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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캄에덴 카오틱 무투대회
[K.C. 4418년 1월 1일]
“자자, 날마다 오는 게 아닙니다. 트롤의 피를 팝니다! 순수 100%의 피입니다!”
“여기들 보세요! 각종 장신구를 싸게 팝니다! 세련된 디자인이니 한번 보시고 가세요!”
거리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노점상들은 물건을 팔고 있었고 행인들은 그들의 물건을 눈요기하며 지나가고 있었다.
놀랍게도 거리에는 뱀파이어와 하프 뱀파이어들이 함께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로 밤과 낮에 주로 활동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저벅 저벅
한 사내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누더기라고 봐도 무방한 옷가지로 몸 전체를 뒤덮은 채 대로 정중앙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뱀파이어로 보였는데, 뱀파이어치고는 만만하게 보일 정도로 몸집이 작은 편이었다. 하지만 주변의 뱀파이어들은 결코 그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내뿜는 기운에 제 스스로 피해가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인가보군.”
주변을 둘러보던 사내가 새까만 후드를 벗었다. 그러면서 얼굴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정체는 바로 100년 전에 사라진 스탐이었다.
오늘은 바로 무투대회를 개최하는 날이었다. 물론 캄에덴의 무투대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치러진다. 하지만 이 대회는 특별했다.
캄에덴 카오틱 무투대회!
무수히 많은 무투대회가 있지만 뱀파이어 로드가 친히 주관하는 이 대회는 캄에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대회였다. 오죽하면 300년에 한번씩 치러지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대회는 예선전부터 치열했다. 서열만 위권 이내의 뱀파이어들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종래에는 단 32명의 본선 진출자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바로 대회의 첫 시합이 있는 날이었다. 아마 모두들 우승을 하기 위해 수련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왜냐면 우승자에겐 엄청난 포상금과 함께 뱀파이어 로드와 1:1로 시합을 치를 수 있다는 영예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대회에 참가하는 32명의 진출자들은 몇 강까지 진출하느냐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이를테면 서열의 재정립인 것이다.
“대단하긴 대단하군 그래. 이 정도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다니 말이야.”
캄에덴의 사회에서 다수의 뱀파이어와 하프 뱀파이어가 함께 활동하는 건 무척 드문 일이었기에 스탐으로선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수도라면 이런 일이 가끔씩 있을 수는 있겠지만 이곳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카오틱 무투대회 전용 대회장이었다. 평소엔 개미새끼 한 마리도 잘 보이지 않던 곳이 대회를 관람하기 위해 온 캄에덴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이었다.
“자, 그럼 어서 가볼까?”
스탐의 입가에 미소가 배였다. 그는 카오틱 무투대회의 본선에 진출한 32인의 뱀파이어들 중 한명이었다. 제 시간이 도착하지 않으면 실격처리가 되버리기 때문에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툭!
그때였다. 한참 뛰어가던 스탐이 누군가와 어깨를 부딪쳤다. 서로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뱀파이어는 한번 눈 마주쳤다고 싸움을 거는 족속들이다.
“지금 시비건 거냐?”
“누가 시비를 걸었다고 그래?”
스탐은 상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누더기차림이었는데 은연중에 풍겨오는 기운으로 보아 결코 만만해 보이진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스탐은 그를 자신과 동급으로 여기고 있었다.
‘옷이 저 모양인 이유는 그만큼 혹독한 수련을 했다는 증거겠지.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너 내가 누군지 알아? 난 이번 대회에 출전할 32명중 한명이라고."
상대는 마치 스탐이 같잖아 보인다는 어조로 말했다. 하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금세 주위를 지나가고 있던 행인들의 시선이 이곳에 집중되었으니까 말이다. 스탐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또한 32명중 한명이다.”
"그래? 그럼 잘됐군. 들어가서 싸울 필요 없이 여기서 끝장을 내자."
"바라던 바다."
이윽고 둘 사이에서 강력한 힘의 기류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지켜보던 구경꾼들이 까무러칠 정도였다.
"좋아. 그럼 한판 붙어볼까?"
"일단 붙기 전에 서로가 누군지 밝히는 게 어때?"
“뭐, 나쁠 건 없지.”
말을 마친 상대가 입고 있던 누더기 옷을 벗어 던졌다. 그러자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났다. 고생이 찌든 흔적이 가득 하지만 유약해 보이는 외모, 무엇이든지 빨아들일 것만 같아 보이는 까만 두 눈. 스탐은 그와 구면이었다.
“정확히 158년만이군. 정말 오랜만이다. 카이사르."
“푸훗, 기억력 좋네?"
"누구 친군데?"
스탐은 그렇게 반문한 뒤 카이사르와 포옹을 하면서 재회의 기쁨을 맞이했다. 한판 붙자는 말의 속뜻은 이런 뜻이었을까? 아무튼 스탐은 무척 기뻤다. 캄에덴 곳곳을 수소문해도 못 찾아냈던 녀석이 아닌가?
그들은 서로를 응시했다. 아마 둘 다 할말이 많을 것이다. 특히 스탐은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다.
‘이 녀석, 도대체 여태껏 뭐하고 있었던 거지?’
생각 같아선 이 자리에서 당장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일단 대회장에 들어가자. 시간이 없어.”
“응.”
300년 만에 열리는 대회에 실격당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스탐과 카이사르는 사력을 다해서 뛰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섬광이 지나가는 것처럼 빠른 속도로 당도했다. 마침 대회장의 문은 닫히기 몇 초전이었다. 저게 닫히면 그들은 자동으로 실격패가 될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스탐과 카이사르는 가까스로 문이 닫히기 전에 대회장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만약 조심만 늦었다면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했을 것이다. 카오틱 무투대회의 역사상 실격패는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
뚜벅 뚜벅
안내원의 안내에 따라 대회장을 한참 걸어가던 그들은 드디어 대회의 본선 진출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 도착했다.
“흐음.”
스탐이 한데 모여 있는 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최고의 실력자들이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인물은 단 한명밖에 없었다.
“지온?”
"호오? 네놈이 진짜 본선까지 진출할 줄은 몰랐다 스탐 베르크. 큭큭크."
스탐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에는 과연 거구의 버서커. 데스페라도라 불리는 지온이 서 있었다.
스탐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벌써 버서커의 서브 마스터(Sub Master)가 되었으며 하이 배틀러의 경지에 올라 서열 6위에 자리매김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카오틱 무투대회에서는 서열 6위이내의 뱀파이어는 참가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다. 서열5위부터 1위까지의 뱀파이어는 오대패자라 불리는 실세들이었기에, 그들은 단순히 관전만 하는 것이다. 결국 지온은 이 대회의 유력한 우승후보인 셈이다.
‘반드시 네놈을 이겨주마.’
스탐이 이를 자근자근 씹으며 다짐했다. 그는 지금껏 지온에게 두 번 싸워서 두 번 모두 졌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닐 것이다. 놈이 결승전에 오르는 것이 확정적인 만큼 반드시 싸워서 이길 것이다. 물론 다른 진출자들이 만만한건 아니었지만, 스탐은 다른 이들만큼은 모두 이길만한 능력이 있었다.
“크크크. 그런데 넌 누구지?”
지온의 시선은 금세 카이사르에게로 갔다. 아무래도 카이사르를 알아보지는 못하는 듯했다. 사실, 무를 추구하는 전형적인 뱀파이어인 지온이 당시 약골에 불과했던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섭섭한데, 나를 잊어 먹다니 말이야.”
카이사르는 예전과는 달리 지온에게 반말로 말했다. 지온은 한참 그를 훑어보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제서야 기억이 난다는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단 시절의 약골 뱀파이어로군 그래. 그런데 네놈이 어떻게 여기에 올 정도로 강해진 거지?"
지온의 비아냥거림은 스탐으로서도 궁금한 점이었다. 소년단 시절의 카이사르는 스탐과는 정반대로 약골로 이름을 날린 몸이었다. 그런 그가 치열한 예선전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 자리에 왔다.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