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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치열한 전쟁의 승리자
“카라프!”
“오랜만이다 스탐.”
스탐이 환하게 웃으며 카라프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궁금증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그리고…….”
“잡다한 얘기는 나중에 하지.”
스탐의 말을 중도에 끊어버린 카라프는 쿠스테로를 응시했다. 먹이를 갈구하는 야수의 눈빛.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너는 양측의 두 놈을 맡아라. 난 우두머리를 맡을 테니.”
“예.”
고개를 끄덕인 스탐은 카스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이 저절로 날아와 손아귀에 잡혔다. 마법검이라는 것이 이럴 때는 무척 편리했다.
[무슨 이유로 날 잡은 거지?]
카스턴은 무척 화가 난 어조였다.
'무슨 이유라니? 당연히 네가 필요해서지.'
[일개 쇠붙이가 얼마나 쓸모 있겠어?]
‘겨우 그런 걸로 삐치기냐? 아까한 말. 진심이 아니란 거 너도 잘 알잖아, 응? 그러니까 화 풀고 나 좀 도와주라.'
[한번만 봐주지.]
카스턴은 그제서야 다소 누그러진 어조였다. 스탐은 씩 웃으며 우측의 소드 마스터에게 일검을 날렸다.
“크윽!”
하이 배틀러의 막강한 힘에 금세 그가 밀려나갔다.
"이, 이놈!"
눈 깜빡할 사이에 동료가 공격당하자 좌측의 하이오크가 당황한 얼굴로 달려들었다. 스탐은 냉랭한 어조로 그들의 검에 맞섰다. 그의 눈빛은 분노하고 있었다.
“비겁하게 기습공격을 하다니, 편히 죽을 생각은 말아라!”
“그럼 우리도 한판 붙어볼까?”
스탐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카라프가 쿠스테로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양손은 시꺼먼 흑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글렀군.’
쿠스테로는 절망했다. 상대는 스탐보다 더 강했다. 스탐에게도 고전한 자신이 저 괴물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쉽게 당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야아압!”
쿠스테로는 우렁찬 고함성과 함께 검을 날렸다.
휘이익.
섬광 같은 일격에도 불구하고 검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쿠스테로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하단이 허전함을 느꼈다.
“으헉!”
그와 동시에 복부에서 끔찍한 고통이 우러나왔다. 쿠스테로의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아직 멀었어. 정당한 대결을 엎지른 대가는 받아야지.”
카라프는 둘의 싸움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나보다. 그래서인지 냉정한 히든 브레이커임에도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퍼벅!
가느다란 발이 비수처럼 턱에 꽂혔다. 쿠스테로는 허공을 한바퀴 돌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간신히 몸을 일으키긴 했지만 그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비겁한 전사의 팔은 가치가 없지.”
카라프는 수도를 세운 채 쿠스테로의 팔을 향해 휘둘렀다.
푸악! 촤아아아.
둔탁한 소리와 함께 평생을 함께해온 왼팔이 피를 뿜으며 잘려나갔다.
“으아악! 내 팔!”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쿠스테로가 미친 듯이 바닥을 굴러 다녔다. 아마 정신적인 충격이 엄청날 것이다. 전사에게 있어 팔이란 생명과 같았으니까.
“쿠스테로님!”
일단의 하이오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카라프를 공포심 어린 얼굴로 바라봤지만, 히든 브레이커의 마스터는 더 이상 살수를 쓰지 않았다.
“왜 죽이지 않는 겁니까?”
하이 오크들이 쿠스테로를 부축해 가는 것을 본 스탐이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이미 두 소드 마스터를 저 세상으로 보낸 상태였다.
“놈은 하이 오크들의 정신적인 지주다. 만약 죽었다면 하이 오크들은 미친 듯이 날뛰어 아군의 피해가 커지겠지. 하지만 군주가 살아있는 이상, 가신들이 취할 행동은 한가지뿐이다.”
“과연 그렇군요.”
스탐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이오크들의 고함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후퇴하라!”
“쿠스테로님이 위독하시다. 전군 후퇴!”
하이 오크들의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연합군과 한참 일전을 치르고 있던 그들은 미련 없이 전장을 이탈했다. 태반이 넘게 죽었지만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크로뎀들에게 있어 구사일생이었다.
“휴우, 다행이군.”
셋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게 신기해보일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이긴 건가.”
물러간 하이 오크들을 보고 있던 스탐이 믿기지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던 전투였다. 그런데 결과는 아군의 대승이었다.
“이, 이겼다!”
“만세! 만세!”
어느새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연합군의 생존자들이 서로를 얼싸 안고 기뻐하고 있었다. 아마 이날은 왕국의 국경일이 될 것이다. 자신들의 목숨을 위협하던 적들을 최초로 이긴 날이었으니까!
그때 카라프가 스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어서 수도로 돌아가는 게 좋을듯하군."
"무슨 일이시기에 그러십니까?"
스탐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답지 않게 조급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의 표정이 눈에 띄게 카라프를 닮아갔다.
“언데드들이 대대적인 침략을 가해왔다. 벌써 무한전선은 대부분이 밀린 상태이고 며칠 후면 길가리아까지 올 것이다.”
1년 동안 지속되었던 하이오크들과 불의왕국 드워프간의 분쟁은 단 한 차례의 전투로 희비가 엇갈렸다. 이 전투로 인해 두 종족 사이의 존망은 확실해졌다.
“만세!”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오는 연합군의 용사들을 향해 수많은 갈채가 쏟아졌다. 스탐은 환호하는 그들을 기분 좋게 맞이하며 왕에게 다가갔다.
“역시 자네들이 승리할줄 알았어.”
“하지만 아직 놈들은 살아 있습니다.”
“그래도 결국 끝난 전투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었던지라, 스탐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아직 하이 오크들의 병력은 건재했지만 한번 기운 전세는 뒤바꿀 수 없었다.
“오늘은 이 왕국이 건국된 이래로 가장 기쁜 날이다!”
"와아아아아!"
왕의 한 마디가 끝남과 동시에 드워프들의 우레 같은 환호성이 샐래맨더를 가득 메웠다. 어느 때보다 들떠있는 그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왕은 병사들에게 손을 치켜들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창고에 가서 술통을 있는 대로 가져오너라! 술은 오늘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
이윽고 드워프 병사들이 어마어마한 양의 술통을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동안 비축해놓은 술들을 모조리 꺼내 놓은 것 같았다.
“자, 마음껏 마셔라!"
벌컥 벌컥
그와 동시에 드워프들이 팔뚝만한 술잔을 넘기기 시작했다. 비단 드워프들 뿐만이 아니었다. 뱀파이어들도 그들과 함께 축배를 즐기고 있었다. 종족은 달랐지만, 서로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정겨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기쁘지 않은 뱀파이어가 두 명 있었다.
“사실입니까?”
“히든 브레이커는 거짓정보를 흘리지 않는다.”
말을 마친 카라프는 맥주잔을 입에 갖다대었다. 누런 액체가 짜릿하게 목줄기를 타고 내려갔지만, 기분이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너도 잘 알다시피, 놈들은 60년 동안 잠잠했다. 데스 나이트도 잘 출몰하지 않았지. 그래서 우리는 놈들이 침공을 포기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놈들의 전력은 듀라한이 2만에, 데스 나이트만 100명이다.”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스탐이 미리 본론을 꺼내었다. 같은 히든 브레이커이긴 하지만 그가 단순히 이 소식만 전하려고 이 먼 곳을 찾아올 리는 없었다.
“중요한 전투도 끝났으니 뱀파이어들을 모두 귀환시켜라.”
“모두 말입니까? 그건 무리입니다.”
스탐이 고개를 저었다. 비록 이겼다곤 하지만, 자신들이 모두 빠진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전투가 끝난 직후 놀랍게도 뱀파이어들은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 그 대신 4명의 블런트 마스터가 죽었다. 물론 적의 소드 마스터가 절반이나 죽은 것을 감안한다면 대승이었다.
“아직 놈들은 소드 마스터가 태반이나 남아 있습니다. 거기다 쿠스테로도 팔 하나만 잃었을 뿐이고…….”
“자네는 지금 이 상황에서 뭐가 중요한지 분간이 안 가는 건가? 설마 저 따위 난쟁이들의 존속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
스탐은 할말을 잃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맹국을 돕고 하이 오크들을 멸족시키기 위해 왔다곤 하지만 자국의 존망만큼 중요한 일은 없었다. 결국 그는 카라프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 보낼 수는 없습니다. 딱 10명만 여기에 남겨두고 귀환하겠습니다.”
“흠, 내키진 않지만 나쁘지도 않군. 그런데 이곳을 맡을 새로운 대장은 누구로 정할 거지? 미리 말해두겠지만 넌 무조건 가야 한다.”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스탐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내 미소를 띠며 한 사내에게 시선을 옮겼다.
“쓸만한 녀석이 하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