳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쟁의 원흉인 블러드 오우거가 살아서 셀리온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 이 전쟁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혼신의 노력을 쏟았지만 결국 블러드 오우거를 쓰러뜨리는데 실패한 스탐은 종전 후 어디 론가로 사라졌다. 지온은 버서커 내에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고, 카시안은 쉐도우 스나이퍼들 사이에서 점차 적응했다. 크로뎀은 1전단이 임시로 해체 되자 살아남은 뱀파이어들과 함께 폐허가 된 베르크 가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힘썼다. 그렇게 수많은 캄에덴인들이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와중에 100여년이라는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