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81화 (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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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불의 왕국에 가다

“몇 명인가?”

망루의 총수가 다섯 손가락을 활짝 폈다. 그러자 그의 안색이 눈에 띄게 새파래졌다. 겨우 50명뿐이라면 종을 치지도 않는다.

“맙소사, 500명이나 몰려오고 있다니, 이건 전면전이야!”

한참을 당황해하던 브레이의 시선이 스탐에게서 멈추었다.

“저희가 길을 열어 드릴 테니 어서 빠져나가십시오!"

절박하게 소리치는 브레이를 보던 스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히려 그가 더 당황스러웠다.

"지금 나더러 도망가라는 소린가?"

"어쩔 수 없습니다! 목책에 의지한다고 해도 적은 아군의 몇 배입니다. 못막습……."

브레이는 제 할말을 다 하지 못했다. 육중한 손으로 들어올렸기 때문이다.

“너희는 아직 우리의 힘을 모르나보군. 우리는 놈들을 죽이지 않는 이상 여기서 한 발짝도 나갈 생각이 없다.”

스탐은 100년 전의 전쟁을 떠올렸다. 도합 1000만이 넘어서는 뱀파이어와 몬스터들의 대혈전! 겨우 500명 가지고 벌벌 떠는 그가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케켁, 알겠습니다.”

“놈들은 초소를 잘못 골랐어.”

비릿하게 웃는 스탐을 보며 브레이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저렇게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탕! 탕! 탕!

초소에서 총성이 뿜어졌다. 목책 때문에 바깥의 상황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적들이 지척까지 왔음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망루의 총수들이 신들린 손재주로 재장전과 사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플 건의 연사력은 너무도 약했다. 겨우 한 명당 두세 발 쏘았을 뿐인데 목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퍽! 퍼퍽!

“놈들이 목책을 부수고 있습니다!”

“젠장!”

브레이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것이 바로 목책의 단점이었다. 간편하게 만들 수 있고 소수의 적에게 강하지만 다수의 적에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 목책이 부서질 때까지 공격이 가능한 쪽은 망루 위의 총수들뿐이었다.

퍽! 퍽! 퍽!

하이오크들이 목책을 부수기 시작한지 몇 분의 시간이 흘렀을까? 단단하게만 보이던 목책이 쓰러지고 있었다.

탕!

부서진 나무 한 개의 밑을 비집고 들어온 하이 오크가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뒤이어 오는 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라이플 건의 연사력은 길었고, 목책은 하나하나씩 더 부서지고 있었다. 더 이상 놈들의 진입을 저지할 수 없었다.

“가자 왕국의 전사들이여!”

브레이가 도끼를 든 채 앞장섰다. 그러자 삼십에 달하는 드워프 전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최전선에 위치한 초소인 만큼 병사들은 잘 싸웠다. 그들 한명 한명의 무위가 하이 오크를 능가하고 있었다. 덕분에 하이 오크들은 초소에 들어오는 족족 죽어 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동안에 지나지 않았다. 상당수의 목책이 파괴당하자 드워프들은 미친 듯이 쏟아져 나오는 하이 오크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끄아악!”

드워프 측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생겨났다. 복부에 검이 박힌 병사는 바닥에 쓰러져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둥그런 핏물이 번져가고 있었다.

“이제 우리가 나서야 되겠군.”

그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스탐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바르델이 웃으며 그를 따랐다.

“저 역시 바라던 바입니다.”

“그럼 네 실력이 어느 정돈지 구경이나 해볼까?”

스탐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르델을 바라보았다. 지원대에 뽑혀 나왔으니 놈은 적어도 배틀러일 것이다. 무한전선에서 헤어진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녀석이기에 기대감은 더욱 컸다.

탕!

카시안이 쏜 라이플 건이 신호탄이었을까? 하이 오크 하나가 미간에 탄알이 꽂혀 쓰러지는 순간, 지원대의 뱀파이어들이 동시에 전장에 참가했다.

“죽어라 이놈들!”

“하이 오크의 피 맛좀 볼까?”

푸확! 촤자자작!

상황이 뒤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벌써 하이 오크의 한 명의 머리통이 피분수와 함께 솟구쳤다. 그것은 일종의 도미노였다.

“크어억!”

바르델의 손길에 난자당한 하이 오크의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보고 있던 스탐이 감탄사를 터뜨렸다.

“대단한데, 바르델!”

바르델은 씩 웃으며 다시 손을 뻗어 갔다. 그는 벌써부터 다크 오러를 끌어올린 상태였는데, 아마 스탐에게 자신의 경지를 확인시켜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중급이라, 저 녀석도 그동안 피 터지는 수련을 했나보군.”

배틀러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엄청난 재능과 끊임없는 고통을 수백 년 동안 반복하는 노력! 그것은 배틀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왜 100만의 뱀파이어들 중에서 단 200명밖에 없겠는가.

“마, 맙소사!”

어느덧 초소 안에 살아 있는 하이 오크가 단 한명도 없는 것을 확인한 브레이가 경악했다. 그는 하이오크들이 얼마나 강한 지 잘 알고 있었다. 전투종족인 만큼 그들이 가진 힘은 어마어마했다. 일개 병사도 하나같이 자신들을 능가했고, 마스터급 전사의 수효도 한참 더 많았다.

그런 그들을, 일반 병사들이라곤 하나 썩은 짚더미 베듯 간단히 베어 넘기고 있다니!

“어느 정도 막은 것 같군요.”

주위를 둘러보던 바르델이 말했다. 하이 오크들은 더 이상 초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을 순식간에 죽여버리는 뱀파이어들에게 공포심을 느낀 것이다.

“후후후. 그럼 이제 반격을 가해야겠지?”

말을 마친 스탐이 초소 밖으로 나갔다. 깜짝 놀란 하이 오크들이 검을 휘둘러 왔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후두두둑

섬광과 함께 수많은 머리통이 허공에 솟구쳤다. 주인을 잃은 몸뚱이들이 허무하게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야!?”

멀리서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유로키로가 부장들에게 소리쳤다. 그는 지금의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며칠 전 하이 오크의 왕 쿠스테로에게 전언을 받았다.

“500의 병사들을 줄 테니 적의 초소들을 모두 점령하라.”

다른 장군들 중에서도 자신이 먼저 그 명령을 받았으니, 유로키로는 뛸 듯이 기뻤다. 그는 왕의 이 은혜를 갚기 위해 반드시 적들의 초소를 점령하고, 가증스러운 드워프들을 처치하는 데 앞장서리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일은 처음부터 틀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이 아직도 첫 초소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희도 도저히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장군이 모르는 일을 부장들이 알리 없었다. 그저 고개를 숙이기에만 바쁜 그들을 한심한 듯이 쳐다보던 유로키로가 초소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그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저들은 누구지?”

유로키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로 하이 오크들 사이에서 이인자로 군림하는 그였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상한 감정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시야에는 초소를 둘러싼 하이 오크 병사들이 있었다. 벌써 점령했어야하는 그곳에 병사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일방적으로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적들이 불의왕국의 블런트 마스터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예병들을 베어 넘기고 있는 자들은 처음 보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들은 적은 있었다.

“저들이 뱀파이어인가? 하지만 쿠스테로님은 저렇게 강하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어!”

어느새 유로키로의 얼굴에는 경악이 어려 있었다. 뱀파이어라 불리는 적들은 대충 30명가량으로 보였는데, 그들은 벌써 태반이 넘는 병사들을 죽인 상태였다. 그 정도의 무위는 전원이 소드 마스터 정도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장군님,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우리도 병사들과 같은 꼴이 될 겁니다!”

“허나, 지금 간다면 나는 왕을 뵐 면목이 없다!”

유로키로가 소리쳤다. 하이 오크의 전병력은 4000명으로, 인구의 삼분 치 일이 전사다. 쿠스테로는 전병력의 1할 이상을 자신에게 맡긴 것이다. 병사들을 버리고 왕을 만날 바에야 자결하거나 맞서 싸우다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진정하십시오! 저들은 우리가 예상치도 못했던 변수입니다. 왕께서도 용서하실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저들의 목적은 우리 종족의 멸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군님께서 없어서는 안 되잖습니까!”

“그건 너희들도 마찬가지지 않느냐.”

유로키로는 한숨을 쉬며 부장들을 둘러보았다. 자신을 따르는 이 8명의 부장은 모두 소드 익스퍼트였다.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 될 전력인 것이다.

“그럼, 어서 가지요. 병사들이 전멸직전입니다.”

장군의 말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부장들이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유로키로는 죽어가는 자신의 병사들을 애처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발길을 돌렸다.

“저들은 누구지?”

도륙하고 있던 크로뎀의 시선이 언덕 밑으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9명의 하이 오크들이 전장을 이탈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병사들을 지휘하는 우두머리들이겠지.”

카스턴을 검집에 집어넣은 스탐이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인 크로뎀이 그들을 조롱했다.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가다니, 지휘관의 자격이 없는 놈들이야.”

“그럼 네가 직접 가서 베는 게 어때?”

“흥,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어.”

말을 마친 크로뎀이 곧장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이 오크들이 거의 전멸당한 상태라 그에겐 거칠 것이 없었다.

“나도 놓칠 수야 없지.”

스탐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카시안이 뛰어 가고 있었다. 그도 저 하이오크들이 누군지를 알아챈 것이다.

“참 냄새도 잘 맡는 녀석이군. 그럼 나도 가보실까.”

쓴웃음을 짓던 스탐이 곧장 뛰어 가기 시작했다. 그도 강자를 갈구하는 뱀파이어. 마냥 손놓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두두두두

히든 브레이커인 스탐이었기에 주행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어느새 자신보다 한참을 앞서고 있던 크로뎀을 추월했다.

“젠장!”

“수고해라.”

멋쩍게 웃으며 손을 흔든 스탐이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눈앞에는 카시안이 있었다.

‘역시 저 놈은 따라잡을 수 없겠어.’

한참동안 카시안를 따라 뛰던 스탐이 혀를 내둘렀다. 저격이면 저격이고, 속도면 속도. 맷집만 빼면 흠잡을 데가 없는 녀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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