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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캄에덴 카오틱 무투대회
“세상에.”
“저럴 수가.”
상상도 못한 상황에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던의 승리를 의심치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투를 벌인지 1분 도채 되지 않아 패배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도 일찍 끝난 개막전의 승자는 스탐 베르크입니다!"
관중들과 마찬가지로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사회자가 그렇게 외쳤다. 그러자 잠잠하던 관중석이 이내 함성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네가 최고다!”
“대단한데, 저 녀석!”
“훗.”
스탐은 관중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유유히 선수석으로 갔다. 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미소를 가지고. 선수석의 뱀파이어들은 대부분이 일어나 있었다. 그들도 그만큼 놀란 것이리라.
"이야, 예상은 했었지만, 정말 강해졌구나. 스탐."
옆에 앉아있던 카이사르가 환하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하지만 스탐은 손을 치우며 카이사르에게 날카롭게 쏘아붙일 뿐이었다.
"미안하지만,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우린 적이야."
“아, 그렇지.”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예전 같았으면 겁을 집어먹었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너 많이 변했다.”
“그래?”
“예전에 내가 알고 있던 녀석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야.”
스탐은 소년단 시절, 유난히 겁이 많고 유약한 소년을 떠올렸다. 그때의 카이사르와 지금의 카이사르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도대체 그간의 세월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바뀐 건 성격뿐만이 아니야.”
“그렇겠지.”
스탐은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느새 다음 경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캄에덴에서 가장 거대한 축제. 카오틱 무투대회는 딱 한 달 동안 경기가 진행된다. 날자가 지날수록 경기 수는 점점 줄어들어 마지막 주에는 결승전과 명예 대결을 하루에 한판씩 치르게 된다. 하지만 오늘은 개막 첫날이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네, 다음 경기는 크로뎀 베르크와 쥬디앙 크로이스의 대결이 있겠습니다!”
“녀석의 차례군.”
스탐의 시선은 크로뎀에게 가있었다. 그는 선수석에서 일어나 쥬리앙이라 불린 뱀파이어와 나란히 경기장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스탐은 쥬디앙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300대 후반의 노련한 실력자인 그는 중급의 배틀러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상급의 배틀러인 이 자리에 올랐다. 전투경험으로 경지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다. 사실 더 의문스러운 쪽은 크로뎀이었다. 100년 전만 해도 그는 배틀러도 아니었던 몸이 아니던가.
“이런 곳에서 싸우게 되어 영광입니다 쥬디앙님.”
크로뎀은 쥬디앙과 경기장 위에서 서자마자 예를 표했다. 그만큼 쥬디앙의 명성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잘 부탁하네. 크로뎀.”
“그럼, 경기 시작!”
사회자의 외침이 시발점이었을까. 방금 전만 해도 신사 마냥 예를 취하고 있던 그들의 눈은 어느새 홍염이 타오르는 듯한 전사의 눈길로 변모되었다.
스탐과 던의 대결과 마찬가지로, 둘은 섣불리 싸우지 않고 탐색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탐색전은 단순한 눈과의 눈의 대결이면서도 전투의 승패를 결정지을 정도로 치열한 기세싸움이다. 어느 한쪽의 빈틈이 보이는 순간 바로 승패가 결정지어지는 경우도 허다했다.
“흐압!”
공격을 먼저 시작한 쪽은 혈기왕성한 크로뎀이었다. 곧장 그에게서 비수와 같은 권격이 쏟아져 나갔다.
쾅!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대지가 요동쳤다. 관중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두 배틀러들의 대결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어림없다!”
쥬디앙은 자신에게 엄습해온 크로뎀의 공격을 침착하게 막아내었다. 노련함 하나로 서열 50위권 안까지 들어온 그였기에 그의 몸에는 이렇다할 상처조차도 나지 않았다.
“이번에 내 차례네 크로뎀!”
공세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자 쥬디앙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섭게 크로뎀을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이동경로에만 확실히 파고들어가는 그의 공격은 마치 한 마리의 뱀과 같았다.
하지만 크로뎀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절제되었으면서도 효율적인 움직임으로 쥬디앙의 공격을 열심히 피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엔가 반격을 날렸다.
퍼벅!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둘의 몸이 동시에 떠올랐다. 동시에 크로스 카운터를 주고받은 것이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물론이지요.”
한방씩 얻어맞았음에도 둘은 금세 자세를 잡으며 서로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아!”
관중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공수전환이 물 흐르듯 자유로운 둘의 대결은 마치 한 차례의 춤사위를 보는 듯했다.
“흐으읍!”
갑자기 크로뎀의 몸 전체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크로뎀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쥬디앙의 몸 근처에서도 흑연이 솟아났다.
“자네가 아무리 베르크 가에서 배출한 천재라도 노련한 나를 이길 순 없을 거야.”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전장에서 갈고 닦은 쥬디앙 크로이스라도 저를 이길 순 없습니다.”
말을 마친 크로뎀이 흑마기를 더욱 더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 주변에 어른거리는 다크 오러의 색이 점점 진해지기 시작했다.
“사, 상급 배틀러!?”
쥬디앙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고 있던 관객들도 깜짝 놀라고 있었다.
“역시 그랬었군.”
스탐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대회 본선에 진출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그 궁금증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상급 배틀러는 캄에덴 전역에서도 30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대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제 아셨겠죠, 저와 당신의 차이를?”
크로뎀이 차갑게 웃었다. 중급 배틀러는 상급 배틀러를 이길 수 없다. 그건 상식이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다!”
쥬디앙이 그렇게 외치며 손을 뻗었다. 검은 수강이 사신의 낫처럼 크로뎀에게 쇄도했다.
퍼어어억!
아까전과는 비교도 할 수없을 정도로 육중한 격발음이 터져나왔다. 당연할 것이다. 힘의 결정체, 다크 오러의 대결이니까. 하지만 정면대결의 결과는 뻔했다.
“커헉.”
금세 쥬디앙이 뒤로 나가떨어져 형편없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멍청이.”
스탐은 그런 그를 비웃었다. 흑마기라면 모를까, 배틀러들의 정면대결은 무조건 다크 오러가 강력한 놈이 장땡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덤벼든 이유는 순전히 자존심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그 상황에서라면 그 방법을 선택하겠지만 말이야.”
스탐이 쓰러진 채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쥬디앙을 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뱀파이어는 자존심으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쥬디앙 선수가 기절했군요. 그러므로 이번경기의 승자는 참가번호 6번 크로뎀 베르크 선수의 승리입니다!"
"와아아아!"
전투가 예상외로 빠르고,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관중들의 함성은 여전히 쩌렁쩌렁했다. 새로운 신예의 등장을 환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자, 조심해서 가시죠.”
싸움에서 이기긴 했지만, 크로뎀은 패배자에겐 관대했다. 그는 일어날 힘도 없어 보이는 쥬디앙을 천천히 부축하면서 선수석으로 갔다.
“자네 참 대단하네. 그 나이에 벌써 상급 배틀러라니? 어쩌면 뱀파이어 로드가 될지도 모르겠군.”
쥬디앙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100년 만에 배틀러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모자라 상급 배틀러가 된다는 것은 정말 타고난 재능의 결과니 말이다. 크로뎀이 웃었다.
“하하하.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전에 전 반드시 쓰러뜨려야 할 사내가 있습니다.”
“음.”
스탐은 자신을 매서운 눈길로 쳐다보는 쥬디앙을 보고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에는 단호한 의지가 배여 있었다.
[저 녀석, 널 죽일 생각인가본데.]
‘흥, 능력이 있다면 죽이라고 해. 어차피 녀석과는 반드시 한번 싸울 생각이었으니까.’
스탐이 두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이지만 인정을 베풀 생각은 없었다.
이윽고, 경기장 앞에 놓인 거대한 토너먼트 대진표에 크로뎀의 이름 바로 위의 굵은 선이 16강까지 올라왔다. 스탐의 다음 상대는 크로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