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2 / 0217 ----------------------------------------------
26. 불의 왕국에 가다
탕!
카시안의 라이플 건이 불을 뿜었다. 섬광을 가르며 날아간 탄두는 그대로 하이 오크의 몸을 파고들었다.
“으윽!”
“이럴 수가!”
한명이 쓰러지자 다른 하이 오크들이 걸음을 멈추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스탐과 카시안을 노려보았다. 도망가지 않은 이유는 상대가 단 두 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따라 잡았군. 겁쟁이 지휘관 나리들.”
“네, 네놈들의 목적이 도대체 뭐냐!”
한 하이 오크가 소리쳤다. 너무도 뻔한 질문이었다.
“하이 오크의 멸족. 그리고 네놈들의 죽음이지.”
냉정하지만 사실이었다. 스탐은 유로키로를 손짓했다. 그는 한눈에 누가 최고의 실력자인지 알아챈 것이다.
“놈은 내 것이다.”
카시안이 스탐의 손을 치우며 유로키로에게 스틸레토를 겨누었다. 라이플 건이 아닌 스텔레토를 꺼낸 이유야, 검으로 싸우기 위해서일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스탐이 어깨를 으슥했다. 하이 오크들을 멈추게 한 장본인이 카시안이었기에 그로선 달리 할말이 없었다.
“장군님, 어서 피하십시오!”
“여기는 저희가 맡겠습니다!”
다른 하이 오크들이 유로키로를 앞에 나서며 검을 빼내 들었다. 유로키로는 절박한 심정으로 부하들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쉬며 발걸음을 돌렸다.
“그럼 모두 살아남길 바란다.”
“웃기는 신파극이로군.”
스탐이 비아냥거렸다. 자신 혼자라면 저 장군이라는 하이 오크는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옆에는 카시안이 있다.
“넌 떨거지들을 청소해라.”
말을 마친 카시안이 유로키로를 쫓았다. 하이 오크들이 검기가 만연한 검으로 그를 베어 왔지만 이 괴물 같은 쉐도우 스나이퍼는 귀신같은 몸놀림으로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맙소사.”
“그렇게 놀라워할 필요없어. 너희는 곧 죽을 테니깐.”
스탐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어느새 그의 뒤로 크로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학학. 내가 꼴찌잖아? 제기랄.”
“잔말 말고, 넌 오른쪽에 셋을 맡아라. 난 왼쪽의 다섯을 맡을 테니.”
“무슨 소리야? 서로 넷을 맡으면 되잖아!”
“넌 동생이고, 난 형이다.”스탐의 말에 크로뎀은 입을 다물었다. 불만스럽다는 표정이 역력했지만
“개자식들! 우리를 무슨 물건으로 보고 있냐!”
부아가 치민 하이 오크들이 덤벼들었다. 소드 익스퍼트의 검기들이 무서운 기세로 짓처들고 있었다.
“너희는 물건이 아니야. 쓰레기일 뿐이지.”
하이 배틀러 스탐은 느긋한 어조로 카스턴을 꺼내 들었다. 어느새 짙은 다크 오러가 검신을 감싸고 있었다.
유로키로는 쫓기고 있었다. 그도 상급의 소드 마스터인 만큼 무척 빨랐지만 스탐을 능가하는 주행력의 소유자를 따돌릴 수는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타앙!
자신이 뒤쫓던 하이 오크가 갑자기 몸을 틀자 카시안은 곧장 라이플 건을 쏘았다. 정말 귀신같은 반사 신경이었다. 하지만 유로키로는 간발의 차이로 탄알을 피했다.
“받아라!”
금세 유로키로의 검이 날아들었다. 상급의 소드 마스터답게 그의 움직임은 귀신같았다. 오죽하면 날고 기는 카시안이 스틸레토를 빼들기 전에 검이 지척까지 다가왔을까.
처억.
카시안은 순간적인 센스를 발휘해 라이플 건으로 유로키로의 검을 막았다. 라이플 건은 총신에 아나만디움 도금을 했기 때문에 내구력이 상당했다. 하지만 상급 소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 앞에선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푸캉!
결국 라이플 건은 두 동강 나고 말았다. 하지만 덕분에 시간은 벌 수 있었다. 뒤로 물러나 스틸레토를 손에 쥔 카시안은 유로키로와 함께 검을 뻗은 채 한동안 대치했다.
“이렇게 된 이상, 네놈을 죽이고 그 검이나 챙겨야겠군."
“능력이 된다면.”
카시안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단순한 한 마디도 무척이나 도발적이었다. 성질이 불같은 하이 오크의 전형적인 성격을 지닌 유로키로는 그 뻔한 도발에 넘어가버렸다. 지온처럼.
“빌어먹을 놈! 죽어라!”
챙챙!
이윽고 유로키로의 오러 블레이드와 카시안의 그레이 오러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 강력한 힘의 결정체들은 주인의 손아귀를 따라 현란하게 움직이며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촤앗!
“윽!”
얼마나 검격을 이루었을까. 이내 날카로운 뱀의 혓바닥이 유로키로의 노출된 살갗을 베었다.
“내가 감히 너 따위에게!”
최초의 부상을 입은 유로키로가 흥분했다. 하이 오크 내에서 이인자라 불리는 자신이 저 따위 나약한 엘프에게 이 꼴이 돼 버리다니!
“받아라!”
슈샤샤샥!
유로키로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수십 줄기의 검광이 카시안에게 쇄도했다. 레인 오브 소드(Rain of Sword)라 불리는, 소나기처럼 무수한 검탄을 쏟아내는 이 기술은 집단전이든 개인전이든 강력했다. 하지만 상대는 카시안이었다.
파지지직.
놀랍게도 카시안은 그 무수한 일격을 다 차단시켰다. 사정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적어도 한발은 맞아야 정상인데, 과연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재밌었다.”
그 말 한 마디를 끝으로 스틸레토에서 쏟아져 나온 새하얀 검광이 유로키로에게 날아들었다. 유로키로는 다급히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주인을 닮은 검광은 교묘하게 그의 살을 훑고 지나갔다.
“으으윽!”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유로키로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치 불에 살 전체가 데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샤프 슈터(Shape Shooter). 네놈의 시답잖은 기술보다는 쓸만하지.”
카시안은 말끝마다 도발이었다. 유로키로의 눈이 시뻘개졌다. 단순히 조롱하는 것일 뿐인데 왜 이렇게 흥분될까? 정말 미스터리였다.
“놈! 날 무시하지 마라! 난 하이 오크의 이인자란 말이다!”
추상같은 외침과 함께 오러 블레이드가 카시안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상급 소드 마스터의 힘이란 실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스쳐도 카시안의 몸이 뭉텅 잘려나갈 것만 같았다.
푸학!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다. 유로키로는 짙은 미소를 지으며 두 동강이 난 상대의 모습을 감상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경악했다. 시체는 피를 뿜어내지 않았다. 단지 연기처럼 사라질 뿐이었다.
푹.
“크헉!”
자신의 배를 뚫고 나온 금속을 본 유로키로가 경악 어린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카시안이 차가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바로 쉐도우 디코이로 자신의 눈을 현혹시킨 것이다.
털썩.
카시안이 몸에서 스틸레토를 빼어내자 유로키로가 피분수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체는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하이 오크의 이인자, 유로키로는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똑바로 말해보아라.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벌떡 일어선 사내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어려 있었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저의 4부대는 혼신의 힘을 다해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100명이 30명을 상대로 중과부적이라니, 웃기는구나. 그나저나 적은 얼마나 피해를 입었느냐?”
“그게… 단 한명만이 다쳤을 뿐입니다.”
“맙소사.”
하이 오크 사내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거처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철로 이루어진 딱딱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지 않는 이상 그는 항상 이 무장상태를 유지했다.
“면목이 없습니다. 아버님.”
“그만 일어서라 쿠에르. 네 잘못만은 아니니.”
하이 오크족의 우두머리. 쿠스테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횃불이 불을 비추는 것을 빼면 한참 깜깜한 어둠만이 도사리고 있었다. 은신의 동굴. 이곳이 바로 하이 오크들이 지옥의 군대를 피해 숨어 지내던 곳이었다.
무려 4000여 년 동안 숨어 살았다. 멸족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족의 수를 늘리며 혹독한 훈련을 거듭해 온 바로 1년 전 그들은 오스베르 산맥에 진출했다. 그리고 그곳에 자리 잡고 있던 드워프들과 끊임없는 각축전을 벌이며 상대의 전력을 확인한 뒤, 전병력을 투입해 완전히 멸망시킬 작정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왕이시여!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유로키로 장군이 이끄는 선발대가 전멸 당했습니다.”
뜻밖의 비보에 쿠스테로를 위시한 장군들의 입이 딱 벌어졌다. 쿠스테로가 두 손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유로키로는?”
“전사하셨습니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일개 초소를 점령하는 작전에서 그가 죽었단 말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쿠스테로는 유로키로가 죽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안광이 점차 살기로 가득 찼다.
“뱀파이어 놈들. 우리를 멸족시키려고 작정을 했군.”
쿠스테로는 며칠 전, 드워프 사절단을 포로로 잡았던 때를 떠올렸다. 뱀파이어의 나라에 지원군 파견을 요청했다는 소리에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그 따위 저급한 종족이 어떻게 자신들을 막을 수 있겠냐고.
하지만 그것은 큰 오판이었다. 자신들이 숨어 사는 동안, 세상은 너무도 바뀌어져 있었다. 오스베르 산맥에 도착한 소수의 뱀파이어들에 의해 비스트 워리어 한개 부대가 당했다. 비록 신설된 부대이긴 하지만 적은 단 한명의 사망자도 만들지 않고 일방적으로 학살당했다.
“놈들이 불의왕국군과 합류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빌레스토 장군!”
“예!”
“어서 모든 비스트 워리어들을 데리고 오시오.”
“그들을 죽일 생각이십니까?”
“그러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일족의 존망을 거머쥔 군주의 눈에는 확고한 결심만이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