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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불의 왕국에 가다
이리하여 배틀러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불의왕국 지원대는 오스베르 산맥으로 갔다. 오스베르 산맥은 캄에덴과 셀리온 평원 사이에 경계를 잇고 있는 곳으로, 갖가지 과일과 산짐승들이 많아 굶어 죽을 걱정은 없었다. 두 종족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이곳의 패권을 놓고 싸우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가 맞는가보군.”
스탐이 코를 흥흥거리며 말했다. 주변에는 비릿한 혈향과 화약 냄새가 진동했다. 오스베르 산맥에 도착한지 하지만 어디에도 시체가 없는걸 보면 아직 전면전이 벌어지진 않은 듯했다.
“긴장을 늦추지 마라. 상대는 하이 오크다.”
스탐은 동료들에게 경각심을 키워주었다. 사방이 나무로 우거진 산길이다 보니 언제 화살이 쏟아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 뱀파이어들은 흑마기만 몸 전체에 활성화시키면 웬만한 화살은 어렵지 않게 막아내며, 다크 오러를 끌어올리면 아예 박히지가 않는다.
쌔앵!
그때였다. 수풀사이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스탐의 발밑에 박혀 들었다. 끝에 깃대가 있는 그것은 분명히 화살이었다.
“적습이다! 전부 전투개시!”
파방!
스탐의 대응은 빨랐다. 어느새 그의 손아귀에서 튀어나온 흑마탄이 화살이 날아온 수풀로 날아갔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견제 차원에서 흑마탄을 한발씩 쏜 뒤 흩어지기 시작했다.
탕!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카시안은 냉철했다. 라이플 건이 불을 뿜자마자 한 명의 하이 오크가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쉐쉐쉐쉑!
하이 오크들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금세 무수한 화살이 날아왔다. 배틀러들은 미소를 띠며 흑마기를 끌어 올렸다. 흑마탄을 화살처럼 생각하는 뱀파이어들에게 있어 활이란 무기는 참 웃기는 물건이었다.
“으어억!”
하지만 그들의 생각이 깨어지는 데는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화살을 한대 얻어맞은 뱀파이어가 바닥에 고꾸라진 것이다.
“오러 애로우!?”
화살에서 마나의 기운을 느낀 스탐이 소리쳤다. 오러 애로우는 엘븐 스나이퍼를 비롯한 소수의 엘프들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기술이었다. 그리고 하이 오크들은 과거 빛의 숲을 속국으로 만든 전례가 있었다. 아마 오러 애로우를 만드는 방법도 그들에게서 배운 것이리라.
“어서 배리어를!”
“알았어!”
스탐의 외침에 금방 엘리나가 루시리아가 흑마술 영창에 들어갔다. 지원대 중에서 다크 매지션은 그들 둘뿐이었다.
위이잉
금세 뱀파이어들의 주변에 흑색의 막이 생성되었다. 다크 배리어라는 이름을 가진 이 3서클의 흑마술은 적의 공격을 튕겨내 되돌려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흑마술은 그 특성상 완전히 방어만 하는 것은 한개도 없었다.
“뭣들 하고 있어? 어서 놈들을 잡아!”
스탐이 흑마탄만 줄곧 쏘아대고 있는 동료들을 선동했다. 제아무리 다크 배리어라도 쏟아지는 오러 애로우 앞에선 한계가 있었다.
파지직 펑!
막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던 다크 배리어는 결국 깨져버렸다. 다행히도 그 때는 스탐들이 하이 오크들을 찾아낸 뒤였다.
“가자, 헬 팬텀!”
어느새 스탐은 헬 팬텀을 타고 있었다. 녀석은 주인에게 당한 걸 의식해서인지, 그의 명령을 거스르지 않았다.
콰아아아
하이 오크들이 눈앞에 보이자 검은 줄무늬를 가진 마수의 입에서 거대한 불덩이가 토해졌다. 그것은 헬 팬텀만이 뿜어낼 수 있다는 지옥의 불길, 헬 브레스였다.
“크어어어!”
“헬팬텀이다!”
하이 오크들이 경악했다. 벌써 4000여년이 지났지만 흑마대전 당시 선두에 서서 악명을 떨쳤던 지옥의 마수를 그들은 아직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기세를 빼앗자 상황은 뱀파이어들에게 일방적이었다. 기습을 감행한 하이 오크들은 그 수가 몇 백에 달하는 것 같았지만 스탐을 위시한 배틀러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죽어라!”
도망치기를 포기한 하이 오크가 자신을 추격해오던 스탐에게 검을 휘둘렀다. 검에서 검기가 흐르고 있는 것이 소드 익스퍼트급으로 보였다.
“어림없다.”
챙, 푹.
스탐은 베짱이 두둑한 상대의 목숨을 가볍게 가져갔다. 소드 익스퍼트가 하이 배틀러에게 덤비다니, 용기는 가상했지만 결국 자살행위였다.
“네놈이 감히 비에리를? 죽여 버리겠다!”
“여기 베짱이 두둑한 놈이 하나 더 있군.”
스탐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눈앞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하이 오크들은 의리 하나는 확실한 것 같았다. 물론 결과적으론 시체만 하나 더 늘 테지만. 그래도 그는 방금 전에 죽인 놈과는 다른 한 가지가 있었다.
[소드 마스터로군.]
“우리를 기습한 하이 오크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걸.”
자신을 향해 성큼 성큼 다가오는 하이 오크를 보던 스탐이 헬 팬텀에서 내렸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정정당당하게 싸워 줄 생각이었다.
“네놈들이 감히 우리를 공격하다니!”
“먼저 공격한 쪽이 누군데.”
“닥쳐라!”
하이 오크는 대번에 검을 빼들고 스탐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다른 하이 오크들과는 달리 고급 갑주를 입고 있었는데, 다혈질로 보이는 게 대장감으로 보이진 않았다.
챙챙챙!
스탐은 느긋하게 상대의 검을 받았다. 과연 한때 아벨리오스를 지배했던 종족답게 하이 오크의 검술은 호전적이고 패도 적이면서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날 이길 수는 없단 말이지!”
퍼억!
다크 오러를 머금은 주먹이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헉!”
고통스러워하는 하이 오크의 얼굴은 경악에 어려 있었다. 검만 쓰던 상대가 주먹을 꽂아 넣을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닥에 쓰러진 하이오크는 일어날 생각을 못했다. 당장이라도 손만 쓴다면 놈은 죽을 것이다. 하지만 스탐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동료들과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릴 뿐이었다.
[안 죽일 거냐?]
“나중에 죽이지, 뭐. 저런 약한 놈 죽여 봐야 간에 기별이라도 가겠어?”
참 느긋한 표정이었다.
“으으으.”
하이오크족의 정예 비스트 워리어(Beast Warrior) 제4부대의 대장 쿠에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대장님! 정신 차리십시오."
부관인 에틴은 자신의 상관을 부축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는 쿠에르가 당하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소드 마스터가 단 한방에 쓰러질 수 있단 말인가.
에틴은 조심스럽게 들쳐 업었다. 쿠에르는 1만이 넘는 하이 오크들을 통솔하는 쿠스테로의 아들로 41세에 불과한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150년의 수명을 지닌 하이 오크들 중에서 그만큼 촉망받는 인재가 없었다. 그런 그가 죽는다면 자신도 살아남기 힘들었다. 에틴은 일단 인원점검을 했다.
“얼마나 살아남았는가?
“부관님과 대장님을 포함해 단 12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이럴 수가.”
에틴은 탄식했다. 자신들은 비록 소드 마스터가 한명뿐인 신예부대라곤 하나 하이 오크의 정예라 불리는 비스트 워리어였다.
“일단은 돌아가 보고해야겠군.”
그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저 멀리 보이는 뱀파이어들을 지켜보았다. 저들이 드워프들과 합류하면 큰일이었다. 반드시 왕에게 보고해 섬멸시켜야만 했다.
스탐의 지원대는 지도를 따라 걸었다. 그들은 최초의 교전을 펼친 이후엔 단 한번의 습격도 받지 않았다.
“하이 오크들이 그렇게 강한가? 난 도무지 못 믿겠어.”
다이어가 의문을 제기했다. 스탐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비스트 워리어와의 전투에서 지원대는 단 한명만 부상을 입었다. 기습을 당했는데도 말이다.
“뭐, 이제부터가 시작 아니겠어? 그렇게 강한 녀석들이라고 하니, 일단 긴장을 늦추진 말자고. 음, 저기 초소가 있군.”
스탐이 언덕 위에 지어진 구조물에 시선을 두었다. 둥그런 목책 위로 망루가 몇 개 보였다. 하이 오크들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었지만 스탐은 금세 고개를 저었다. 호전적인 하이 오크들은 저런 것 자체를 짓지 않는다.
“일단 저기 들어가서 쉬도록 하자.”
뱀파이어들은 스탐의 의견에 말없이 동의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곳까지 온 탓에 피로가 상당히 누적된 상태였다. 목적지인 불의왕국 수도까지는 한참이었다.
초소의 입구로 가자 두 명의 드워프 병사들이 라이플 건을 겨누며 말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누구십니까?”
스탐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여줬다. 그것은 뱀파이어 로드와 불의왕국 왕의 인장이 동시에 찍힌 증명서였다.
“아, 드디어 오셨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그제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챈 드워프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초소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 들어온 스탐은 초소 곳곳을 둘러보았다.
“전사 삼십에 총수 열다섯명이라.”
초라한 병력이었다. 물론 전면전이 벌어지지 않은 지금에서는 확실한 방어가 되는 곳이었다. 제아무리 하이 오크들이라도 100명 이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점령하기 힘들 테니까.
뱀파이어들이 오자 드워프들이 모두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10초소의 대장 브레이입니다. 누추하지만 여기서 쉬시다 가시길 바랍니다."
대장이라는 드워프의 태도는 깍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애초에 국가간의 관계라는 게 힘에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맹국이라곤 하나 불의왕국은 캄에덴의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고맙군. 내 이름은 스탐이다. 이 지원대의 대장이지.”
“오시다가 습격을 받으셨습니까?"
부상을 입은 뱀파이어 한명을 본 브레이가 물었다.
“딱 한번 받았다. 대충 100명 정도 되던데 전원이 오러 애로우를 쏘더군.”
"비스트 워리어! 그, 그들이 말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떡하긴? 보다시피 한명 다쳤다. 뭐, 충분히 앙갚음은 했지. 거의 대부분을 작살냈으니까.”
“맙소사.”
브레이는 경악했다. 비스트 워리어가 누군가? 1년간의 국지전동안 악명을 떨친 하이오크의 최정예전사들이다. 그들에 의해 수백 명의 드워프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 그들을 별다른 피해도 없이 거의 전멸시켰다고?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
스탐은 태연한 표정이었다.
땡! 땡! 땡!
그때였다. 초소의 망루에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적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초소에서 들리는 종소리란 뻔했다. 브레이가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