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77화 (77/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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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명예 대결

[녀석, 아무런 타격이 없는 것 같은데?]

‘괜히 서열 6위겠어?’

스탐이 툴툴거렸다. 카시안과 싸울 때도 놈은 수십 발의 탄알을 뒤집어쓰면서 승리를 가져갔다. 맷집 하나만큼은 스탐이 상대한 무수한 뱀파이어들 중에서 단연 최고인 것이다.

“하지만 맷집만 가지곤 이길 수 없어!”

스탐은 다시 지온을 향해 뛰었다. 지온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숙적을 반갑게 맞이했다.

투쾅 카가강!

이윽고 치열한 육탄전이 전개되었다. 지온은 양손에 돋친 열개의 손톱으로 스탐을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스탐은 그 무시무시한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간간이 한방씩 먹였다. 하나하나가 풀 다크 오러 덩어리였기에 맞을 때마다 지온의 몸뚱이가 들썩였다. 상황은 그렇게 스탐에게 일방적으로 가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히든 브레이커가 됐더라도 카시안보다 빠를 순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 끝에 스탐의 몸에도 어느덧 깊은 상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쳇.”

결국 스탐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진검승부는 확실히 지온이 우위였다. 양측이 서로 깊은 타격을 입었지만 맷집 덩어리 지온과 비교해볼 때 스탐이 입는 손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먼저 물러선 것도 좋은 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의 싸움에서는 기세가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스탐은 그 기세싸움에서 패배를 인정했고. 바야흐로 공격의 주도권은 지온에게 넘어간 것이다.

“겁쟁이 놈! 죽을 준비나 해라! 큭캬캬캬!”

지온의 웃음소리가 유난히 스탐의 심경을 자극했다. 그런 단순한 도발쯤이야 그냥 흘려 넘기면 되겠건만, 뱀파이어 특유의 자존심이 그의 평정을 뒤흔들고 있었다.

“윽.”

열 자루의 검과 같은 지온의 손톱에 대책 없이 맞선 스탐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 다음부터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스탐은 지온에게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안간힘을 써서 대항하고 있지만 한껏 달아오른 데스페라도의 기세를 수그러들게 만들기엔 한없이 부족했다.

‘젠장, 이대로 당하는 건가?’

왠지 모르게 억울했다. 그동안 두 번이나 패했던 상대였기에 그 억울함은 한이 맺힐 정도였다. 이번에 지면 그는 평생을 지온 아래에 맴돌지도 몰랐다.

[흥, 나는 폼으로 찬 장식품이냐? 어서 나를 꺼내!]

다급해진 카스턴이 윽박질렀다. 하지만 스탐은 비관적인 입장이었다.

‘이제 와서 널 쓴다고 상황이 달라지겠어?’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 아니겠어?]

카스턴의 말에 스탐이 피식 웃었다. 기억의 끈을 연결해 놓으니 녀석은 전생에서 쓰던 속담까지 구사하고 있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겠지.’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심정이었다. 본신의 힘으로 이렇게 밀리는 이상, 카스턴을 반드시 쓰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가 없었다.

“크크큭, 이제 마지막이다!”

지온의 두 팔이 길게 늘어지는 순간이었다. 스탐은 저 자세가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알고 있었다. 저것이 전개되기 전에 어서 조취를 취해야만 했다.

촤아아!

검 자루를 잡으니 발출되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어느새 스탐의 손아귀에 잡힌 카스턴은 한껏 드러내놓고 있는 지온의 복부를 일자로 베고 지나갔다. 피분수가 허공에 수놓아졌다.

“크아아악!”

상대가 너무도 지쳐 있어 방심한 탓이었을까? 지온은 보기 좋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공격의 주도권은 이미 스탐에게 넘어간 뒤였다.

“맛 좀 봐라!”

스탐의 검무가 대회장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온은 그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카스턴의 날카로운 검날에 피부가 베여 나가며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었다. 아까 전에 스탐을 몰아붙일 때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제기랄.”

급기야 지온이 스탐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서였기만 결과적으론 버서커인 그의 자존심에 짙은 상흔이 남겨질 뿐이었다.

푸욱!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카스턴의 검신이 길게 늘어나더니, 거리를 벌린 지온의 몸을 꿰뚫은 것이다.

지온의 인상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카이사르와 싸울 때 봐서 어느 정도 대비는 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경우는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온. 아무래도 명예 대결은 내 차지가 될 것 같구나!”

지온을 경기장 코너에 몰아넣은 스탐이 카스턴을 양손으로 고쳐 잡았다. 벌써부터 로드와 명예 대결을 펼칠 생각을 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스탐은 자신이 한 가지 실책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그것은 아까 지온이 범한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지랄한다.”

“!?”

그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의미심장했을까. 스탐이 깜짝 놀라 지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까 전에도 취했던 바로 그 자세였다!

“젠장!”

스탐이 다급히 카스턴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지온의 양손이 교차되는 것이 몇 배는 더 빨랐다.

촤아아아악!

교차된 버서커의 두 손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그 앞으로 다량의 피가 솟구쳤는데, 손을 내리자마자 피는 바닥에 떨어져 새빨간 그림을 그렸다.

“블러드 크로스 업의 맛이 어떠냐? 큭큭큭!”

“으어어.”

스탐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지온을 응시했다. 자신이 이 꼴이 될 줄이야 예상이나 했을까? 한순간의 방심이 패배를 불러오고 있었다. 스탐은 히든 브레이커가 된 이후로 절대 방심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다짐하면서 자기 자신을 세뇌시켜왔다. 그간 지온에게 당한 싸움을 떠올려보면 대부분 방심 때문에 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뱀파이어들은 그 성격상, 승리감에 도취되면 저도 모르게 방심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한때 인간이었고, 천재적인 재능을 갖춘 스탐도 해결하기 어려운 넌센스였다.

[멍청이! 상대가 어떤 놈인데 방심을 하고 그래?]

‘닥쳐! 이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란 말이야!’

솔직히 카스턴에게 화풀이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스탐은 이렇게라도 이 상황을 뿌리치고 싶었다. 다 잡은 경기를 놓치면 돌아오는 건 비웃음밖에 없었기에. 더군다나 300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의 결승전이 아니던가.

지온은 스탐을 집어 들었다. 손톱이 워낙 길었기에 금세 몸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탐에겐 그것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었다.

“크크큭, 마음껏 발악해봐라. 단 세 방만 맞아주지.”

“개자식.”

스탐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다. 놈은 지금 자신에게 치욕의 절정을 맛보여주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뱀파이어가 왜 뱀파이어겠는가.

퍽! 퍽!

스탐이 체내의 흑마기를 있는 힘껏 쥐어 짜 지온을 두 차례 후려쳤다. 하지만 그때마다 오는 건 차가운 웃음뿐이었다. 블러드 크로스 업이 몸속의 힘을 모조리 태워버렸기 때문에 이제 스탐의 몸속에 있는 흑마기는 극미량이었다.

‘이대로 당할 순 없어!’

이제껏 참아왔던 감정이 폭발했다. 지온의 손을 뿌리친 스탐이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누가 봐도 그것은 미친 짓이었다. 어쩌면 흑마기의 고갈로 죽어버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스탐에겐 이것 밖의 다른 선택이 없었다.

퍼억!

화끈한 한방과 함께 지온의 신형이 넘어졌다. 히든 브레이커 특유의 기술로 순간적으로 풀 다크 오러를 끌어올린 탓에 그 일격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었다. 물론 천하의 지온이 저것에 당할 리 없었다. 곧 다시 일어설 것이다.

“헉.”

이변이 벌어진 건 그때였다. 스탐은 깜짝 놀라 경기장 밑을 바라보았다. 지온이 배를 부여잡으며 일어서고 있었다. 아뿔싸. 거기는 경기장이 아니다.

“노, 놀랍게도 결승전의 승자는 스탐 베르크 선수입니다!”

모든 관중들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사회자의 미친 소리가 튀어 나왔다. 금세 야유가 터져 나왔다.

“말도 안돼!”

하지만 정작 크나큰 충격을 받은 쪽은 당사자인 지온이었다. 그는 뒤늦게야 자신이 발을 디디고 있는 곳이 장외패를 당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온이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이건 무효야! 무효! 어떻게 내가졌단 말이냐!”

살기를 한 가득 품은 버서커의 포효가 대회장 안을 진동시켰다. 하지만 한 맺힌 절규에도 불구하고, 우승자를 뜻하는 대진표의 끝자락에 검은 선이 간 건 스탐이었다.

“어이가 없군.”

오대패자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절대강자인 그들에게도 하이 배틀러들 끼리의 대결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충분히 즐기고 승자가 정해졌으니 됐죠, 뭐.”

“그걸 말이라고 하나? 승자가 패자가 갈렸단 말이야!”

바크가 오르시스의 낙관적인 의견에 반박하고 나섰다. 금세 그들 사이에서 설전이 오가기 시작했다.

“그만들 해라. 그렇다고 승자를 번복할 수는 없는 법이다.”

아이슬로너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오대패자석이 조용해졌다.

“카라프. 참 대단한 놈을 키웠구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카라프가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황당하긴 그도 마찬가지였지만, 스탐이 라이벌을 무찔렀다는 사실에 이르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사실 나는 스탐이 이기길 바라고 있었다.”

“저, 정말이십니까?”

깜짝 놀란 오대패자들이 일제히 아이슬로너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장외패를 당하긴 했지만 지온은 스탐을 제압한 최고의 찬탈자가 아니던가?

“놈이 가장 유력한 찬탈자니까 말이야.”

모순적으로 들리는 그 말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슬로너는 그 이유를 가르쳐 주지 않은 채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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