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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치열한 전쟁의 승리자
[K.C. 4418년 2월 25일]
“적이다!”
“공격!”
탕! 탕!
초소는 시끄러웠다. 무려 1년 동안 그래왔다. 적들이 침입할 때마다 자랑스러운 불의왕국의 전사들은 항상 그들을 물리쳐 왔다. 하지만 지금, 초소는 점령당하기 일보직전이었다. 50명이나 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피피핑
“크헉!”
강인한 드워프 전사들이 썩은 짚단 마냥 속절없이 쓰러져갔다. 어느새 초소 안에 서 있는 드워프는 단 한명밖에 없었다. 그를 중심으로 일단의 하이 오크들이 서 있었는데, 그들은 전원이 소드 마스터였다. 그리고 한 명의 사내가 그에게 다가갔으니 그는 바로 쿠스테로였다. 쿠스테로는 드워프에게 나직한 어조로 한 마디 했다.
“이제 곧 있으면 최후의 결전이 시작될 테지. 네놈들이든 우리든, 승자는 단 한명뿐이다.”
드워프가 씩 웃으며 쿠스테로에게 침을 뱉었다.
“흥. 4000년 전에도 그랬듯, 너희들은 멸족당할 것이다. 붉은 도끼병을 필두로 한 용맹스런 우리 불의왕국군이 반드시 네놈들의 목을 베어버릴 거란 말이다!"
팟― 데구르르
한 차례의 섬광이 일었다. 독설을 퍼붓던 드워프의 머리통이 어느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쿠스테로는 피로 얼룩진 자신의 검을 거두며 시체를 비웃었다.
“웃기지 마라. 멸망당해 하이오크족의 명예로운 노예가 될 놈들은 바로 너희다!”
“모두들 간악한 하이오크들을 전멸시키자!”
“우리의 손에 이 나라의 미래가 걸려있다!”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가 수도 샐래맨더의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총과 도끼 등으로 무장한 그들은 바로 곧 있을 결전을 치르러 갈 불의왕국의 최정예 용사들이었다.
“엄청난 군세군요. 이들이 불의왕국 최고의 총수들인가요?”
“그렇소.”
고개를 끄덕이는 왕을 보며, 스탐은 방금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중상을 입고 여기까지 왔던 병사는 하이 오크들이 쳐들어온다는 말만 남긴 채 결국 죽었다. 그러나 그의 품에서 나온 한통의 전서는 그들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었다.
“단 300명의 병력만 데리고 와서 일전을 버리자니. 웃기는 놈들이군요.”
“하지만 그렇게 불리한 조건은 아니지 않소.”
왕의 말 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아군이 유리할지도 몰랐다. ‘마스터급 전사들의 수효는 대등하지만, 병력 자체는 우리가 한참 밀리니까.’
오러 애로우가 위협이 되긴 하나, 아군에겐 드워프 총수들이 있었다. 라이플 건의 화력은 오러 애로우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이었다.
“혹시 거짓 제안은 아닐는지요? 딱 300명만 데리고 오는 척 하면서 전 병력으로 일시에 몰아친다든지 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은 그대가 잘 알지 않는가.”
“하긴.”
스탐 스스로도 하이 오크들이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전투종족인 그들이 그런 잔머리를 굴릴 리가 없잖은가. 거기다 겉으로만 보기엔 그들이 더 유리했다.
[헬팬텀은?]
‘소환할 생각 없어.’
스탐의 어조는 확고했다. 그가 헬팬텀을 쓰지 않는 데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분명히 놈을 소환한다면 도움은 될지 몰랐다. 그러나 스탐의 경험상 헬팬텀은 배틀러를 이길 수 없다. 그럴진대 배틀러들도 당하는 오러 애로우를 헬팬텀이 견뎌낼 수는 없었다.
“그럼 어서 가죠.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군요.”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로군.”
“저희에게 있어 전투란 일상이니까요."
스탐이 미소를 띠었다. 아마 저 드워프족의 왕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뱀파이어들은 전투를 빼면 시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 출격하라!”
“가자!”
“어서 하이 오크 놈들의 명줄을 따버리자고!”
서둘러 수도의 정문을 나서는 병사들의 모습은 위풍당당했다. 그들의 눈에선 단 한줌의 공포심도 찾아낼 수 없었다.
이리하여 스탐이 이끄는 300여명의 뱀파이어 드워프 연합군은 쌍방 1000명도 안되는 소수끼리의 대결이라곤 하지만, 핵심병력이 운집해 있었으니 이 전투의 패자는 곧 멸망을 뜻했다.
“제길. 내가 저깟 땅딸보 놈에게 이토록 망신을 당하다니.”
얼마나 걸었을까. 크로뎀이 붉은 도끼병들의 선두에서 걸어가고 있는 크록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자존심이 강한 그는 불의왕국 최고의 전사와 호각을 이루었다는 사실 자체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당했던 뱀파이어들의 입장은 달랐다.
“망신이라니? 듣자하니 저 녀석. 불의왕국에서 가장 강한 녀석이라던데.”
“맞아. 네가 졌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뭐라고? 네놈들 뱀파이어 맞아? 그 비싼 자존심은 어디다 팔아치웠어?”
동료들이 크록을 두둔하고 나서자 화가 난 크로뎀이 그들을 윽박질렀다. 하지만 그는 곧 누군가의 한 마디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닥쳐라.”
“제길.”
크로뎀은 이를 악물며 카시안을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저 반들반들한 얼굴을 으깨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몰랐고 결론적으로 크로뎀은 크록과의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이, 거기 드워프.”
화풀이를 할 요량인지 크로뎀이 크록에게 다가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뭐냐?”
“아까 전에는 제법이었다. 내가 싸워서 결판을 내지 못한 놈은 없었는데 말이야.”
“나도 마찬가지다. 건방진 녀석이지만 약하진 않더군.”
“쓸데없는 동정은 필요 없다. 이 몸과 비겼다고 크게 기뻐하진 말란 말이다. 만약 이 전투에서 우리 둘 다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널 죽여 버리겠다.”
“흥미로운 제안인걸.”
크록도 그리 나쁘진 않다는 표정이었다. 둘 다 살아남아야만 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절정에 오른 전사들은 항상 강자와의 대결을 고대하는 법이다.
피잉―
“위험해.”
그때였다. 크로뎀이 반사적으로 크록을 붙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방금 전 둘이 있던 곳에는 마나를 머금은 화살이 한발 꽂혀 있었다.
“습격이다!”
누군가의 외침이 신호탄이었을까? 난데없이 언덕에서 화살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모두 사격태세로!”
스탐이 서릿발처럼 연합군을 지휘했다. 무력이 전무한 키로프 왕이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드워프들도 그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타타탕! 파바방!
과연 정예답게 병사들의 응사는 재빨랐다. 콩을 볶는 듯한 총성과 함께 흑마탄이 하이 오크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금세 하이 오크 측에서 비명성이 들려왔다.
“으어억!”
흑마탄과 총탄에 맞은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연합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지만 하이 오크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기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원거리에서의 소모전을 벌이자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해져 갔다. 그만큼 배틀러의 흑마탄과 총수들의 화력은 막강했다. 그래서였을까? 하이 오크들은 최후의 카드를 꺼내었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려나보군.”
스탐이 흥미로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이 오크들은 오러 애로우 공격을 포기한 채 언덕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진정한 진검승부가 벌어지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스탐을 비롯한 뱀파이어들도 바라는 바였다.
“기세 하나는 볼만하군.”
카시안이 이제 자신의 새로운 라이플 건 데빌 핸드를 하이 오크들에게 겨누었다. 그는 원거리 화력전에서 무려 4명의 목숨을 가져갔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데빌 핸드는 한발장탄이라는 극악의 연사력을 지니고 있는 무기다. 그걸로 4명이나 죽이다니, 정말 괴물이었다.
―크하하하. 죽여라. 피를 탐하라!
그때 귓가로 환청이 들려왔다. 카시안이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기분 탓으로 여겼다. 하지만 환청은 데빌 핸드를 쥔 이후 계속해서 들려왔다. 드워프의 말이 사실인 것이다.
“그라세리우스의 검지로 만든 총이라고 했던가? 웃기는군. 닥치고 주인의 명령이나 따르시지!”
탕!
카시안은 과연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데빌 핸드가 집중력을 흩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플 건은 또 한명의 하이 오크를 쓰러뜨렸다.
“전군, 근접전 태세로!”
어느새 적들이 지척까지 다가오자 스탐이 카스턴을 꺼내들었다. 하나 같이 정예병들이었기에 무기를 뽑아드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물론 뱀파이어들은 자세만 바꿀 뿐이었다.
“모두 돌겨억!”
“와아아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외침과 동시에 쌍방의 운명을 건 대접전이 전개되었다. 숫자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 위압감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푹!
“우어억!”
적의 첫 수급은 스탐이 가져갔다. 상대는 소드 익스퍼트급의 실력자였지만 하이 배틀러 앞에선 어린 아이와도 같았다.
“이놈!”
동료의 복수를 하려는 듯 하이 오크 두 명이 양쪽에서 덤벼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같은 경지였다. 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너무 무뎌!”
스탐은 그 자리에서 허공에 뛰어 올랐다. 덕분에 하이 오크들은 서로를 찌르려다 검을 거두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중제비를 하던 그의 두 손이 떨어지는 건 그 순간이었다.
빡. 서컹.
수도를 띤 왼손은 목뼈를 부쉈고 카스턴을 쥔 오른손은 목을 갈랐다. 순식간에 두 명의 하이 오크들이 불귀의 객이 되었다.
‘기분이 어때?’
[죽이는군.]
오랫동안을 함께 하다보니 카스턴도 뱀파이어의 피에 물든 모양이었다. 스탐은 씩 웃으며 또 다시 적을 찾아 나섰다.
전투를 벌인지 얼마 되지 않아 전장은 금세 참혹한 피의 현장으로 변모되었다. 그만큼 전투는 막상막하였다. 강자는 오래 살아남았으며, 약자는 금방 죽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안돼, 가리오스!”
한 드워프의 구슬픈 절규에도 불구하고 동료는 하이오크의 일검 아래 쓰러졌다. 하지만 그도 곧 먼저 간 동료의 뒤를 따랐다. 어느새 오러 블레이드가 배를 뚫고 나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