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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치열한 전쟁의 승리자
숫자가 적다보니 전장에서 가장 먼저 죽어나가는 쪽은 평범한 병사들이었다. 곳곳에서 드워프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난무했다. 물론, 그 점은 하이 오크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멍청한 돼지 놈들, 상대해보니 아무것도 아니잖아.”
자신의 손아래 차디찬 시신이 된 하이 오크를 바라보던 크로뎀이 이죽거렸다. 여유가 생긴 크로뎀은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카시안이 신들린 듯한 검무로 하이 오크들을 죽여 나가고 있었다.
푹! 털썩.
어떻게 된 일인지 비명소리도 없었다. 그저 다크 오러를 쏟아 부어 작살내는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그는 상대의 급소만을 노려 즉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자식!”
곧 이어 두 마리의 하이 오크들이 일시에 카시안에게 검을 날려 왔다.
푸푹!
그들의 검은 정확히 카시안의 가슴을 찔렀다. 조만간 피분수와 함께 그의 신형이 떨어질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적의 육신은 연기만 풀풀 날릴 뿐이었다. 두 하이 오크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타앙!
순간 요란한 총성과 함께 피가 튀었다. 어느새 카시안의 눈앞에는 두 명의 하이오크가 뇌수를 흘리며 싸늘한 시신이 되어 가고 있었다.
―크후후! 내말이 맞지? 나만 있으면 어떤 놈이든 다 부숴버린다니까.
헤드 샷 한방으로 둘이나 처치했음에도 카시안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는 그이지만, 뇌리로 전해지는 역겨운 속삭임은 정말 참기 어려웠다.
“정말 재수 좋은 놈이군.”
크로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아직도 카시안의 실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운이 좋은 놈이라는 생각만 든 것이다.
하지만 크로뎀은 더 이상 한눈을 팔수가 없었다. 일단의 하이 오크들이 자신에게 검을 날려 왔기 때문이다.
“젠장!”
크로뎀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적은 단 세 명이었다. 그러나 모두 중상급의 소드 마스터였다. 1대1 대결은 자신 있었지만 셋이서 동시에 검을 날려 오니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차창!
구원의 손길이 찾아온 건 그때였다. 누군가가 크로뎀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크로뎀이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페리알!"
“좀 늦었냐?”
“전혀.”
기세가 오른 크로뎀은 페리알과 함께 적들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페리알은 그가 가문을 한참 일으키고 있을 때 도움을 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둘 사이의 우정은 매우 돈독했다.
“어이, 나는 안보이나?”
그때 한 드워프가 나타났다. 크로뎀이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쏘아보았다.
“너는 왜 왔냐?”
“싸우러 왔다. 왜?”
“방해나 하지 마라.”
크로뎀이 그렇게 투덜거리며 하이 오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크록이 한 명을 맡아주니 상황은 점점 유리해졌다.
“커헉.”
결국 한 소드 마스터가 크로뎀에게 죽임을 당했다. 웬만큼 강한 상대가 아니면 1대1 대결은 그의 승리였다. 물론 그와 크록은 샐래맨더에서 처절하게 치고 박았다. 그러나 그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계속 싸우면서도 내력은 비축해 두었던 것이다.
“싱거운걸. 겨우 이 따위 실력이라니.”
크로뎀이 이죽거렸다. 방금 전만해도 고전에 고전을 거듭하고 있던 놈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이상해. 검술만 따지면 소드 익스퍼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페리알의 눈은 예리했다. 사실 중상급의 소드 마스터 셋이라면 1대1로 싸운다고 해도 약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이기다니, 왠지 모르게 이상했다. 하지만 더 이상 잡담을 나눌 여유는 없었다. 다수의 하이 오크들이 자신들에게 몰려왔기 때문이다.
“이번엔 힘들겠어.”
줄기줄기 느껴지는 여섯 개의 오러 블레이드를 보던 크로뎀이 이를 악물었다. 크록과 함께 내력을 비축해 두었다곤 하지만, 몸 자체는 만신창이였다. 이 상태로는 힘들었다.
“젠장, 그래도 맞서 싸우는 거다!”
“물론이지!”
크로뎀의 말에 크록이 맞장구를 쳤다. 아까전만해도 지독하게 싸웠던 사이라고는 믿기지가 않는 모습이었다.
스탐은 계속해서 걸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하이 오크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말단 병사든, 소드 마스터든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치열하군 그래.]
“응.”
스탐은 전장을 둘러보았다. 양측의 말단 병사들은 거의 전멸당한 상태였고, 이제 핵심 전력들 간의 대결만이 남아 있었다. 놀랍게도 배틀러들은 소드 마스터들을 하나같이 압도하고 있었다.
‘하이 오크들이 아무리 싸움에 미친놈들이라도 51명은 상식적으로 터무니없는 소리야.’
스탐이 도리질을 쳤다. 마스터의 비율이 39대51로 한참 뒤지는 데도 대등한 전력이라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하이 오크들은 소드 마스터임에도 불구하고 검술 자체는 보잘 것 없었다. 뭔가 냄새가 났다.
챙!
하지만 더 이상 딴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맞수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시 만나는군. 뱀파이어. 이번에는 반드시 네놈의 명줄을 끊어버릴 테다.”
“누가 할 소리.”
스탐은 쿠스테로에게 소드 마스터에 대한 비밀을 물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도리질을 쳤다. 물어본다고 순순히 대답해줄 상대가 아니다.
슈우욱
생각을 정리한 스탐이 카스턴을 날리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금세 둘의 검이 허공에서 춤추기 시작했다.
“명심해라! 이 싸움의 승자가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쿠스테로의 말 대로였다. 전쟁에서 이기는 쪽은 오스베르의주인이 된다. 그리고 우두머리간의 대결에서 이기는 쪽은 전쟁의 승리자가 된다. 스탐도 그걸 모를 리 없다.
“누가 너 따위에게 진대!”
카스턴이 섬광을 가르며 그것은 혼신의 일격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쿠스테로가 노리던 바였다. 그는 능숙한 검술로 카스턴을 흘린 뒤, 폼멜을 쳐서 상대의 검을 손아귀에서 놓게 만들었다.
“나의 승리다.”
바닥에 떨어진 카스턴을 보던 쿠스테로가 크게 웃었다.
“글쎄.”
하지만 검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스탐은 여유 만만했다.
휘이익!
상대가 갑자기 달려들자 당황한 쿠스테로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방심한 상태에서 히든 브레이커의 귀신같은 손놀림을 피할 수는 없었다.
“커헉.”
“맛이 어떠냐.”
“네놈, 검사가 아니었군!”
“우리 뱀파이어는 하찮은 쇠붙이 따위에 의지해서 싸우는 나약한 종족이 아니거든.”
스탐이 쿠스테로를 비웃었다. 사실 지금 상황은 그의 실수였다. 다른 뱀파이어들이 모두 적수공권인데 자신이 검사라는 순진한 착각을 하다니!
“큭, 질수야 없지!”
쿠스테로는 검을 고쳐 쥐었다. 자신이 지는 순간, 하이 오크는 멸망당할 것이다. 이를 악물며 검을 뻗었다.
지속적으로 복부의 고통이 몰려왔음에도 그의 검은 약해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강자였다. 하지만 눈앞의 적도 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창창창!
무려 수십 합의 검투가 벌어졌음에도 아직까지 승패는 갈리지 않았다. 그만큼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그러나 쿠스테로는 이미 자신의 패배를 예감하고 있었다. 점점 거칠어져 가는 자신에 비해 상대의 숨결은 너무도 여유로웠다. 질 수 없다고 속으로 수없이 다짐하고 있었지만 정신만으로는 실력의 차를 극복할 수 없었다.
피잉!
그때였다. 세발의 화살이 스탐에게 날아왔다. 강렬한 마나를 머금은 그것은 1대1 전투에 심취해 있던 적장의 등에 정확히 꽂혔다.
“윽!”
극심한 고통에 스탐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세 명의 하이 오크들이 검을 빼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모두 소드 마스터다. 쿠스테로가 그들을 꾸짖었다.
“무슨 짓이냐 이놈들!”
“어쩔 수 없습니다 주군이시어.”
“이자에게 패한다면 저희 일족은 멸망이지 않습니까?”
쿠스테로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자신의 열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잘 생각해야만 했다. 명예냐, 실리냐. 한참 갈등하던 쿠스테로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적들은 한명도 없었다.
그는 결국 엄지를 거꾸로 세웠다. 스탐이 웃으며 말했다.
“비겁하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애초에 전투란 승리자를 위한 자리니까.”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비난보다 더 모욕적인 소리였다. 그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서 저놈을 죽여야 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자, 어서 공격……."
파학!
그때였다. 한 하이 오크가 둔탁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졌다. 일어서지 않는 걸 보니 죽은 것 같았다.
“누구냐!”
쿠스테로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불청객을 쳐다보았다. 추레한 검은 옷차림을 한 사내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스탐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