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84화 (84/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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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데빌 핸드

핑핑! 푹!

“으어억!”

쏟아지는 화살세례에 얻어맞은 뱀파이어들 저마다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극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쓰러지지 않고 달렸다. 쓰러지는 순간 죽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으아아!”

그때 한 뱀파이어가 네 번째로 꽂히는 오러 애로우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졌다. 금세 그의 지척으로 사신들이 다가왔다.

푸악 푸아악!

“아, 안돼!”

“베렐!”

동료들이 도망가면서도 핏발을 세우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베렐이라는 뱀파이어는 하이 오크들의 차가운 검 아래 난자당해 죽임을 당했다. 수많은 검날 앞에선 배틀러라는 경지의 힘도 무력했다. 그렇게 지원대의 첫 희생자가 발생했다.

“저 개자식들이!”

“죽여 버릴 테다!”

“그만 둬! 그런다고 죽은 녀석이 살아 돌아오진 않아!”

스탐이 기를 쓰며 뱀파이어들을 진정시켰다. 대장인 그였기에 더 이상의 희생자는 결단코 막아야 했다. 물론 스탐도 머릿속에서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고 있었다.

“으아아!”

그때였다. 한 하이 오크가 비명과 함께 고꾸라졌다. 우연히도 놈은 바렐을 죽인 하이 오크들중 하나였는데, 그의 가슴에는 화살이 한발 꽂혀 있었다.

“어서 가자.”

카시안이 활을 거두며 싸늘한 한 마디와 함께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분하고 있던 뱀파이어들은 어느새 입을 다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참 대단한 녀석이야.’

스탐은 카시안을 보면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말려도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뱀파이어들을 화살 한발로 진정시키다니. 정말 리더쉽 하나는 타고난 녀석이었다.

두두두두

지원대는 한참을 뛰었다. 부상이 극심한 이들은 중상급 배틀러들이 업고 있었던 탓에 뒤치는 뱀파이어는 한명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탐은 왠지 불안했다.

‘놈들은 무리해서 쫓아오지 않고 있어. 왜지?’

자신들이 수도로 들어가면 끝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들의 걸음은 유난히 느렸다. 아마 전속력을 다해 뛰었다면 뱀파이어 한둘은 더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설마 앞에 적들이 더 있다는 건가?’

고개를 앞으로 돌리던 스탐이 순간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을 느꼈다. 의심이 현실로 드러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멈춰!”

스탐이 소리쳤다. 그러자 뱀파이어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도를 줄였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이 굳어지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이 놈들, 우리를 전멸시키려고 작정을 했군.”

스탐이 이를 악물며 전방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일단 하이 오크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삼십 명은 소드 마스터들이었다.

‘도합 오십 명이라.’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슬로너의 말대로라면 하이 오크들의 수는 1만을 약간 웃돌 정도라고 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만 오십 명이라니?

“뱀파이어들이여, 오늘이 너희의 마지막 날이다.”

어느새 스탐의 시선은 앞으로 몇 발짝 다가오는 한명의 하이 오크에게 갔다. 그는 휘황찬란한 고급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한 눈에 봐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네 녀석이 바로 하이 오크들의 우두머리로군.”

“잘 아는군. 가르쳐 줄 필요는 없겠어. 내 이름은 쿠스테로다.”

“나는 불의왕국을 돕기 위해 여기까지 온 지원대의 대장. 스탐이라고 한다.”

벌써 다수의 하이 오크들에게 포위당한 형국이었음에도 스탐은 태연히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이렇게라도 대화를 나누어야 동료들이 전열을 가다듬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을 알아챘는지 쿠스테로가 씩 웃었다.

“얄팍한 수를 써봤자 네놈들이 죽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럴지도.”

스탐이 쓴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면 그의 말 대로였다. 이변이 없다면 자신들은 여기서 뼈를 묻을 것이다.

쿠스테로가 손을 올렸다. 여기저기서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탐은 동료들에게 눈짓을 했다. 화살이 쏘아지는 순간, 달려들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해보고 죽는 것만큼 뱀파이어에게 수치스러운 일은 없으니까.

파파팍!

무언가가 날아감과 동시에 둔탁함 소음이 울려 퍼졌다. 아마 대여섯 명 정도는 쓰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뱀파이어는 아니었다.

“뭐야!”

당황해하는 쿠스테로의 목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스탐은 끄쓰러져 있는 하이 오크를 바라보았다. 등판에 조그만 손도끼가 꽂혀 있었다. 이내 스탐이 미소를 띠었다. 그가 알기론 손도끼를 다루는 종족은 단 하나뿐이었다.

“붉은 도끼병들이다!”

스탐의 시선이 한 하이 오크의 손짓을 따라 갔다. 거기엔 붉은 옷을 입은 일단의 드워프들이 손도끼를 던지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쿠스테로의 하이 오크들이 역포위당한 셈이다.

“뭐하고 있어? 어서 공격해!”

“우아아아!”

뱀파이어들이 고함을 지르며 하이 오크들에게 뛰어들었다. 오러 애로우가 날아왔지만 당황한 탓인지 그들의 화살은 정확성을 잃었다. 소수의 뱀파이어들만이 맞을 뿐이었다.

“말도 안돼. 놈들이 어째서 이곳에!”

쿠스테로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수도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생각하기 전에 네 목숨이나 걱정하시지!”

카스턴이 섬광을 가르며 쿠스테로에게 날아갔다. 정말 죽이겠다는 듯 스탐의 검에는 풀 다크 오러가 서려 있었다.

채앵!

“큭!”

카스턴을 받고 뒷걸음질을 친 쿠스테로가 검을 고쳐잡았다. 그의 검은 시퍼런 기운이 줄기줄기 돋아난 상태였는데, 그것은 바로 완성형 오러 블레이드였다.

“호오, 최상급 소드 마스터로군.”

“그러는 네놈도 나와 동급이지 않나?”

스탐은 흥분한 얼굴로 쿠스테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지온이나 아이슬로너와 싸웠을 때와 똑같은 감정이었다. 자신과 대등 혹은 그 이상의 상대와 싸울 때에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어디 한번 실력을 확인해볼까!”

스탐이 다시 카스턴을 휘둘렀다. 시커먼 흑강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스탐은 쿠스테로가 분명 이 일격을 맞받아 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이 오크들은 뱀파이어들만큼이나 승부욕이 높은 자들이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딸려 있는 병사들이 있다.”

하지만 쿠스테로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카스턴을 가볍게 막고 뒤로 멀찍이 물러난 뒤, 적들에게 당하고 있는 병사들을 도우러 갔다.

“약은 자식.”

[하지만 놈의 입장을 따지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걸.]

카스턴의 말에 스탐이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자신들을 전멸시킬 각오로 핵심병력을 이끌고 왔다가 되려 봉변을 당했다. 이대로 싸웠다간 뱀파이어들의 살수 아래 전멸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모두 후퇴하라!”

쿠스테로가 전장에 뛰어들자 상황이 뒤바뀌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는 강력한 오러 블레이드를 휘두르며 고전하고 있던 하이 오크들을 구했다. 상대가 하나같이 배틀러였지만 아무도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적들이 도망칩니다!”

“내버려 둬.”

살아 있는 모든 하이 오크들이 후퇴하고 쿠스테로마저 내뺐음에도 스탐은 느긋했다. 그는 카스턴을 뻗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다음 전장에서 만나자. 하이 오크족의 왕이여.”

모두가 전멸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가 기적적으로 목숨을 부지한 스탐의 지원대는 자신들을 구해준 붉은 도끼병들의 안내를 받아 무사히 불의왕국의 수도, 샐래맨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서 오시오. 동맹의 용맹한 전사들이여.”

정문을 들어오자마자 한 드워프가 환하게 웃으며 스탐들을 맞이했다. 옆집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미소를 가진 그의 몸에선 왠지 모르게 기품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스탐은 그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고선 손을 건네었다.

“귀국을 도우러 온 지원대의 대장, 스탐이라고 합니다.”

“반갑소. 나는 불의왕국의 왕, 키로프 게릴로오스 데롤이라오. 샐래맨더에 온 것을 환영하오.”

왕의 환대를 받으며 수도에 들어온 스탐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샐래맨더는 불의 정령이고, 불의왕국은 화약의 나라다. 그 이름에 부합되게 곳곳에 화약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희를 구해주셨습니까?”

며칠 전의 상황을 떠올린 스탐이 왕에게 물었다. 그들은 붉은 도끼병들과 3일 동안의 행보 끝에 이곳에 도착했다. 그 먼 거리에서 구원군이 나타나다니?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며칠 전에 한 뱀파이어가 왔었소.”

“네에?”

스탐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뱀파이어답지 않게 무척 추레한 몰골이더군. 혈왕성이라는 곳에서 따로 파견 됐다고 하던데, 히든…뭐라고 했더라? 아무튼 거기의 마스터라고 했던 것 같소."

‘카라프?’

전혀 의외의 인물이 거론되자 스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카라프가 왜 불의 왕국에 왔다는 건가?

“그가 무슨 말을 하던가요?”

“자네들의 현 상황과 위치를 가르쳐주면서 지원군을 보내 주라고 하더구려. 아, 이런 말도 했소.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의 일을 끝내고 귀환하라고.”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스탐은 끝내 궁금증을 해소시킬 수 없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오라니, 캄에덴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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