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72화 (7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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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형제

캄에덴력 4421년 1월의 첫째 주는 실로 치열한 혈투의 장이었다. 단 일주일동안 무려 16차례의 경기가 펼쳐졌으니 말이다. 스탐은 32강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는 날에서 그동안 급성장한 카시안과 지온의 무위를 구경할 수 있었다.

“너무 둔하군.”

카시안은 자신의 화살에 온몸이 고슴도치가 된 뱀파이어의 공격을 간단하게 피했다. 그리곤 스틸레토로 그의 허리를 베었다.

“커헉!”

그것으로 끝이었다. 뱀파이어는 입에서 피를 뿜어내며 타들어가는 종이조각 마냥 서서히 쓰러져갔다. 불과 3분에 걸친 대결의 결과는 카시안의 완승이었다.

"가르시온 선수! 아, 이미 기절해버렸군요. 이렇게 32강 12번째 경기의 승리자는 카시안 선수의 승리입니다!"

"와아아!"

"흥."

카시안은 관중들의 환호성에 대한 대답을 콧방귀로 표현한 뒤 대회장을 내려왔다. 총집에는 라이플 건이 달려 있었지만 경기는 그것을 굳이 사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허무하게 끝났다.

스윽

카시안이 갑자기 라이플 건을 선수석을 향해 겨누었다. 일순간 좌중이 침묵했다. 쉐도우 스나이퍼의 주무기인 라이플 건의 위력은 엄청나다고 알려져 있었기에 선수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크크큭.”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여유롭게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서열 6위로 부동의 우승후보인 지온이었다. 그러고 보면 카시안이 겨누고 있는 대상은 그인 것이다.

“다음 경기에서 패해 대회장을 빠져나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라.”

듣고 있던 다른 선수들이 경악하고 있었다. 카시안은 지금 도발을 걸고 있었다. 그것도 오대패자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하이 배틀러라고 알려진 괴물에게!

“큭큭크, 그럴 생각은 절대 없으니 안심해라.”

그 말에 카시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라이플 건을 다시 총집에 꽂아 넣었다. 그와 동시에 지온이 선수석에서 일어섰다.

“그럼 어디 몸 좀 풀어 볼까?”

지온이 자신의 첫 상대에게 시선을 옮기며 히죽 웃었다. 그러자 그가 사시나무 떨 듯 부르르 떨었다.

‘하필이면 이런 괴물을 만나다니!’

사실상 그는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다. 참 재수도 없는 녀석이었다. 서열 32위면 캄에덴에서 손꼽히는 강자였지만 눈앞의 괴물 앞에선 그런 데이터도 부질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발악은 할 테다!’

그도 자존심이 있었다. 아무리 상대가 막강해도 힘이 다할 때까지 맞서 싸운다는 것. 그게 바로 뱀파이어의 정신이었다.

“흐아아압!”

뱀파이어는 일단 기세를 곧추세우기 위해서인지 다크 오러를 극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지온에겐 어린애 장난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것 밖에 안 되나? 크와아아아!!”

“크어헉!”

난데없는 괴성에 뱀파이어는 금세 무릎을 꿇었다. 지온의 포효는 단순한 괴성 이상의 것이었다. 그 안에 내제된 하이 배틀러의 강력한 기운과 버서커 특유의 광기가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숨에 상대의 전의를 상실시키기에 충분했다.

"기권."

결국 그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지온의 강대한 기운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싸우지도 못하고 기권한 것이 수치스러운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런 겁쟁이가 32위라니, 유감이로군. 하지만 현명한 선택이다. 크하하.”

“제기랄.”

급기야 뱀파이어는 머리를 감싸 쥐며 울부짖었다. 지온이 던진 그 한 마디가 그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지온은 그렇게 간단히 16강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는 카시안에게 손가락을 뻗으며 외쳤다.

"크하하하!! 기대하고 있겠다. 카시안! 어서 4강까지 올라와서 나랑 붙자!"

“물론이다.”

카시안이 냉소를 지으며 엄지를 거꾸로 들었다. 하이 배틀러를 앞에 두고서도 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에 대적할만한 힘이 있으니까.

참가번호 1번에서 16번까지를 A조로 보고 나머지를 B조로 볼 때, B조는 지온과 카시안의 독무대였다. 그만큼 그들의 힘은 독보적이었다.

대회의 서두를 장식한 32강전이 끝나고, 1월의 둘째 주가 밝았다. 이제 본격적인 대결인 16강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스윽

크로뎀이 대기실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하나뿐인 형, 스탐이 앉아 있었다.

“무슨 용건이냐.”

뜻밖의 방문자였기에 스탐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한 가지 일러둘 것이 있어 왔다.”

크로뎀은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린 같은 베르크 가 출신이다. 베르크 가는 할아버지이신 게리온 베르크를 비롯한 수많은 영웅들이 캄에덴을 주름잡았던 명가지."

스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제안하는 건 바로 지금 베르크 가의 가장을 정하는 것이다.”

“그렇군.”

그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스탐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크 가는 100년 전 몬스터들의 침략으로 몰락했고, 지금은 크로뎀의 주도로 회복된 상황이었다. 당연히 가장은 크로뎀이 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뱀파이어 가문의 가장은 가장 강한 자가 맡는 것이다.

“조만간 너와 나의 16강전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이기는 쪽이 가장을 맡는 게 어때?”

“나쁠 건 없겠군.”

스탐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는 가장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가장이 된다는 것은 결국 그 가문에 얽매이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문에는 거의 발길도 돌리지 않은 그가 가장을 맡는 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럼 먼저 기다리고 있겠다.”

크로뎀은 말을 마치자마자 스탐의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스탐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한참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관중들은 다음 시합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경기는 흥미로웠다.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그럼 이제 16강전 첫 번째 대결을 시작하겠습니다!”

“와아아아!”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많은 함성들이 대회장을 뒤덮었다. 관중들은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핏줄을 타고난 두 신예가 이 거대한 무대에서 맞붙는다. 엄청난 흥행 카드가 아닐 수 없었다.

둘은 조용히 경기장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선 서로를 향해 짙은 살기의 눈빛을 마주쳤다.

“경기 시작!”

다다다!

같은 피를 타고난 두 명의 신인들은 철천지원수라도 되는 듯, 서로 무섭게 달려들어 화끈한 일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경기 초반부터 다크 오러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둘다 이번 전투를 길게 끌지 않겠다는 소리다.

“흐아압!”

스탐이 기합을 토해내며 속사포처럼 주먹을 휘둘렀다. 매우 빠르고, 절제된 동작이었다. 던 크리스트를 가볍게 날린 게 과연 우연은 아니었다.

“어림없다!”

하지만 그에 대적하는 크로뎀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하나하나에 강철을 부숴버릴 듯한 공격을 다 막아낸 그는 오히려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크윽.”스탐이 궁지에 몰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쳇, 엄청 강해졌는데? 일단 방어만 해야겠어.’

스탐의 의사를 듣고 의아해한 쪽은 카스턴이었다.

[무슨 소리냐? 그만한 힘을 가졌는데 왜 방어를 해?]

‘카스턴. 힘이 있다고 무작정 쏟아내는 것은 하수나 하는 짓이야.’

[그럼 여기 있는 뱀파이어 놈들은 다 하수냐?]

‘…….’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무튼 간에, 닥치고 보고나 있어.’

카스턴과의 대화를 끝낸 스탐은 곧 이어진 크로뎀의 공세를 계속 막기만 했다. 상급 배틀러의 짙은 다크 오러가 전신을 가격했지만 굳건한 두 팔은 반격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꿍꿍이냐?”

마치 나무 인형을 친다는 느낌이 든 크로뎀이 화가 난 어조로 윽박질렀다.

"별건 아니고, 단순히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혈기에 사로잡혀 있는 네놈이 너무 한심해서 때릴 엄두가 안 나더라고."

“곧 바닥에 누울 놈이 주둥아리는 잘도 나불거리는군!”

조롱당했다고 생각한 크로뎀은 자신이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치의 다크 오러를 한 주먹에 먹인 채 일격을 날렸다. 지금 스탐은 코너에 몰려 있었다. 히든 브레이커가 아닌 이상에야 피할 수도 없었고, 막는다고 해도 장외 패를 당할 것이다.

‘이제 베르크 가의 진정한 가주는 나다!’

크로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것 한방이면 모든 것이 결정 날 것이다.

휘이익!

모든 힘을 쏟아 부은 크로뎀의 주먹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이럴 수가!?”

뜻밖의 상황에 크로뎀이 대경했다. 방금 전만 해도 보이던 상대는 어디 있는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다고 장외로 떨어진 것도 아니었다.

순간 크로뎀은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탓이겠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역시 넌 한심한 놈이야.”

귓가로 스탐의 비아냥거리는 한 마디가 들어왔다. 부아가 치밀었지만 크로뎀은 더 이상 거기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다.

“크으윽!”

크로뎀이 비명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고통보다는 스탐이 어떻게 자신을 뒤에서 공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훗, 어떻게 내가 거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지 참 궁금한가 보군.”

크로뎀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의 말에 응했다. 그러자 스탐의 모습이 순간 사라졌다.

퍽.

순간 뒤통수에서 가벼운 충격이 느껴졌다. 크로뎀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 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스탐이 있었다. 순식간에 자신을 타넘고 반대편으로 몸을 옮긴 것이다. 그것은 히든 브레이커만이 할 수 있는 짓이었다.

“흥, 싸움은 그까짓 잔재주로 하는 게 아니다!”

스탐이 방심하고 있다고 여긴 크로뎀은 주저 없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까의 공격실패로 상당량의 다크 오러가 빠져나왔지만 여전히 그의 손에 깃든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털썩.

하지만 스탐이 손을 한번 뻗자 크로뎀은 허무하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뭐, 뭐야!?’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상급 배틀러인 자신이 발휘하는 혼신의 일격이 손쉽게 차단당하다니? 하지만 크로뎀은 잠시 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 싸움은 잔재주로 결정되는 게 아니지.”

스탐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크로뎀에게 손을 들이대었다. 크로뎀의 표정은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 같았다.

“서, 설마?!”

“그래. 네가 보는 바대로다.”

스탐은 웃으며 자신의 팔을 휘감고 있는 검은 기류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새까맣게 점철된 그것은 바로 풀 다크 오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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