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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불의 왕국에 가다
1. 불의왕국에 가다.
[K.C. 4418년 2월 18일]
이곳은 드넓은 평야지대가 인상적인 뱀파이어들의 땅, 플로센이었다. 100년 전의 블러드 워로 한차례 황폐화가 되었던 곳이지만 크로뎀을 필두로 한 베르크가 뱀파이어들이 살아남은 플로센의 주민들과 함께 힘겨운 복구작업을 벌이고 나자 어느 정도 예전의 윤곽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새싹이 돋아난 대지를 달리는 크로펫과 뱀파이어가 있었다.
“참 할 일없군.”
스탐은 한가했다. 카오틱 무투대회가 끝난 지 몇 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목표가 사라지고 나니 막연히 손에 잡히는 일이 없었던 것이다. 명예 대결에서 뱀파이어 로드를 이기긴 했지만 솔직히 지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뭐가 그렇게 한가해? 아직도 너보다 강한 상대는 부지기순데.]
“그렇지.”
카스턴의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을까. 순간 스탐의 눈빛이 달라졌다. 어느새 그의 손은 목 언저리에 가 있었다.
“세현아…….”
목걸이를 쥐면서 스탐이 구슬픈 어조로 한 여인을 떠올렸다. 환생한지 200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인간으로 살아왔을 때의 기억은 거의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파편조각처럼 잘게 부서졌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유일하게 깨어지지 않은 파편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세현에 대한 추억이었다.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반드시 그녀를 찾아낼 테다.’
그는 여전히 세현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떻게 보면 그녀가 자신이 뱀파이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정체성일지도 모르니까.
“아, 그러고 보니 이걸 깜빡하고 있었네.”
스탐의 손은 어느새 추억의 목걸이에서 흑빛의 목걸이로 가 있었다. 그것은 카오틱 무투대회에서 우승한 직후 받은 마환석이었다. 흑마기만 집어넣으면 어디서든지 소환수를 소환할 수 있다는 마환석. 물론 단 한 마리만 소환할 수 있지만 결코 평범한 소환수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 마환석의 제작자가 전대의 다크 매지션 마스터인 바르자드였으니 말이다.
“그럼 어디 소환해볼까?”
스탐이 심드렁한 어조로 마환석에 흑마기를 주입했다. 사실 그 자신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강했기 때문에 소환수에 대해 그리 관심이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호기심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슈우우우.
이윽고, 이상한 소리와 함께 마환석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왔다. 그 어떤 물체의 형태를 지닌 그것은 이내 기괴한 모습을 한 괴물의 형태로 변해갔다.
“저건?”
[지옥의 포식자 헬팬텀…. 흑마대전 이후로 처음 보는군.]
“헬팬텀?”
스탐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붉은 바탕에 검은 줄무늬가 인상적인 소환수를 바라보았다. 헬 팬텀이라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흑마대전 당시 모습을 드러낸 지옥의 포식자. 지옥에는 수많은 마수들이 존재한다고 한다. 켈베로스, 헬하운드 등등. 그중에서 가장 먹이사슬의 정상이 서 있는 마수가 바로 이 헬 팬텀이었다.
“흥미로운 녀석이로군.”
스탐은 방금 전 자신이 가졌던 생각을 바꾸었다. 흑마대전의 기록에 의하면 다 자란 놈은 덩치가 말보다 네 배는 크다고 하는데, 말과 비슷한 몸집을 가진 걸 보면 새끼 같았다. 하지만 널찍한 등을 보고 있자면 녀석을 타고 드넓은 플로센의 평원을 누비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너, 저 녀석 다룰 수 있겠냐?]
“흥, 내가 누구냐? 뱀파이어 로드도 이긴 몸이라고. 저런 짐승을 다루는 것쯤이야 고블린 피빨아먹기지."
스탐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헬 팬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무리 지옥의 마수라도 새끼인 이상 충분히 길들일 자신이 있었다.
“좋아, 착하지.”
[아직까진 괜찮은데.]
“앞으로 더 괜찮아 질 거야.”
[글쎄. 그래도 입에다 손장난을 치는 건 좀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 마. 설마하니 일개 소환수 주제에 소환주인 나를 어떻게 하겠…….”
덥석.
순간 무시무시한 고통이 엄습해왔다. 방금 전만해도 느긋하던 스탐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으아악! 내 손!”
[내 그럴 줄 알았지. 하여간 저놈에 뱀파이어는 조심성이 없다니깐.]
카스턴이 바닥을 구르는 스탐을 한심하다는 어조로 바라보았다.
스탐은 이글이글거리는 눈길로 헬 팬텀을 노려보았다. 감히 주인의 손을 물다니. 싸가지 없는 소환수였다.
“내가 널 가만히 놔두면 뱀파이어가 아니다.”
말을 마친 스탐이 날렵하게 뛰어 들어 헬 팬텀의 몸에 달라붙었다. 그리곤 놈의 힘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어리다곤 해도 헬 팬텀은 헬 팬텀이었다.
철퍼덕.
헬 팬텀의 힘에 못 이겨 튕겨나간 스탐이 바닥에 엎어졌다. 놈이 워낙 힘이 세다 보니 벌써부터 온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으아, 정신이 없군."
[멍청아. 그러게 누가 흑마기도 쓰지 않고 맨몸으로 덤비랬냐?]
“시끄러. 젠장, 일개 소환수 주제에.”
[아무래도 저 녀석은 너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은데? 아니, 아예 주인의식이 없다고 봐야겠군. 대단하긴 하지만 바르자드라는 놈은 왜 이런 무시무시한 놈을 마환석에 가두어 놨는지 모르겠어.]
“흥, 닥치고 내가 놈을 길들이는 걸 보기나 해!”
스탐이 다시 헬 팬텀에게 덤벼들었다. 이번에는 흑마기를 끌어 올린 상태였다. 지온이라면 모를까, 맨몸으로는 도저히 저 괴물을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키아아아!”
“제발 좀 얌전히 있어 자식아!”
그렇게 주인과 주인을 주인으로 여기지 않는 생명체간의 대결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헬 팬텀은 사력을 다해 자신에게 붙어 있는 스탐을 떨치려고 꼬리로 사정없이 내려쳤고, 스탐도 안간힘을 다해서 놈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때리고 있었다. 당사자 간에는 무척이나 치열했지만 제삼자인 카스턴 입장에서는 웃기면서도 재미있는 볼거리였다.
“끼잉, 끼잉.”
결국 힘이 빠진 헬 팬텀이 축 늘어졌다. 치열한 각축전의 승리자는 스탐이었다. 아무리 지옥의 마수라곤 해도 어린데다 아벨리오스에 소환된 몸으로 하이 배틀러를 이겨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식, 까불고 있어.”
헬 팬텀에게 꿀밤을 먹인 스탐이 마환석의 흑마기를 거두어 들였다. 그러자 헬 팬텀이 까만 연기에 휩싸이더니 이내 지옥으로 돌아갔다. 놈이 사라진 걸 확인한 스탐은 혀를 쭉 내민 채 바닥에 드러누웠다. 참 지독한 녀석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기척이 스탐의 감각에 잡혔다. 스탐은 곧장 그리로 시선을 옮겼다. 낡은 흑의에 왜소해 보이는 체구. 그것은 무척이나 익숙한 단체의 인물이었다.
“아.”
눈앞에 있는 불청객의 얼굴 윤곽이 드러나자 스탐의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아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스탐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스탐님.”
“나도 마찬가지야. 페리알.”
스탐이 말을 주고받으며 페리알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카라프에게서 히든 브레이커의 수련을 받으면서도 한번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던 녀석을 여기서 만나는 것이다. 그는 지금 서열 39위의 중급 배틀러라고 들었다. 자신이나 크로뎀에 비하면 무척이나 더뎠지만 사실 초급 배틀러이던 놈이 100년 만에 그 정도의 서열에 자리매김할 정도면 실로 어마어마한 성장인 것이다.
하지만 스탐이 페리알의 등장에 마냥 즐거워하는 이유가 단순히 오랜만에 만나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왔냐? 네가 뜬금없이 날 찾아 올 이유는 없을 텐데 말이야.”
캄에덴의 수도 레버쿠젠의 중심에 위치해 있으며 심장 속의 또 다른 심장이라고도 불리는 혈왕성은 불가사의한 예술 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무적의 성이었다. 스탐은 지금 페리알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로드가 왜 나를 호출시킨 거냐?”
“저도 잘 모르죠.”
“그런데 아까한말 사실이냐? 우리 둘만 호출한 게 아니라는 거 말이야.”
“예. 제가 알기론 2, 30명 정도 되는 걸로 압니다. 그것도 대부분이 배틀러더군요.”
“그래?”
스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뱀파이어 로드가 무슨 의도로 그만한 실력자들을 불러낸 것일까? 도무지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둘은 드디어 혈왕성의 꼭대기, 붉은 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 모인 일단의 뱀파이어들을 둘러보던 스탐은 깜짝 놀랐다.
“너희들은…….”
“오랜만이야 스탐!”
제일 먼저 인사를 건네 온 인물은 엘리나였다. 그녀의 옆에는 루시리아도 있었다.
“안녕 루시리아?”
“으응.”
한때 연인이었던 사이라 그런지 둘은 여전히 서먹서먹했다.
“저를 잊진 않으셨겠지요. 주군?”
“아, 바르델! 너도 참 오랜만에 만나는구나.”
스탐이 환하게 웃으며 바르델과 악수를 했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크로뎀과 카시안도 있었다. 신기하게도 상당수는 자신과 아는 사이였다.
“우연의 일치인가?”
“우연의 일치는 아니지. 내가 뽑았으니까.”
스탐은 시선은 곧바로 굳게 닫혀 있던 붉은 색의 문 쪽을 향했다. 열려 있는 문 사이에서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로드를 뵙습니다.”
웅성거리고 있던 뱀파이어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아이슬로너가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저희들을 왜 이곳에 불러주셨는지, 설명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서열이 가장 높은 스탐이 제일 먼저 그에게 의문을 표했다. 그것은 다른 뱀파이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이슬로너는 오히려 반문했다.
“하이 오크(high orc)라고 들어보았나?”
“하이 오크?”
뜬금없는 소리에 좌중의 시선이 아이슬로너에게 집중되었다. 하이 오크라면 흑마대전 때 멸족당한 것으로 알려진 최강의 전투종족이 아니던가?
“놈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끈질기게도 살아있더군.”
“!”
모두들 깜짝 놀랐다. 그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었다니! 아이슬로너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의 동맹인 불의왕국의 드워프들이 1년 전에 그들을 발견했는데, 아직도 치열한 국지전이 한참이라더군. 녀석들도 약한 건 아닌데 지원요청 사절단까지 보낸 걸 보면 무척 고전하고 있는 것 같아.”
“당연하겠죠.”
하이 오크들은 뱀파이어들처럼 싸움을 숭상하는 종족이다. 무기의 사용 유무를 비롯해 여러 가지 요인이 다르긴 하지만 그것 하나만큼은 똑같았다.
“정규군을 파병해도 상관없겠지만, 그러기엔 오스베르 산맥은 너무 좁다. 될 수 있으면 소수 정예가 좋겠지.”
“소수 정예라고 하기엔 너무 막강한 전력인걸요.”
뱀파이어들을 둘러보던 스탐이 그렇게 이죽거렸다. 30명중 대부분이 배틀러라니?
“그 정도는 돼야 하이 오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놈들이 한 때 드래곤들과 쌍벽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아이슬로너의 충고에 스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지금의 캄에덴과 전성기의 하이 오크들과 붙는다는 가정을 했을 때 승률은 절반이다. 한때 소드 마스터가 25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으니 만만히 볼 수는 없었다.
한참 뱀파이어들을 둘러보고 있던 아이슬로너는 이내 추상같은 어조로 소리쳤다.
“자, 그럼 지금부터 명령한다. 당장 오스베르 산맥으로 가서 불의왕국을 도와 하이오크 놈들을 멸족(滅族)시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