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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데빌 핸드
초소전투는 하이 오크들의 전멸로 종지부를 찍었다. 상당수의 드워프들이 죽어 버린 상태였지만, 뱀파이어들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느긋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원대의 대장은 생각이 달랐다.
“서둘러야겠군. 놈들이 우릴 추격할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형? 겨우 이런 허섭스레기들한테 겁먹었어?”
크로뎀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까 전에 스탐과 함께 하이 오크의 우두머리들을 어렵지 않게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시안은 적장의 머리를 가져왔다. 놀랍게도 그가 상급 소드 마스터의 목숨을 담보로 잃은 것은 라이플 건 하나뿐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놈들은 다 약골들 일거야. 그렇지 않다면 왜 로드가 이런 대규모의 멤버들을 보냈겠어?”
스탐의 생각은 크로뎀과 사뭇 달랐다. 아이슬로너는 똑똑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쓸데없는 지원대 편성을 짰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어서 가는 게 좋겠어.”
스탐은 지원대를 이끌고 서둘러 움직였다. 동료들이 그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다만 카스턴은 달랐다.
‘카스턴. 너는 잘 알고 있겠지? 놈들의 힘을 말이야.’
[물론이다. 놈들은 정말 강하다. 더군다나 4000년 동안 숨어 자신들이 아벨리오스를 지배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 더욱 더 강해졌을 거야.]
‘아마도.’
스탐은 카스턴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다. 이제까지의 전투로 다른 뱀파이어들이 하이 오크들을 만만하게 보고 있었지만, 스탐만큼은 달랐다. 놈들은 재기를 위한 칼을 4000년 동안 갈고 있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적들이 약한 건 어쩌면 일종의 트릭일지도 몰랐다.
터벅 터벅
지원대는 한참을 걸었다. 수도까지 도착하기엔 아직 멀었지만 스탐을 제외하면 모두 태평했다. 그런 그들을 하늘이 벌이라도 준 것일까? 난데없이 섬광이 번쩍였다.
쉐쉐쉑!
“모두 피해!”
스탐이 소리쳤다. 고요하기만 하던 나무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오러 애로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파파팍!
“커헉!”
사전에 대비를 하고 있던 스탐은 어렵지 않게 그것을 막아냈지만, 방심하고 있던 나머지 뱀파이어들은 화살을 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멍청이들! 그렇게 조심하라고 일렀건만!”
속절없이 쓰러지는 뱀파이어들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스탐은 화살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놈들의 주력이군.]
‘나도 알아.’
스탐은 히든 브레이커의 안력으로 순식간에 적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눈에 보이는 적들의 수는 대충 200명.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만으로도 지원대가 전멸 당하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예상대로군. 소드 마스터가 스무 명이나 있다니!’
[이제 어쩔 거냐?]
‘도망쳐야지.’
치욕스럽겠지만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지원대는 캄에덴 배틀러의 2할 가량에 해당하는 전력이다. 이들이 전멸당한다면 살아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로드를 볼 낯이 없었다.
“후퇴! 모두 전속력으로 뛰어라!”
“뭐야? 후퇴라니?”
뜻밖의 명령에 크로뎀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른 뱀파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장은 스탐이었다. 그들은 하는 수없이 하이 오크들이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카시안! 네게 여덟 명을 맞길 테니까 뒤를 엄호해!”
카시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지원대는 부상자가 상당수 속출한 상황이었다. 그냥 도망간다면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죽을지 몰랐다.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이윽고 지원대의 후방을 맡을 뱀파이어들이 스탐의 부름에 다가왔다. 그들은 엘리나와 루시리아 두 명의 다크 매지션과 중상급의 배틀러 여섯이었는데, 하나같이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왜 저 녀석이 우리를 맡는다는 거야?”
후방을 맡을 여섯 명의 배틀러중 한명인 크로뎀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은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카시안에게 자신들을 맡긴다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들렸나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꼬투리 잡을 때야? 잔말 말고 어서 막아. 난 다친 녀석들을 데리고 최대한 거리를 벌릴 테니까.”
말을 마친 스탐은 부상자를 부축하며 뛰어가기 시작했다. 크로뎀이 투덜거렸다.
“형도 참 어처구니가 없군. 저런 놈에게 우릴 맡긴…….”
그때였다. 카시안이 자신에게 손을 뻗어왔다. 깜짝 놀란 크로뎀이 본능적으로 전투 자세를 취했다.
“한눈팔지 마라.”
“아.”
크로뎀은 카시안이 잡은 눈앞의 물체를 보고선 소름이 끼쳤다. 그것은 바로 오러가 넘실거리는 화살이었다.
피잉!
카시안은 적진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상대방과 마찬가지로 오러 애로우였지만, 그 파괴력은 확연히 달랐다.
“크아악!”
나무 위에서 화살을 난사하고 있던 하이 오크 하나가 비명성과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대충 쏜 것 같은데 놈은 절명한 상태였다. 라이플 건이 없어도 카시안은 카시안이었다.
“뭐하고 있지?”
카시안이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던 뱀파이어들에게 살기를 내뿜었다. 그러자 그들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다크 배리어!”
두 다크 매지션들의 영창과 함께 동그란 흑색의 막이 쏟아지는 오러 애로우를 차단했다.
파바바방!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배틀러들의 손아귀에서 흑마탄이 쏟아져 나갔다. 다크 배리어는 밖에서 오는 것은 차단하지만 안에서 나가는 것은 막지 않는다. 참 훌륭한 흑마술이다.
여섯 발의 흑색 탄두가 하이 오크가 운집해 있던 숲에서 폭발했다. 하지만 미리 피한 탓에 사상자는 한명도 보이질 않았다. 사실, 카시안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끄아악!”
카시안의 화살에 맞은 하이 오크 하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즉사한 건 아닌지, 금세 동료들이 부축해갔다.
“빌어먹을 자식.”
카시안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것 같다고 여겨진 크로뎀이 그를 쏘아보았다. 카시안은 뒤쪽을 힐끗 쳐다보더니, 특유의 무감정적인 어조로 한 마디 했다.
“대충 시간을 번 것 같군. 어서 본대와 합류하지.”
퍼엉!
그 순간 다크 배리어가 깨졌다. 그와 동시에 다수의 오러 애로우가 카시안들에게 엄습해왔다.
“제길!”
크로뎀이 이를 악물었다. 여태까지 방심한 게 후회되었다. 적들은 전원이 오러 애로우를 쓰는데다 소드 마스터만 수십 명이다.
쐐에에엑.
마나를 머금은 화살들이 지척까지 다가온 순간, 카시안이 스틸레토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의 검광이 춤을 추었다.
차차창! 후두두둑.
“맙소사.”
엘리나의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카시안이 자신들에게 다가온 오러 애로우를 모조리 베어냈기 때문이다. 물론 단 한발이 그의 뺨을 스쳐갔지만, 그런 묘기는 뱀파이어들은 절대 부릴 수 없었다.
“어서 가자.”
“으응.”
뱀파이어들은 앞장서서 지원대를 향해 뛰어가는 카시안을 따랐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크로뎀은 입술을 뜯으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카시안을 비롯한 후방의 뱀파이어들 덕분에 지원대는 가까스로 하이 오크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섯 명이나 다치다니.”
동료의 부축으로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보고 있던 스탐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카시안, 아까 후방을 맡았을 때 놈들의 숫자가 어느 정도였어?”
“정확히 200명이다.”
“흐음.”
카시안의 말에 스탐이 염두를 짚었다. 다혈질이긴 하지만 하이 오크들은 머리가 좋은 놈들이다. 자신들이 수도까지 가게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온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한 뱀파이어가 외쳤다. 스탐이 뒤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수의 하이 오크들이 활시위에 화살을 먹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어서 뛰어!”
스탐이 지원대를 선동했다. 사실 부상자가 있다곤 하지만, 자신들은 대부분 배틀러다. 기동력적인 측면에서는 따라잡힐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하이 오크들은 영악한 놈들이었다.
“스탐! 옆에서 적이!”
“뭐라고?”
스탐이 깜짝 놀라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왼쪽에서 일단의 하이 오크들이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당했군.”
예상은 했었지만 현실로 되니 스탐으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도망치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서 뛰어!”
“젠장!”
대장의 말에 지원대의 뱀파이어들은 눈물을 머금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생애 최고의 치욕이 될 것이다. 물론 살아남아야 한다는 전제가 붙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