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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명예 대결
4강전의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의 출전자는 미리 예정되어 있었으니, 바로 지온과 카시안이었다.
지온은 당연하겠지만 쉐도우 스나이퍼인 카시안이 여기까지 온건 참 의외의 일이었다. 물론 그것은 평범한 뱀파이어들의 기준이었다.
“괜찮냐?”
스탐이 옆에 앉은 카이사르에게 물었다. 카이사르는 패배했지만 기절하지는 않았다. 스탐이 손속을 봐줬기 때문이다.
“응. 견딜만해. 휴, 역시 난 널 이길 수 없나보다.”
“훗, 좀 더 분발해.”
웃으며 카이사르의 등을 토닥인 스탐은 시선을 경기장으로 옮겼다. 흥미진진한 대결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크크큭. 용케도 여기까지 왔구나.”
“미련한 멧돼지가 사냥감이 되려고 발광을 하는군.”
둘은 경기장 위에서 만나자마자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물론 성격만 보면 카시안은 얼음이고, 지온은 불이다. 신경전의 승자는 카시안일 수밖에 없었다.
“이 빌어먹을 하프 뱀파이어 놈이!”
버서커답게 지온의 행동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금세 하나하나가 예리한 검과 같은 손톱들이 카시안을 향해 엄습해왔다. 다크 오러가 넘실거리는 것이 스쳐도 두 동강을 낼 것만 같았다.
휘에엑.
카시안은 그 무시무시한 일격을 너무도 간단히 피해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도 베이지 않아 보는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그는 이깟 게 뭐가 대단하냐는 듯한 표정이다.
“크윽!”
지온이 아미를 찌푸렸다. 어느새 카시안의 스틸레토가 그의 몸에 생체기를 낸 것이다. 천하의 지온이라도 몸에 생체기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저 따위 하등한 하프 뱀파이어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분해서일 뿐이었다.
탕!
하지만 카시안의 반격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지온이 방심한 사이, 거리를 벌린 그의 손아귀에서 라이플 건이 불을 뿜은 것이다.
“제기랄.”
뒷걸음질을 친 지온이 복부를 부여잡은 채 카시안을 노려보았다. 근거리에서 입은 데다 그레이 오러를 머금은 탄알이었기에 이번에는 피해가 심각했다.
“쥐새끼 같은 놈!”
끝내 부아가 미친 지온이 이성을 잃고 카시안에게 마구잡이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시합에서는 가급적이면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것이 관례였지만 지금 그의 공격은 맞기만 하면 카시안을 수십 토막 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잡을 수 있다면 잡아 봐라.”
카시안의 말은 누가 들어도 뻔히 알 만한, 도발이었다. 어느 정도 머리가 있는 뱀파이어라면 그냥 흘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성격의 지온은 그 뻔한 도발에 너무도 쉽게 넘어갔다.
“네놈을 못 잡으면 뱀파이어가 아니다!”
지온의 일갈을 시작으로 둘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지온은 사력을 다해 카시안을 잡으려고 경기장 곳곳을 누볐고, 카시안은 그런 지온을 피하면서 라이플 건을 활용해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그런 양상은 경기 내내 계속되었다.
사실 그들의 싸움은 인내력의 장이었다. 지온이 카시안에게 한방이라도 제대로 된 일격을 날린다면 승리자는 지온이 될 테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 해 보였다. 하지만 라이플 건의 탄알이 바닥난다면 얘기는 또 달랐다.
“하아, 하아.”
“…….”
얼마나 치열한 추격전을 벌였을까. 관객들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경기장을 지켜보았다. 둘은 잠시 대치 상황에 들어갔다. 지온은 피투성이가 된 채 서있었고, 카시안은 그런 지온을 태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상당히 지친 듯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스르렁.
카시안이 검집에서 스틸레토를 꺼냈다. 탄알이 바닥난 라이플 건은 바닥에 던져놓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것이다.
채채챙!
이윽고 치열한 진검승부가 펼쳐졌다. 카시안은 먼저 엄습해오는 지온의 손톱을 끈질기게 피하면서 그레이 오러가 주입된 검으로 피투성이인 그의 피부를 더욱 더 붉게 물들였다.
“크크큭, 건방진 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온은 광소를 터뜨렸다. 사실 근접전은 지온이 가장 먼저 바라는 바였다. 카시안은 검으로만 따지자면 소드 마스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이 배틀러인 지온에 비하면 풋내기인 것이다. 물론 지온은 라이플 건 덕분에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지만 눈앞의 상대에게 제압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온의 한방을 피한 카시안이 또 다시 피부에 긴 상흔을 그은 뒤 몸을 빼려고 했다. 이변이 벌어진 건 바로 그때였다.
퍼억!
둔중한 타격과 함께 카시안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지온의 이마가 그의 머리를 박은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카시안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당연할 것이다. 연약한 엘프가 흉측한 버서커와 머리를 정면으로 박고도 부서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지온 승!”
사회자의 한 마디가 지온의 몸에 환희를 안겨 주었다. 이제 더 이상 고통스러워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까. 경기가 승리로 돌아가자마자 지온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만큼 그는 카시안과의 싸움에서 육체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역시 놈이 이겼군.”
경기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던 스탐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지온이든 카시안이든 둘 다 괴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온이 이기길 바란 것은 카시안의 전투 스타일이 그만큼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방금 전에도 보았다시피 탁 트인 경기장에서도 카시안은 지온을 패배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아마 라이플 건의 잔탄이 무한대였다면 카시안이 이겼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탐은 지온에게 갚아야 할 것이 있었다.
“결승전이 기다려지는군. 각오해라 지온. 반드시 널 쓰러뜨려 줄 테니까.”
스탐의 눈이 빛났다. 그것은 이기지 못했던 상대를 반드시 이기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결승전은 준결승전이 끝난 지 3일 후에 벌어졌다. 많은 뱀파이어들이 지온이 불리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았지만, 놀랍게도 피투성이였던 지온은 단 사흘 만에 몸을 깨끗이 회복해 경기장 위에 올라섰다.
“크크큭, 네놈이 결승전 상대라니, 의외로군.”
지온이 이죽거리며 스탐을 흘겨보았다. 물론 반어법일 것이다. 출전자 중에서 하이 배틀러는 그들 둘 뿐이었으니까. 올라오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지껄이는 것도 여기서 마지막이다. 왜냐면 난 널 여기서 박살낼 테니까.”
스탐은 흥분한 어조였다. 흥분하기는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4000여년에 걸쳐 벌어진 카오틱 무투대회에서도 하이 배틀러끼리의 결승은 전무했으니까!
“크크큭!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지 지켜보지. 같은 하이 배틀러라도 너와 난 다르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지온의 강력한 선공이 시작되었다. 금세 버서커의 광기에 실린 다크 오러가 엄습해왔다. 스탐은 그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
콰쾅!엄청난 파공음과 동시에 매캐한 먼지가 대회장 전체에 휘몰아쳤다. 먼지더미가 눈과 호흡기관을 자극했지만 관중들은 둘의 대결을 조금이라도 놓칠까봐 끝까지 참으며 대회장에 시선을 두었다.
“큭크, 제법이구나.”
“너도 마찬가지야.”
스탐과 지온은 각각 한 마디씩 주고받으며 서로의 힘을 확인했다. 일단 곤혹스러운 쪽은 스탐이었다.
‘예상대로군. 하이 배틀러가 되도 놈의 힘을 능가하는 건 어려운 일인가?’
스탐이 이를 악물었다. 팔이 얼얼해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다.
‘역시 본신의 힘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어.’
스탐은 자세를 잡았다. 그것은 히든 브레이커의 전투법이었다. 그러고 보면 지온은 버서커고, 스탐은 히든 브레이커다. 이들의 싸움은 버서커와 히든 브레이커의 자존심 대결인 것이다. 우습게도 두 사내나, 두 단체나 앙숙이라는 점에선 마찬가지였다.
“타핫!”
스탐이 달려들었다. 한 손에 맺힌 풀 다크 오러는 가히 바위를 산산 조각낼 만한 일격이었다. 지온은 당연히 거기에 맞섰다. 정면대결이라면 자신이 더 유리했으니까. 그러나 히든 브레이커인 스탐이 정공법을 택할 리가 없었다.
파앗!
풀 다크 오러 끼리 맞붙었기에, 그 충돌의 여파는 아까보다 더 커야만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렇게 크지 않았다. 낌새를 차린 지온이 얼른 손을 회수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어느새 몸을 빙글 돌며 지온의 뒤로 자리 잡은 스탐의 일격이 그의 허리에 꽂혔다!
“큭!”
앞으로 몇 걸음 밀려 나간 지온이 괴성을 토해내며 뒤로 돌아 손톱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전에 날아든 발차기가 그의 복부를 가격했다.
쿠당탕!
어느새 거구의 버서커가 경기장 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졌다. 실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천하의 지온이 전투 초반부터 이 꼴이 되다니?
“큭, 한방 먹었군.”
하지만 그런 피해에도 불구하고 지온의 입가에 맺힌 웃음은 떨어질 줄 몰랐다. 과연 고통을 쾌락으로 승화시키는 버서커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