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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캄에덴 카오틱 무투대회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카이사르는 의미심장한 어조로 말했다. 스탐은 그가 왠지 예전과는 달라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빼놓을 건가?"
그때 한명의 사내가 다가왔다. 은회색의 머리칼에 한줌의 감정도 없어 보이는 눈동자를 가진 엘프. 스탐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카시안. 너도 본선진출자중 한명이야?"
"물론."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얘는 누구야 스탐?"
카이사르가 호기심어린 얼굴로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서로 초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은 스탐이 금세 둘을 소개했다.
"얘는 엘프계 하프 뱀파이어인 카시안이라고 해. 쉐도우 스나이퍼의 일원이지. 그리고 카시안, 얘는 카이사르야. 소년단시절의 절친한 친구지."
스탐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카이사르가 미소를 띤 얼굴로 먼저 손을 건네었다.
“카이사르라고 해. 만나서 반갑다."
“카시안이다."
둘은 저마다 한 마디씩 하며 악수를 했다.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둘은 한동안 서로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어이 어이, 날 빼놓으면 섭섭하지.”
“아, 다이어! 너도 있었군 그래.”
스탐이 환한 얼굴로 다이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하프 뱀파이어임에도 불구하고 100년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프 뱀파이어는 출신 종족일 때보다 수명이 더 늘어난다고 했지. 더군다나 다이어는 소드 마스터니까…….’
다이어는 비록 흑마기와 다크 오러를 사용하긴 하지만 검을 쓴다는 점 때문에 배틀러라기보단 소드 마스터에 가까웠다.
뱀파이어는 해당사항이 되지 않지만 인간은 소드 마스터가 되면 수명이 는다고 했다. 더군다나 다이어는 하프 뱀파이어였던 탓에 두 가지가 중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100년의 세월에도 모습이 변하지 않은 게 이상할 건 없었다.
“모두들 인사해. 다크 나이트의 다이어야.”
스탐의 소개에 다이어는 카이사르, 카시안과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지온의 앞에선 침묵만 흐를 뿐이었다.
“크크큭, 다크 나이트의 반쪽짜리 애송이로군. 잘 있었냐?”
“…….”
다이어는 말없이 지온을 노려볼 뿐이었다. 지온의 말로 보아 둘은 마치 구면인 것 같아 보였다.
‘하긴, 둘이 속한 특수부대는 철저히 상극이지.’
캄에덴의 특수부대는 그 희귀성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하다. 그래서 상위권의 전투력을 가진 히든 브레이커, 다크 나이트, 버서커 이 셋은 서로를 원수처럼 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지온에겐 천적이 있지.’
미소를 띤 스탐이 뜬금없이 카시안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이유는 장난기가 발동해서였다.
“그런데 카시안. 너 혼자 왔냐?"
"아니. 덩치 큰 근육덩어리랑 같이 왔지."
예상대로 카시안은 지온에게 도발을 걸었다.
"누가 덩치 큰 근육덩어리라는 거냐?"
발끈한 지온이 카시안에게 눈을 부라렸다. 가히 산천초목이 떨 정도의 살기였다. 하지만 카시안은 아무런 동요 없이 여전히 그의 심경을 자극했다.
"너 말고 누가 있나. 뇌까지 가득 찬 근육덩어리."
휘아악
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지온의 팔이 카시안에게 쇄도했다. 웬만한 상대는 단번에 작살낼 파괴력을 가진 일격이었다.
“흥.”
더 놀라운 쪽은 카시안이었다. 카시안은 그 일격을 피했다. 그것도 아주 여유롭게 말이다. 단순히 첫 일격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서 휘둘러대는 지온의 공세를 그는 자로 잰 듯한 움직임으로 피하고 있었다. 보고 있던 카이사르가 탄성을 질렀다.
"이야, 지온의 공격을 저렇게 깨끗하게 피하다니? 카시안이라는 녀석. 정말 빠른데?"
비단 카이사르뿐만이 아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머지 뱀파이어들도 천하의 지온이 펼치는 공세 속에서 단 한방도 허용하지 않는 카시안의 몸놀림에 혀를 내둘렀다.
짝짝짝.
난데없이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캄에덴의 쟁쟁한 실력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박수를 칠 만큼 간 큰 인물은 그보다 높은 서열의 인물밖에 없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과연 그곳에는 이 대회의 주관자, 뱀파이어 로드가 서 있었다.
“역시 대단한걸. 서열6위의 유력한 우승후보 '데스페라도' 지온 스트라이드. 그리고 엘븐 스나이퍼 출신의 '쉐도우 스나이퍼' 카시안 류카슬리라. 간만에 좋은 구경했다. 물론 조금 있으면 더 재밌는 구경을 할 테지만 말이야.”
“로드를 뵙습니다.”
지온을 비롯한 모든 뱀파이어들이 무릎을 꿇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바로 캄에덴의 절대자였으니까.
“기다리고 있느라고 수고했다. 그럼 이제 날 따라 오도록.”
출전자들은 주저 없이 아이슬로너의 뒤를 따랐다. 그들도 얼른 경기를 치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기 때문에 걸음은 무척 빨랐다.
“자, 어서 이 안에 있는 구슬을 하나씩 집어라.”
얼마나 걸었을까. 아이슬로너의 말에 뱀파이어들은 그가 가리킨 곳을 향해 다가갔다. 거기에는 고풍스러운 석상위에 아나만디움으로 이루어진 상자가 하나 있었는데, 윗부분에는 손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구멍이 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카오틱 무투대회의 전통적인 제비뽑기 방식이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32개의 구슬중 하나를 꺼내 대회를 치를 때의 번호를 지정받는 것이다.
‘과연 몇 번이 걸릴까?’
스탐은 자신의 차례가 되자 괜스레 흥분되었다. 몇 번이 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상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결승전까지 만만한 놈이 나올 수도 있지만, 재수 없으면 첫 상대가 지온이 될 수도 있었다.
‘1번?’
[네가 첫 타자로군 그래.]
‘나쁘진 않군.’
스탐은 1이라는 숫자가 선명히 새겨져 있는 구슬을 만지작거리면서 대진표 담당자에게 구슬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걸린 숫자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다른 종족들도 다 그럴지 모르겠지만, 1이라는 숫자는 뱀파이어들이 가장 선호하는 숫자였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넘버 원! 후후. 내가 우승할 거라는 벨리우드의 계시일지도 모르겠군.’
물론 그것은 경기를 치러봐야 하는 일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제비뽑기는 금방 끝났다. 대진표 담당자는 출전자들이 주는 구슬을 확인하며 들고 있는 대진표의 토너먼트 번호판 밑에 이름을 다 채운 뒤 어디 론가로 사라졌다.
제비뽑기가 끝나자 아이슬로너의 패기 있는 목소리가 출전자들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경기는 3시간 후에 시작된다. 그때까지 쉬고 있도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예전의 일을 떠올려 보는 거지.”
카스턴의 질문에 스탐이 대수로운 어조로 대꾸했다. 분명 자신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서 그런 뻔한 질문을 하다니. 어지간히도 심심했나 보다.
[예전의 일이라곤 해도 전생의 일이 아니냐.]
“…….”
스탐이 안색을 굳혔다. 카스턴은 100여 년 동안 함께 하면서 자신에 대한 비밀을 거의 다 알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지구라는 별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서부터, 뱀파이어로 환생해 살아온 세월까지 말이다. 타인에게 비밀이 낯낯이 파헤쳐지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스탐은 그러려니 했다. 사실 카스턴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으니까.
[너 정말, 그 세현이라는 여자가 아벨리오스에서 환생할 거라고 믿고 있냐?]
“물론.”
스탐이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세현을 생각하고 있었다. 뱀파이어로 환생한지 벌써 200년이 넘게 지나 친구들과 가족들에 대한 기억을 잊은 지 오래였지만, 그녀의 모습은 아직도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스탐이 뱀파이어 살아가는 당위성으로 굳혀진지 오래였다.
‘운명이란 게 존재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는 세현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 있었다. 인간은 물론이고 숙적인 엘프나 드워프, 심지어는 오크나 트롤로 환생하더라도 그녀라는 게 밝혀지면 기꺼이 못 다한 사랑을 바칠 것이다. 물론 어떻게 밝혀낼 수 있느냐가 문제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