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8 / 0217 ----------------------------------------------
25. 명예 대결
명예 대결은 말 그대로 명예로운 대결이다. 찬탈전이 아니라면 꿈도 꿀 수 없는 뱀파이어 로드와의 1:1 대결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찬탈전처럼 왕좌를 내놓지도 않았기에 뱀파이어들은 눈에 불을 켜고 우승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지온이 발광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때가 된다면 반드시 널 죽여 버리겠다.”
결승전이 끝나고 명예대결이 시작될 때까지 스탐이 지온에게 들은 것은 그 한 마디 뿐이었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지.”
스탐이 배시시 웃으며 지온을 바라보았다. 지온은 부아가 치미는지 당장이라도 죽일듯한 기세였지만 장소가 장소인지라 이내 화를 식히고 선수석에 앉았다.
"관객여러분들! 이제 이번 대회의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군요. 앞으로 300년 동안 이 대회장은 폐쇄되겠지만, 그만큼 오래토록 여러분들의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럼 뱀파이어 로드 아이슬로너 바리스칸과 제14회 캄에덴 카오틱 무투대회의 우승자 스탐 베르크의 명예 대결이 있겠습니다!"
“와아아아!”
장내는 함성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카오틱 무투대회는 뱀파이어 생애에서 단 두 번 볼 수 있는 엄청난 규모의 대회였다. 그런 대회에서 거물급의 신인이 뱀파이어 로드와 일전을 펼치는 것이다. 지온이 나왔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럼, 시작해볼까?”
“그러죠.”
스탐은 담담한 표정으로 아이슬로너를 마주했다. 하지만 속은 끓어오르는 감정에 북받쳐 있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온 캄에덴의 최강자와 이 영광의 무대에서 싸운다. 흥분이 되지 않는 다면 새빨간 거짓말일 것이다.
스르륵.
발을 딛는 소리와 함께 아이슬로너의 신형이 사라졌다. 스탐은 더 볼 것도 없이 가드자세를 취하였다. 상대는 배틀 마스터다.
퍼버버벅!
머지않아 양팔에 무수한 타격이 쏟아졌다. 명예 대결이니 일단은 즐기자는 듯 그리 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탐은 이것 하나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매끄럽다. 절제됐으면서도 빠른데다 지온에 못지않은 파괴력. 이게 바로 뱀파이어 로드의 힘인가? 비록 한 줌의 흑마기도 들어 있지 않지만 강하다.’
다크 오러는 흑마기를 집약시켜 만들고, 풀 다크 오러는 다크 오러가 극도로 집약되어서, 골든 다크 오러는 풀 다크 오러가 정점에 이르러 승화된 것이라고 한다. 아이슬로너의 의도는 이거였다. 흑마기로 힘싸움을 해봤자 결과는 뻔하니 투술로 나가자는 것이다. 하지만 스탐은 그 의도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퍼억!
"음."
스탐의 완강한 한방에 뒤로 물러선 아이슬로너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녕 뱀파이어 로드의 명령을 거부하는 건가?”
“이건 어디 까지나 명예 대결이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 그럼 봐주지 않겠다.”
순간적으로 아이슬로너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그것은 스탐마저도 움츠러들 만큼 강렬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말을 마친 스탐이 흑마기를 품고 대번에 뛰어들었다. 그도 어느 정도는 아이슬로너의 의도에 맞춰주고 있었다. 이기기 위해 싸워왔던 다른 경기와는 달리 이번 경기는 그토록 경원하던 뱀파이어 로드와의 일전이다. 치열하게 싸울 이유는 없었다.
퍼퍼퍽! 카캉!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손을 섞으며 공수를 전환하는 둘의 모습은 마치 한 폭의 춤사위 같았다. 서로가 살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순수한 승부욕에 이끌려 주먹을 맞대고 있는, 그것은 진정한 명예대결이었다. 만약 싸움에 관심이 많은 음류시인이 이 광경을 본다면 이것을 시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제법이구나!”
“로드만하겠습니까!”
둘은 계속해서 투술만을 고집했다. 흑마기가 사방에 풀풀 날렸지만 그들의 경지를 감안한다면 그것은 없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관객들은 기대했던 그들의 대결이 손장난 일색이 돼 버리자 점점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퍼펑!
그때였다. 막강한 검은 기류가 회오리침과 동시에 아이슬로너의 육신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금세 관중들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대회장을 주시했다.
“이제 넘어가지요.”
스탐이 느긋하게 일어서는 아이슬로너에게 한 마디 했다. 계속되는 손장난을 참지 못한 그가 흑마기를 있는 대로 끌어올린 것이다. 지루하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갑자기 풀 다크 오러를 끌어올리다니. 너무 승리에 집착하는 거 아닌가?”
아이슬로너가 짐짓 화난 어조로 소리쳤다. 하지만 어조와 표정은 따로 놀고 있었다.
"훗. 로드께서 다크 오러를 언제 쓰자, 풀 다크 오러를 언제 쓰자고 말씀하셨던 적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저는 단지 선수를 친 것뿐입니다."
“후후후.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네. 아무튼 간에, 오랜만에 힘 좀 써볼까?”
아이슬로너는 풀 다크 오러를 끌어올렸다. 금세 어마어마한 기운이 그의 전신에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같은 풀 다크 오러라도 뱀파이어 로드의 것은 확실히 달랐다.
“아까전보다 더 잘해보자고.”
휘리릭.
아이슬로너는 풀 다크 오러를 완전히 끌어올림과 동시에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두개가 한 쌍으로 날아오는 그것은 마치 카이사르의 다크 웨폰을 보는 듯했다. 물론 카이사르는 다크 웨폰 자체를 던지지는 않는다.
“읍.”
먼저 날아온 하나는 막아냈지만, 다른 하나는 미처 막지 못한 스탐의 옆구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내가 새로 만든 기술이지. 소량의 풀 다크 오러를 두개로 개체화시켜 인간들의 무기처럼 던지는 거야. 쓸만하지 않나?"
"뭐, 쓸만하기보단…, 살인적이군요."
스탐은 피식 웃으며 아이슬로너가 날린 기술에 대한 간단한 평을 내렸다.
“살인적이라, 표현이 너무 과격한데? 아아, 걱정하지 말게. 내가 설마 이런 친선경기에서 자네같이 촉망받는 인재를 죽이기야 하겠나?"
“흥! 로드라면 몰라도 저는 설마하니 로드를 죽이기야 합니다!”
‘네가 뒈지면 내가 로드가 되니까!’라는 뒷말을 입에 삼킨 스탐이 단숨에 아이슬로너에게 달려들었다. 이 대회에는 명예 대결에서 우승자가 로드를 죽이면 우승자가 로드가 된다는 규칙이 있다. 물론 그럴 일은 절대 없기 때문에, 장난삼아 끄적인 것이다.
파파팍 파앗!
스탐은 연타공격이 아이슬로너에게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바닥이 갈라진 가뭄에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아이슬로너에게는 당황스러움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하는 표정이다.
휘익.
스탐은 방금 전만해도 자신의 공격을 힘겹게 받아내고 있던 아이슬로너가 언제 그랬냐는 듯 갑자기 허공에 떠오르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슬로너는 그런 스탐에게 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화아악!
"윽!"
스탐은 자신의 몸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짐과 동시에 몸이 마비되자 깜짝 놀랐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기술이다.
“골든 다크 오러가 함유된 다크 오러 번의 맛이 어떤가?"
스탐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피보다는 맛이 없군요.”
“…재미없는 개그는 사절이네.”
여유롭게 농담을 던지는 것과는 달리 스탐은 심각했다. 다크 오러 번은 자칫 잘못하면 체내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까다로운 기술이다. 블러드 오우거야 힘으로 몰아냈지만 자신은 히든 브레이커 특유의 흑마기 조절능력으로 세심하게 몰아내야만 했다.
스탐은 몸 안을 자극하는 골든 다크 오러들을 모조리 몰아내자마자 아이슬로너에게 튀어 나갔다.
화아아악
섬광에 실려 날아가는 스탐의 풀 다크 오러는 가히 그 파괴력을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슬로너는 그 일격을 양팔에 맺힌 금빛의 다크 오러로 간단히 막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닙니다!”
‘가자 카스턴!’
스탐은 카스턴을 꺼내들었다. 명예 대결이라 굳이 사용할 이유는 없었지만, 뱀파이어 특유의 승부욕이 스탐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콰콰쾅!
서로가 이끌어낸 모든 기운이 단번에 충돌하자, 대회장은 어마어마한 힘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관객들의 대부분이 관람할 생각을 않고 엎드려 있었을 정도니, 그 여파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만했다.
“하아, 하아.”
힘의 충돌이 끝난 것이었을까? 뒤로 물러선 스탐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대회장은 폐허가 된지 오래였다. 전체를 아나만디움으로 도금했지만 스탐과 아이슬로너가 자리 잡고 있는 곳 외에는 모두 꺼져 들어간 것이다.
“역시 명불허전. 정말 이 하찮은 주둥아리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강하시군요."
“후후후… 자네역시 마찬가지. 나를 이토록 달아오르게 만든 녀석은 전대 뱀파이어 로드를 제외하면 네가 처음이다.”
아이슬로너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단시간 내에 서로 강력한 공격을 주고받은 둘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지만 얼굴에는 환희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럼 이제 다시 맞붙어볼까요?”
이윽고, 숨을 간신히 진정시킨 스탐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하지만 아이슬로너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아이슬로너는 뜬금없이 손을 들어올렸다.
“기권.”
“기권!?”
스탐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는 가운데서도 사회자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이번 명예 대결은 뱀파이어 로드의 기권에 따라 스탐 베르크선수의 승리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아직 승부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훗.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몸 상태나 점검해보지 그래."
아이슬로너의 말에 따라 가슴에 손을 얹어 체내의 흑마기를 확인해 본 스탐이 깜짝 놀랐다.
“흑마기가 텅텅 비어있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지금 내 안의 흑마기는 반 이상이 고갈된 상태다. 배틀 마스터인 내가 이런데 그 요상한 검에 풀 다크 오러를 머금고 싸우는 자네는 어떻겠나?
“아.”
스탐이 할말을 잊었다. 저 뱀파이어 로드는 그보다 자신의 몸을 더 걱정한 것이다. 아이슬로너는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며 씨익 웃었다.
“명예대결은 원래 적당히 하는 거야. 재미로 하는 게임에서 괜히 목숨 날려먹을 이유는 없잖아? 아무튼, 300년 만에 열린 대회도 종지부를 찍었군. 이제 시상식을 치르자고."
아이슬로너는 그 말을 끝으로 뱀파이어 로드 전용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스탐은 그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뭐야.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무슨 기권이래?]
카스턴이 투덜거렸다. 한때 드래곤이었다곤 하지만, 그도 이 대결을 기대하고 있었던 탓에 흥분한 모양이다.
‘진정해 자식아. 그의 말 대로 명예 대결은 적당히 하는 거니까. 더 싸웠다간 그나저나 카스턴, 너는 어떻게 생각해? 저 뱀파이어 로드에 대해서 말이야.’
[드래곤의 인격을 가진 내가 이런 말을 하긴 뭐하지만 정말 대단한 인물이야. 한없이 강한 힘과 야심을 갖추었으면서도 부하에게 인정을 베푸는, 뱀파이어들에게 있어선 더없이 훌륭한 군주지.]
“그러냐.”
스탐은 아이슬로너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뱀파이어 로드가 되겠다고 이 자리까지 오긴 했지만, 어쩌면 아이슬로너가 지금처럼 계속 뱀파이어 로드가 되어 캄에덴을 통치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그럼 시상식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경쾌한 소리를 들으며 스탐이 우승자의 메달을 맨 채 시상석 위에 올랐다. 지온이 무시무시한 눈길로 노려보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아무튼, 이렇게 300년 만에 열린 제14회 캄에덴 카오틱 무투대회은 무수한 신인들을 발굴해내며 한 달간의 짧고도 긴 대장정을 끝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