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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형제
‘내가 이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악을 썼는지 넌 모를 거다.’
스탐은 과거를 회상했다. 철천지원수인 블러드 오우거를 놓치고 좌절에 빠져 있던 100년 전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을. 가문의 친인들과 두 부모를 잃은 후, 그는 다짐했다.
‘언젠가는 만날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가문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라도 미친 듯이 강해지겠다.’
그래서 제일 먼저 찾아간 인물이 바로 카라프였다.
“히든 브레이커가 되고 싶다고?”
전신이 새까만 옷을 입고 있는 단구의 뱀파이어가 이채를 띄웠다. 그의 앞에 무릎을 뚫은 스탐의 얼굴에는 단호한 의지가 엿보였다.
“네. 반드시 되고 싶습니다.”
“의외로군. 명망 높은 베르크 가의 자식이 히든 브레이커가 되려고 한다라.”
카라프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히든 브레이커들의 정착지 없이 떠돌아다니는 생활방식과 치고 빠지는 특유의 전투 스타일을 선호하는 뱀파이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명망 높은 베르크 가는 사라졌습니다. 제가 아는 한에서는 말이죠.”
“그렇군.”
카라프는 그제서야 스탐의 생각을 대충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궁금증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복수를 하는 것과 히든 브레이커가 되는 게 무슨 상관이지?”
“상관이 있습니다. 히든 브레이커는 특수부대 중에서 가장 강하니까요.”
그것은 아부가 아니었다. 캄에덴에서 서열 100위 이내의 뱀파이어들을 보면 히든 브레이커가 3할을 차지하고 있다. 눈앞에 있는 카라프만 하더라도 바크와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실력자가 아니던가.
“좋다. 그럼 날 따라와라.”
카라프는 입단요청을 흔쾌히 승낙했다. 사실 스탐만큼 뛰어난 실력을 배틀러가 자진해서 들어오겠다니, 마스터인 그로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스탐은 카라프 밑에서 히든 브레이커가 되기 위한 혹독한 훈련을 치르기 시작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수십 조각으로 찢어 숫자를 알아보게 하는 기본적인 안법 훈련에서부터 은폐술과 잠행술까지, 힘들지 않은 훈련이 없었다. 게다가 이러한 훈련 뒤에는 항상 실전을 방불케 하는 카라프와의 1:1 대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웬만한 배틀러라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정도였다.
하지만 강해지기 위한 스탐의 의지는 너무도 강했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엄청난 훈련을 끝내는 것은 물론이고, 훈련이 끝난 후에도 녹초가 된 몸으로 그날 배웠던 것을 반복해 카라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후, 카라프에게서 훈련을 끝마친 스탐은 입단 시험을 성공적으로 합격함으로써 진정한 히든 브레이커가 될 수 있었다. 입단 시험은 다른 히든 브레이커들과 차례로 겨루어 모두의 인정을 받아야만 합격할 수 있었는데, 훈련을 거듭하면서 상급 배틀러가 되버린 스탐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합니다.”
스탐은 아직도 자신의 힘에 만족하지 않았다. 불과 200살이 되기도 전에 상급 배틀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의 경지에 올라야 만족하겠나?”
“적어도 하이 배틀러는 되어야 합니다.”
카라프는 쓴웃음을 지었다. 꿈같은 소리라고 충고해 주기엔 스탐의 눈빛은 너무도 진지했다. 물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블러드 오우거를 죽이기엔 하이 배틀러로도 부족했다.
“좋다. 그러면 다시 한번 날 따라와라. 하지만 이번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스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그런 수련이었다면 애초에 히든 브레이커가 될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목숨을 걸어야 오를 수 있는 경지가 바로 하이 배틀러였다.
카라프가 스탐에게 인도한 곳은 바로 치열한 실전의 장이었다. 그는 캄에덴 곳곳을 돌아다니며 스탐을 유수의 실력자들과 싸우게끔 했다. 그것도 죽기직전에 이를 정도의 실전을 거듭하면서.
상대가 하나같이 상급 배틀러 이상의 강자들이었기에 매 전투를 치를 때마다 스탐의 몸뚱이는 피투성이가 되어갔다. 하지만 하이 배틀러가 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60여 년간 수많은 실전을 치렀지만 결과는 상처투성이의 몸뚱이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카라프는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과 실전을 치르자는 제안을 했다.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스탐은 거기에 흔쾌히 응한 뒤 그와 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네 목표가 확고한 만큼 봐주지 않겠다.”
이 말을 끝으로 카라프는 매서운 일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훈련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공격에 스탐은 금방 궁지에 몰렸다. 상급 배틀러의 힘을 한껏 발휘했지만 하이 배틀러 앞에선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카라프는 스탐을 아예 죽이려는 듯 손속에 인정을 두지 않고 있었다.
‘으으.’
스탐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날카로운 흑강이 몇 번이나 몸속을 헤집었는지 모르겠다.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 순간, 스탐의 머릿속에서 오만가지의 잡다한 상념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카라프, 블러드 오우거, 베르크 가, 환생…, 그리고 백세현.
‘여기서 죽을 순 없어!’
화아아악
그의 삶에 대한 의지력이 기적을 발휘했을까? 갑자기 스탐의 광채를 내뿜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우러나오는 어마어마한 힘에 카라프가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드디어… 성공했구나.”
“아.”그의 말에 퍼뜩 정신이 든 스탐이 자신의 몸 곳곳을 살펴보았다. 카라프에 의해 입은 상처는 어느새 사라진지 오래였다. 지속적으로 느껴지던 고통도 말끔히 사라졌다. 마치 남의 몸 같았다.
카라프가 감격 어린 얼굴로 스탐의 양 어깨를 잡았다. 서열 2위로 캄에덴을 호령하는 그였건만, 웃는 모습은 마치 어린 아이 같았다.
“축하한다. 넌 이제 하이 배틀러다.”
“말도 안돼. 재능 있는 뱀파이어라도 이제야 배틀러의 자리에 오를 나이에!”
“캄에덴의 최연소 하이 배틀러가 탄생하는 순간이군!”
스탐은 관중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경지가 밝혀지자 관객들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한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할 것이다. 200대 초반의 나이에 하이 배틀러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크으윽, 믿을 수 없어.”
아마 가장 놀란 인물은 그와 일전을 벌이는 당사자인 크로뎀일 것이다. 크로뎀은 연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지금의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스탐은 그런 그에게 조용히 한 마디 했다.
“믿을 수 없겠지만, 현실이다. 넌 절대 나를 이길 수 없어.”
“닥쳐!”
크로뎀이 충동적으로 달려들었다. 스탐은 그의 심정을 백번 이해하고도 남았다. 눈부신 성장으로 상급 배틀러가 되어 스탐이라는 가문의 수치를 가뿐히 이겨줄 생각으로 가득 찼는데, 우스운 꼴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져줄 생각은 추호도 없다.
퍼억!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시원한 한방이 복부에 틀어 박혔다. 그 어마 어마한 힘은 한 마리의 뱀처럼 뼛속을 휘감고 다니면서 피격자의 고통을 몸 전체에 퍼트리고 있었다.
“크으으.”
이윽고, 크로뎀의 신형이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그리곤 일어설 줄을 몰랐다.
사실 배틀러가 자기보다 경지가 한 단계 높은 상대를 이기는 경우는 가끔씩 있는 일이었다. 풍부한 경험과 뛰어난 투술이 경지의 격차를 좁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배틀러에 한해서였다. 하이 배틀러는 배틀러와는 차원이 다른 절정의 경지였다.
“스탐 선수의 승리입니다!”
“와아아아!”
잠시 동안의 침묵이 끝나자 그 동안 축적해두고 있던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대회장 안을 가득 메웠다. 스탐은 그 소리를 들으며 홀가분한 표정으로 경기장을 내려왔다.
크로뎀과 경기를 끝낸 스탐은 대기실에 가서 휴식을 취했다. 아직 경기는 남아 있었음에도 이곳에 온 이유는,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서였다.
드르륵.
대기실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스탐은 그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앉아라, 크로뎀.”
“…….”
크로뎀이 스탐을 살짝 흘겨보았지만 순순히 옆에 앉았다. 앉고 싶은 마음이야 추호도 없었겠지만 뱀파이어들의 세계에서 승자가 패자에게 하는 말은 곧 법이다.
“아까 했던 약속을 잊지는 않았겠지?”
“…물론이다.”
크로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분함을 삭힐 수는 없는지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훗, 그럼 지금부터 선언하도록 하지. 따라 말해.”
“제길.”
크로뎀은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폐허가 된 맨바닥 위에서 100년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일구어낸 베르크 가문이다. 미련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크로뎀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스탐의 어조는 냉정하기만 했다.
“오늘부터 스탐 베르크는 베르크 가의 가주 자리를 포기하다.”
“오늘부터 스탐 베르크는…뭐, 뭐라고?”
깜짝 놀란 크로뎀이 정색을 했다. 스탐은 피식 웃으며 못 다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오늘부터 베르크 가의 공식적인 가주는 크로뎀 베르크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크로뎀이 고함을 지르며 스탐을 노려보았다. 그로선 기뻐해야할 일이지만, 상대의 의도를 모르니 전혀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마. 놀리려는 건 아니니깐.”
“그럼 왜 자기 입으로 가주 자리를 포기한다는 소리를 하는 거냐?”
“자질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야.”
“자질의 차이?”
스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크로뎀 앞에서 한걸음 한걸음씩 빙빙 돌며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너는 어떻게 보면 승리자야. 자신의 수련을 마다하고 100년 동안 베르크 가를 돌봤으니 말이야. 나는 절대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어.”
“하지만 가주는 강한 자가 돼야만 해. 그건 가문의 철칙이란 말이야!”
뭐라고 더 항변하려던 크로뎀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스탐의 검지가 어느새 자신의 입가에 닿았기 때문이다.
“크로뎀. 철칙은 깨라고 있는 거란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어. 나는 성씨만 베르크일 뿐, 가문에 아무런 도움도 준 적이 없는 백해무익한 존재야.”
‘이단아이기도 하고.’
스탐은 차마 마지막 말을 꺼내지 않고 속으로 집어 삼켰다.
“그럼, 나더러 가주 자리를 이어 받으라고?”
크로뎀이 손가락으로 직접 자신을 가리킬 정도로 흥분했다. 가주자리를 넘겨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가주로 인정받게 되니 그럴 만도 했다.
“단, 조건이 있어.”
스탐이 검지를 치켜들었다. 크로뎀은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조건?”
“별건 아니야. 나를 형으로 불러 달라는 거지. 넌 여태껏 나를 이름 아니면 이놈 저놈으로 불러댔으니까 말이야.”
그것은 쉬우면서도 어려운 요구였다. 반평생 동안 그에게 알 수 없는 증오심을 가지고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크로뎀에게는 더 이상 눈앞의 형제를 핍박할 이유가 없었다.
“아, 알았어…, 형.”
“좋아, 그렇게 말하니까 듣기 좋잖아. 그럼 이 형이 뱀파이어 로드와 명예대결을 펼칠 수 있도록 응원 부탁해.”
크로뎀의 어깨에 손을 얹은 스탐은 싱글벙글 웃으며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크로뎀은 그가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두 형제간의 짧으면서도 긴 대립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