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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장으로서의 자격
다음날, 스탐은 뱀파이어들을 모두 소집해 언데드들의 침략소식을 전하였다.
“뭐라고?”
“이 언데드 놈들이 기어이!”
예상대로 뱀파이어들은 역정을 부리며 침략자들에 대한 분노를 불태웠다. 그런 그들을 말없이 지켜보던 스탐은 별다른 설명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본론을 꺼내었다.
“카라프님과의 협상 끝에, 19명은 본국으로 귀환하고 나머지는 이곳에 남아 잔당을 토벌하기로 했다.”
“그, 그럴 수가.”
“하지만 그것도 괜찮겠어.”
뱀파이어들은 처음엔 당황했지만, 이내 수긍했다. 이곳에서의 상황이 너무도 좋아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동의하는 것을 확인한 스탐이 바닥에 선을 그었다.
“나를 기준으로 여기에 남을 녀석들은 왼쪽에 서고, 귀환할 녀석들은 오른쪽에 서라.”
이윽고 뱀파이어들이 스탐의 양쪽에 나란히 서기 시작했다. 왼쪽에는 크로뎀을 비롯한 9명이 섰고, 오른쪽에는 나머지 19명이 섰다. 신기하게도 예정된 숫자와 얼추 비슷했다. 딱 한 명만 옮기면 되었다.
“카시안, 너는 남아.”
자신을 왼쪽으로 끌어 옮기자 카시안이 왜 하필이면 자신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스탐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상급의 소드 마스터를 죽였으면서도 못 맞추는 게 없는 최고의 저격수잖아.”
“그게 여기에 남는 거와 무슨 상관이 있지?”
“상관이 있다.”
스탐의 어조는 단호했다.
“이해를 못하겠군.”
"이해하라는 소리는 안했다."
"쓰레기 같은 뱀파이어 놈."
"즐."
"……."
카시안은 스탐의 한 음절에 더 이상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반박은 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할 말이 없었다. 스탐은 잔인한 미소로 그런 카시안과의 설전에 쐐기를 박아 넣었다.
"침묵은 긍정이라고 여겨야겠지?"
"제길."
“아무튼, 병력이 갈라지니까 대장도 따로 정해야 돼. 난 귀환해야 하니 남는 10명중에 뽑아야겠지.”
“대장이야 당연히 내가 맡아야 되는 거 아냐?”
그때 크로뎀이 나섰다. 매우 당연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남은 뱀파이어들 중 자신보다 나은 놈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하지만 스탐의 생각은 그와 전혀 달랐다.
"대장은 카시안으로 정한다."
"뭐라고?!"
크로뎀은 스탐의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윽고 그가 역정을 부리며 스탐에게 따졌다.
"왜지? 왜 내가 아니라 저런 하프 뱀파이어 놈 따위에게 대장자리를 주는 거야?"
“힘을 숭상하는 뱀파이어가 가장 강한 녀석을 대장으로 삼는 건 당연한거 아냐?"
“뭐라고?”
스탐이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조용히 속삭였다.
“억울하면 놈을 이겨 봐.”
그것이 형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그 말을 끝으로 스탐은 일행들을 이끌고 수도 밖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한참 보고 있던 크로뎀이 카시안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흥, 두고 보라지. 반드시 저놈을 때려눕히고 강제로 대장자리를 꿰찰 거다!'
크로뎀은 그렇게 다짐했다. 베르크 가가 배출한 최고의 뱀파이어인 자신이 저런 하찮은 하프 뱀파이어보다 평가 절하되다니, 정말 참을 수 없었다.
“하아…. 이제 끝이구나.”
횃불만이 어두운 암흑 속을 비추고 있는 가운데, 생기 없는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가진 것을 모든 잃은 자의 비참한 푸념이었다.
쿠스테로는 절망했다. 4000여 년 동안 옛 조상들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지만 현실은 너무도 암담하기만 했다. 최상급 소드 마스터로 모든 하이 오크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였지만 지금은 종족의 재건이라는 사명에 불타오르던 투지도 사라진 상태였다. 소중한 오른 팔과 함께.
‘그들에게서 강력한 힘을 얻었는데도 이 꼴이 되다니.’
상황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에 그 좌절감은 더욱 더 깊었다. 쿠스테로는 오년 전, 자신들을 찾아온 정체불명의 인물들을 떠올렸다.
“너희들에게 힘을 주겠다.”
그 한 마디를 끝으로 그들은 하이 오크들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주었다. 그로 인해 단 다섯 명에 불과했던 소드 마스터가 10배 이상으로 불어났다.
“우리에게 이런 힘을 준 이유가 뭐요?”
경악한 쿠스테로가 물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궁금증을 풀어주지도 않은 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은혜를 베풀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족의 앞가림하기에도 바빴기에 곧 생각을 접은 쿠스테로는 일족을 이끌고 지상에 출도했다. 드워프들과 치열한 국지전을 벌이며 아벨리오스의 전황을 확인한 쿠스테로는 유로키로를 선봉으로 전면전을 일으켰다. 이변이 없었다면 지금쯤 오스베르 산맥의 주인은 자신들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님!”
그때 한 하이 오크가 다가왔다. 그는 쿠스테로의 모습을 꼭 빼닮았다. 젊어 보이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적들이 코앞까지 다가왔습니다!”
“후후후.”
하지만 쿠스테로는 느긋했다. 아무리 싸워봤자, 전쟁은 아군의 패배가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뱀파이어 19명이 돌아갔다는 소식은 들었다. 이렇게 되면 전력적인 면에서 유리한건 오히려 아군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겨도 진 것이다.’
쿠스테로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다. 설사 지금 오는 적들을 격퇴한다고 해도 뱀파이어들이 자신들을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사흘 전에 자신의 팔을 자른 뱀파이어만 해도 자신을 한참 초월하는 괴물이 아니던가.
“쿠에르.”
“예.”
쿠에르는 즉시 무릎을 꿇고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쿠스테로는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이 꼴이 된 지금, 녀석은 일족의 마지막 희망이다.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너에게 50명의 병사들을 주겠다. 지금 당장 도망쳐라.”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쿠에르가 놀라 소리쳤다. 쿠스테로는 조용히 그의 앞에 다가가 두 손을 어깨에 얹었다.
“명령이고, 부탁이다. 쿠에르. 너마저도 죽게 된다면 우리 일족은 정말 멸망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우들을 버리고 저 혼자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괴롭겠지만 그래야만 한다.”
“아버님…….”
어느새 쿠에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도 쿠스테로가 왜 그러는 지는 잘 알고 있었다. 적들의 목적은 자신들의 멸족이다. 단 소수만이라도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만이 멸족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럼,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쿠에르는 이를 악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쿠스테로는 이내 갑옷을 주섬주섬 입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리의 미래를 멋지게 박살낸 적들을 맞이하러 가보실까.”
아들이 도망갈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완고한 목표가 생긴 쿠스테로의 얼굴에는 투지가 감돌고 있었다. 외팔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것조차 그의 행동에 장애가 될 수는 없었다.
캄에덴으로 돌아간 스탐 대신 대장이 된 카시안은 사흘간의 휴식을 취한 뒤, 곧장 키로프에게서 얻은 20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하이오크들을 기지를 향했다. 곳곳에서 산발적인 매복공격이 가해졌지만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 버렸기 때문인지 그들은 별다른 힘도 못쓰고 소탕 당했다.
터벅터벅
10명의 뱀파이어들을 위시한 드워프의 대군은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들의 앞에는 거대한 동굴을 중심으로 수천 명의 하이 오크들이 포진해 있었다.
“여기가 바로 놈들의 기지인가보군.”
선두에 서 있던 카시안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새로운 대장이 된 그는 스탐이 캄에덴으로 돌아감에 따라 연합군의 지휘권을 고스란히 쥔 상태였다.
“적들이 상당한데, 이길 수 있을까. 우리의 유능하신 대장 나리?”
크로뎀이 카시안을 힐끗 쳐다보면서 비아냥거렸다. 스탐이 뜻밖에도 자신이 아닌 그를 대장으로 내세운 탓에 크로뎀으로선 카시안이 못마땅하기만 했다.
“네 녀석만 나대지 않는다면 충분히 이긴다.”
“뭐라고? 이 자식이…….”
대번에 얼굴이 시뻘게진 크로뎀이 카시안을 죽일 기세로 노려보았다.
“쳇, 상대를 말아야지.”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혓바닥만 놀리면 어지간해선 넘어가지 않는 지온도 도발시키는 놈이다. 말싸움만 하면 자신만 손해를 볼 뿐이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단 한 마디만으로 그를 제압한 형은 놀라운 인물이었다.
“호오, 건방진 드워프놈. 너도 있었냐?”
크로뎀의 시선이 간 쪽은 크록이었다.
“보면 모르겠냐? 멍청한 뱀파이어 놈아.”
삼자가 들으면 시비가 다분히 묻어나는 둘의 대화였다. 하지만 사흘 전의 전투 이후로 그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호각으로 싸워 라이벌로 여기고 있던 것이 같이 싸우면서 우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아무튼, 드디어 하이오크의 멸족이 눈앞에 왔군.”
크록이 눈앞에 보이는 동굴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러. 놈들은 아직도 병력 자체는 물론이고 소드 마스터도 우리보다 많아. 그리고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쿠스테로도 살아 있어.”
“흥. 나도 알아.”
크로뎀의 말에 크록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크로뎀의 말마따나 아직 아군이 이겼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