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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명예 대결
대낮임에도 거리는 한산했다. 몇 마리의 개들이 멍멍 짖어대며 돌아다니고 있었고 한두 명씩 보이는 하프 뱀파이어들이 거리바닥을 쓸고 있을 뿐이었다.
보기 드문 일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라면 모를까, 이곳에는 거대한 대회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에는 하프 뱀파이어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녀야 정상이었다.
아벨리오스의 동쪽에 위치한 캄에덴의 낮과 밤은 다른 곳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었다. 그만큼 어두웠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햇빛을 기피하는 뱀파이어들의 주무대는 밤이었다. 낮은 철저히 취침시간이었다. 이와 반대로 하프 뱀파이어들은 보통의 유사인종과 같은 생활패턴을 가지고 있다.
그러던 중, 밤이 왔다. 아르티시앙을 상징하는 해가 노을 너머로 사라지고 은은한 향기를 머금은 달이 떴다.
몇 시간 전의 썰렁함이 마치 일종의 이벤트였다는 듯, 수많은 뱀파이어들의 인파가 대회장 주위를 가득 메웠다. 그 수효는 적어도 몇 만에 달하는 숫자였다.
낮에 하프 뱀파이어들이 보이지 않은 이유는 단 한 가지. 거리를 더럽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무척이나 어이없는 이유지만 그게 바로 피지배층의 운명이었다.
뱀파이어들은 대회장 속으로 꾸역꾸역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바로 카오틱 무투대회의 4강전이 있는 날이니까.
“예, 오랫동안 기다리셨습니다! 캄에덴 유수의 실력자들이 벌이는 최고의 대회. 카오틱 무투대회는 이제 4강에 접어들었습니다!”
경기장 한복판에 선 사회자가 외쳤다. 관객들은 기대 어린 얼굴로 어서 저 성가신 놈이 사라지고 경기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그전에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치열한 대결이 벌어졌지만 앞으로의 경기는 그야말로 명승부 중에 명승부가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자, 사족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고 어서 시작하도록 하지요. 4강 첫 번째 경기입니다!”
“와아아!”
“이 소리는 언제 들어도 좋군.”
스탐이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끝없는 투(鬪)를 추구하는 뱀파이어들이 절정의 패자를 칭송하는 듯한 소리. 어쩌면 뱀파이어들은 바로 이런 명예욕 때문에 끝없이 강해지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가볼까?”
“응.”
선수석에서 일어선 스탐이 씨익 웃었다. 그의 눈앞에는 카이사르가 마찬가지로 일어나 있었다.
‘녀석, 4강까지 올라오다니.’
다크 웨폰을 구사하는 것을 볼 때부터 대충 예상은 했지만, 예전에 그렇게 약골이었던 녀석이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자 놀랍기만 한 스탐이었다.
‘뭐, 나도 예전 같았으면 이 큰 대회에서 4강에 드는 걸 꿈도 꾸지 못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스탐은 문득 며칠 전에 치렀던 8강전을 떠올렸다. 그의 8강전 상대는 바로 다이어였다.
“여기서 널 만날 줄은 몰랐다 스탐.”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내는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응시했다.
스탐은 감회가 깊었다. 벌써 108년 전에 다이어에게서 검술을 배우면서 몇 차례 실전 대련을 했으니, 실로 오랜만에 붙어보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련이 아니었다. 캄에덴 최대 규모의 대회에서 벌이는 시합이었다. 봐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간다!”
선공은 다이어가 먼저였다. 머지않아 그의 현란한 검격이 스탐을 엄습해왔다. 윈드 커터에 담긴 짙은 흑강은 강철이라도 종잇조각처럼 갈라버릴 것만 같았다.
“강해졌구나. 다이어!”
스탐은 흥분한 어조로 외치며 그의 검에 맞섰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단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카스턴을 뽑아 든 상태였다. 상대가 검을 쓰고 있으니 같은 검으로 응수하려는 것이다.
챙!
검과 검이 한데 어우러져 강렬한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그들은 치열한 검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넋이 나가 있었다.
보통 뱀파이어들은 하프 뱀파이어들과 마찬가지로 검과 같은 무기류를 멸시한다. 오로지 몸에서 뿜어내는 강대한 육체적 힘. 그것이 바로 그들이 추구하는 패(覇)였다. 그들이 말하는 하찮은 무기들이 너무도 빠르고, 강했기 때문이다.
“하압!”
다이어의 윈드 커터가 하단을 베어 들어갔다. 실로 눈 깜빡할 사이에 엄습해온 일격이었다. 하지만 스탐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휘이익!
허공으로 띄운 스탐의 발밑으로 날카로운 검날이 지나갔다. 실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스탐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다이어의 턱을 발로 찼다.
“크윽.”
다이어가 신음성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다. 아마 다크 오러라도 깃들어 있었다면 치명타였을 것이다. 하지만 스탐의 발끝에는 한줌의 흑마기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검으로만 승부하자는 건가?”
다이어가 얼얼한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스탐을 바라보았다. 스탐은 그저 미소를 지음으로서 그의 질문에 긍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다이어로 하여금 부아를 치밀게 만들었다. 봐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장난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챙채채챙!
또 다시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되었다. 화가 났다곤 하지만 다이어의 검은 너무도 냉정했다. 상대의 빈틈을 본능적으로 파고들어가면서도 효율적으로 공격을 막아내는 그의 검술은 실로 예술 그 자체였다. 그렇다고 스탐이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도 다이어의 공세에 맞서 잘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스탐에게 검술을 가르쳐 준건 다이어였다. 검으로만 싸워서 누가 유리할지는 보나마나였다.
스팟!
한참 공방전을 벌이다 뒤로 물러선 둘이 일제히 검을 횡으로 그었다. 그러자 검에서 반달형의 검기가 출수되어 서로에서 날아갔다. 그것은 바로 소드 마스터들의 보편적인 기술인 소닉 블래스터였다.
서로가 동시에 발출한 탓에 피할 틈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닉 블래스터를 쏨과 동시에 방어에 치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쿠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옅은 흑연이 대회장 안을 뒤덮였다. 관객들은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경기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둘은 모두 상당한 피해를 입은 듯했다. 스탐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다이어도 갑옷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사실 외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었다. 뱀파이어는 인간과 달리 체내의 피가 5할 밑으로 떨어져도 죽지는 않는 종족이니까.
하지만 둘 중 누가 더 심각한 타격을 입었냐고 물어본다면 그것은 바로 스탐일 것이다.
“쳇.”
스탐이 입가의 피를 닦으며 이를 악물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다이어는 자신보다 검술이 한 수 위였다. 그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동안 스탐은 히든 브레이커로서의 능력을 올리는 데에만 치중해왔다. 물론 검술도 틈틈이 연마해 왔지만 다이어가 평생 동안 갈고 닦은 검술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이제 알겠지? 너와 나의 차이를?”
“인정하겠다.”
스탐은 순순히 시인했다. 계속 검으로 밀고 나간다면 보이는 것은 패배뿐이다. 이렇게 되면 본신의 힘을 발휘해야만 했다.
“자, 그럼 어디 한번 발휘해 보라고! 네가 가진 히든 브레이커의 힘을!”
스탐은 기세등등하게 달려드는 다이어를 조용히 응시하였다. 그러더니 순간적으로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퍼버버벅!
“컥!”
무언가를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다이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누가 보면 혼자 쑈를 하는 것 같았다.
“젠장, 이 자식!”
다이어가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엔 방금 전에 사라졌던 스탐이 태연히 서 있었다.
“유감이다. 다이어. 4강 티켓은 내가 가져가겠어.”
그것이 스탐이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흑마기를 급속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다이어가 뛰어든 것은 그때였다.
“하아압!”
혼신의 힘을 담은 다이어의 일격이 스탐에게 날아들었다. 다이어는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하이 배틀러인 스탐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그가 풀 다크 오러를 끌어올리기 전에 끝장을 봐야만 했다.
휘이익!
그러나 다이어의 검은 허망하게 바람을 가를 뿐이었다. 허탈한 표정을 짓는 그의 복부로 묵직한 일격이 가해졌다.
“윽. 내가 여기서 무릎을 꿇다니.”
다이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쓰러졌다. 그는 이미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훗, 검이 아니라면 넌 날 이길 수 없어.”
스탐이 기절한 그에게 웃으며 한 마디 했다. 그는 애초에 다이어가 기습을 감행할 줄 알고 있었다.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였을 테니까. 그래서 풀 다크 오러까지 올리지 않으면서 그의 허를 찌른 것이다.
아무튼, 스탐은 그렇게 4강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