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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데빌 핸드
‘뭐, 일단은 여기에서의 일부터 끝내고 알아보자고.’
“그럼 어디서 얘기나 할까요? 서로가 할말이 많을 텐데.”
“물론이오. 따라 오시오.”
자기가 가장 원하고 있던 제안인건지, 왕이 성큼 성큼 앞장섰다. 스탐은 멀뚱 멀뚱히 서있던 뱀파이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쉬고 있어. 어디를 가도 좋지만, 절대로 사고는 치지 마라.”
“바라던 바입니다.”
스탐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뱀파이어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오랫동안의 산행과 하이 오크들과의 전투로 심신이 지친 그들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라이플 건부터 사야겠군.”
뱀파이어들이 여기 저기 흩어지는 것을 보던 카시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등에 메고 다니던 묵직한 라이플 건이 사라지자 왠지 허전했다. 아마도 직업병인가보다.
한참을 걸어가던 카시안은 라이플 건이 그려진 간판을 보고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오자마자 주인 드워프의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어서오시오.”
“쓸만한 라이플 건좀 구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소?”
“마음껏 고르게. 우리의 은인이 될지도 모르는 분에게 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지.”
드워프의 승낙을 얻어낸 카시안은 라이플 건들을 둘러보았다. 가게 곳곳에 질서정연하게 진열된 라이플 건들은 하나같이 가지각색이었다. 일단 카시안은 은색으로 빛나는 총신이 인상적인 라이플건을 꺼내어 이곳저곳을 훑어보았다. 주인이 웃으며 그 물건을 설명해 주었다.
“물건 보는 안목이 상당하군. 실버 크로우(Silver claw)를 고르다니. 은제탄환을 사용하기 때문에 언데드 놈들에게는 직방이지. 6발 장탄인데 아마 저급 언데드 따위는 한방에 10마리이상 관통시킬게야."
“필요 없소.”
카시안은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제자리에 갖다놓았다. 드워프가 무안한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에도 카시안은 태연히 다른 라이플 건에 손을 가져갔다. 이번에는 갈색과 흑색으로 도색된 바탕에 금빛으로 무늬가 박힌 화려한 총이었다. 주인이 난리를 쳤다.
“자네 정말 대단한 눈썰미로군! 저게 아마 샤프 스트라이커(Shape Striker)라는 물건이었지. 하하하! 내가 저걸 만드는 데 10년을 바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군. 5발 장탄에 내구도도 뛰어난데다 유효거리도 탁월하지. 아마 오우거도 한방에 쓰러질 물건이야. 생긴 것도 무척이나 화려하지 않은가?”
“저격수의 총 따위가 화려하면 안 되지.”
라이플 건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는 카시안이었다. 드워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정말 무서운 녀석이다.
저벅 저벅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카시안이 다시 한번 한 자루의 라이플 건을 들었다. 주인은 이번에는 꼭 고르게 만들겠다는 듯, 목청껏 고함을 질렀다.
“자네 진짜 대단한 물건을 골랐구먼! 그 물건은 나를 비롯한 드워프 장인 10여명이 5년 동안 공들여서 만든 물건이라네. 바로 콜드 스톰(Cold Storm)이라는 물건이네. 장탄 7발에 반동이 별로 안가면서도 뛰어난 명중률을 가지고 있지! 저 물건에 대해서 다 말하려면 1시간은 걸리겠지만, 단 한마디로 설명해주지. 이건 최고의 작품이야. 자네 오늘 횡재한거라고! 내가 소싯적엔 저놈으로 셀리온 평원을 활보했지. 트윈 헤드 오우거까지도 잡아봤어! 오우거는? 그놈들은 한방 쏘니까 도망가더라고. 그뿐만이 아니야! 한 50년 전쯤인가. 그때는 드래곤도…….”
“쓰레기군.”
“…….”
드워프는 침묵했다. 그리곤 고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데미지를 심각하게 받은 모양이다.
한참 진열장을 보던 카시안이 주인에게 눈빛을 보냈다. 눈빛만 봐도 의사를 알 수 있었다. 진열된 것 중에는 쓸만한 게 한개도 없다고. 드워프가 당황한 어조로 소리쳤다.
“아니, 자네. 눈이 높아도 너무 높은 것 아닌가? 까놓고 말해서 여기 진열된 라이플 건들의 대부분은 모두 불의왕국 최고의 장인인 내가 성공시킨 작품들이네. 물론 창고에는 이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있긴 하지만…….
“당장 꺼내보시오.”
“그, 그러지.”
카시안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잠시 후, 드워프는 커다란 궤짝을 가져와 바닥에 내려놓았다. 궤짝은 오랫동안 창고에 처박아놔서인지 먼지가 자욱했다. 드워프가 궤짝 위를 손으로 탁 치며 한 마디 했다.
“내 단언하지. 여기선 절대 진열대에 있는 것보다 명품은 없을 거네.”
“흙 속에서도 진주는 있는 법이지.”
카시안은 그 말을 끝으로 궤짝 안에 쌓여 있는 먼지투성이의 라이플 건을 뒤지기 시작했다. 먼지가 풀풀 날렸지만 카시안은 개의치 않았다.
한참을 지나도 카시안이 라이플 건하나 꺼내들지 않자 드워프가 만연에 미소를 지었다.
“거 보게. 자네의 말마따나 진열된 라이플 건이 쓰레기라면 저것들은 쓰레기 축에도 못들 거야.”
덥썩!
그런 그를 비웃으려는 듯, 라이플 건 하나가 올라가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카시안은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라이플 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특이하게 생긴 라이플 건이었다. 생명체의 몸속에 있는 피부조직들이 새겨져 있는 그것은 마치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
“맙소사. 그, 그것은…….”
드워프의 표정이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보지 말아야 될 것을 본 얼굴이었다. 그 점을 간파한 카시안이 시선을 옮겼다.
“내 대답이 듣고 싶나?”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카시안. 드워프는 한숨을 쉬며 눈앞에 보이는 기괴한 라이플 건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내 거짓말을 인정하지. 그 물건은 미스릴 탄까지 소화할 수 있는 내구력에 무반동. 최고의 화력을 갖춘 물건이야. 비록 한발장탄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그런 건 단점도 아니야. 하지만 그 총은 마총(魔銃)이야.”
“마총?”
드워프가 반문했다.
“그라세우스라고 들어봤나?”
“물론.”
카시안이 흑마대전을 떠올렸다. 아벨리오스에 강림한 지옥의 군대에 하이 오크, 드래곤들이 연합해 맞서 싸운 이 세계 최대의 전투! 그 당시 지옥의 군대를 이끈 게 바로 지옥의 사천왕 중 하나인 저주의 왕 그라세우스였다.
“이것은 바로 저주를 부리며 하이 오크와 드래곤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의 검지로 만든 거라네!”
“웃기는군.”
카시안은 웃었다. 그라세우스는 결국 죽었다. 드래곤들의 브레스를 뒤집어쓴 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되었을 것이 뻔한데 어째서 이게 그의 검지로 만든 거라는 말인가?
“물론, 증거는 어디에도 없네. 소문만 그럴 뿐이지. 하지만 명심하게. 300년 전 이 총이 발견된 이래, 그 총을 쥐었던 드워프들이 모두 사고로 죽었네. 바로 그 총에 맞아서! 그게 바로 그 총이 데빌 핸드라 불리는 이유야!”
카시안은 조용히 드워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드워프는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어깨에서 가해지는 충격에 가만히 있었다. 카시안이 웃으며 말했다.
“누구의 악운이 더 질긴지 실험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 또한 더럽다면 더러울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
“자, 이제 볼일은 끝났으니 이만 나가봐야겠군.
카시안은 그 한 마디를 끝으로 홀연히 가게 밖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고 있던 드워프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저토록 배짱 있는 사내는 처음이로군. 어쩌면, 저 사내라면 그 저주받은 총을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크로뎀은 다른 세 명의 뱀파이어들과 함께 불의왕국의 수도 샐래맨더를 둘러보았다. 비록 신장은 짜리몽땅한 드워프였지만 그들이 만든 분수대, 동상, 세공품들은 자신들이 흉내 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그 비쩍 마른 하프 뱀파이어 놈 말이지.”
“카시안 말이야?”
크로뎀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간단 말이야. 어째서 형은 그런 나약한 놈을 띄워주는 거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하지만 놈이 확실히 강하긴 강하지 않냐? 이번 무투대회에서는 그 괴물 같은 지온을 상대로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잖아.”
“이기진 못했지. 그리고 그때는 지온이 너무 졸전을 치렀어. 그깟 장난감 따위에 휘둘리다니 정말 바보 같더군.”
크로뎀은 막무가내였다. 그는 직접 대결하지 않는 이상 상대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베짱이 두둑하고, 나쁘게 말하면 간덩이가 부은 것이다.
“딱 까놓고 말해서 이곳에 지원부대로 파견된 뱀파이어들 중에 형을 빼면 내가 가장 강하단 말이다.”
카시안을 제외하자면 그것은 사실이었다. 29명의 지원대중 상급 배틀러는 단 4명뿐이었는데, 크로뎀은 그들을 모두 이긴 전적이 있었다.
“그러면 카시안이랑 한번 붙어보는 게 어때?”
“맞아. 싸워보지도 않고 어떻게 녀석보다 강하다는 걸 알 수 있겠어.”
“그거야 그렇지.”
크로뎀은 그들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싸워보지도 않고 왈가왈부하는 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때 한 드워프가 그들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붉은 옷에 배틀 엑스를 쥐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며칠 전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붉은 도끼병이었다. 하지만 평범해 보이진 않았다.
“블런트 마스터로군.”
드워프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기운을 느낀 뱀파이어가 말했다. 블런트 마스터는 날 끝에 마나를 부여해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도끼를 휘두르는 둔기의 절대자들이다. 하지만 불의왕국에서 블런트 마스터는 단 10명밖에 없다고 한다. 지금 그들은 그 10명중 한명을 만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