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크슬레이어-91화 (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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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장으로서의 자격

“쿠스테로라.”

선두에 서 있는 휘황찬란한 갑옷의 하이오크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크로뎀이 흥미로운 미소를 띠었다.

“외팔의 최상급 소드 마스터라니? 참 처량하군.”

크로뎀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상급 배틀러고, 쿠스테로는 최상급 소드 마스터다. 경지만으로 따지자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 전의 전투에서 팔 한쪽을 잃었다. 무기를 쓰든, 쓰지 않던 간에 전사에게 있어 팔 하나를 잃었다는 것은 그 힘의 태반을 잃었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놈의 수급은 내가 가져갈 것이다.”

크로뎀은 이미 자신이 적장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사격준비.”

카시안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가 데빌 핸드를 꺼내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총수들이 일제히 라이플 건을 꺼내들었다. 하이 오크들도 응사를 하기 위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는 상태였다.

“발사!”

타타탕! 타타타타타탕!!

요란한 총성과 함께 총탄들이 하이오크들에게로 쇄도했다. 금세 앞대열의 하이오크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으악.”

하지만 그 점은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총성에 묻혀서 그렇지, 하이 오크들도 화살을 쏘고 있었다. 물론 그 화력의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돌격하라!”

근접전을 먼저 선택한 쪽은 하이 오크였다. 아무리 오러 애로우가 강하더라도 라이플 건의 막강한 화력을 압도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적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지. 돌격!”

스틸레토를 꺼낸 카시안이 선두에서 달렸다. 병력이 그렇게 우세하지도 않건만,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와아아!”

지휘관이 앞장서자 병사들이 뒤를 따르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렇게, 두 종족간의 숙명을 거머쥔 혈전이 본격적으로 치러지고 있는 순간이었다.

피잉― 푹!

“크워어억!”

달려오던 하이 오크 한명이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다. 카시안이 접전을 벌이기 전에 빠른 손놀림으로 화살을 한발 쏘아 올린 것이다. 과연 그는 뛰어난 센스의 소유자였다. 물론 그의 능력만으로 곧이어 벌어지는 치열한 혈투의 장을 막을 순 없었다.

“흐아아!”

챙 챙!

“죽어라!”

서로가 서로의 멸망을 원했기 때문에 전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했다. 곳곳에서 고함이 난무했고, 곳곳에서 비명이 난무했다. 바람을 가르는 병장기들은 죽음의 손길이 되어 적의 살 속을 헤집어 그 안의 생명을 훔쳐가고 있었다.

“모두 비켜! 하찮은 졸개들은 모두 비키란 말이다!”

어지러운 난전 중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양떼 한가운데의 늑대와도 같은 그는 먹잇감을 직접 고르고 있는 듯 주변의 적들에겐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다.

“적장은 어디 있냐? 겁쟁이가 아니라면 당장 내 앞에 나타나라!”

한 마리의 하이오크를 베어 넘긴 크로뎀이 소리쳤다. 무려 수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벌이는 전장이었기에 그가 목적으로 두고 있는 적장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크로뎀은 막무가내였다.

‘반드시 놈을 쓰러뜨려서 빌어먹을 하프 뱀파이어 놈의 콧대를 꺾어버리겠다.’

카시안이 그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크로뎀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카캉!

그때였다. 거칠 것 없이 전장을 휩쓸고 다니던 흑강이 누군가의 일검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크로뎀의 표정은 무척이나 환했다.

“네놈이 쿠스테로냐?”

“그렇다 뱀파이어여.”

초로의 하이오크, 쿠스테로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순간 크로뎀의 두 손이 주체를 못하고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겁을 먹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흥분해서일 뿐. 그것은 강자와의 싸움을 갈망하는 뱀파이어가 취하는 보편적인 현상의 일종이었다.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군그래.”

“하지만 네 녀석 따위에게 질 정도는 아니다.”

자신의 잘려진 한 팔에 대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쿠스테로는 태연했다. 그는 오히려 검을 겨누며 크로뎀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힘을 쓸 수 있을지 기대해볼까!”

콰캉!

최강의 전투종족임을 자처하는 두 사내의 검과 주먹이 허공에서 맞붙었다. 싸움을 빨리 끝내려는 듯, 쿠스테로의 검은 어느새 완성형 오러 블레이드로 변해 있었다.

“제길!”

크로뎀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한 팔을 잃었다곤 하지만 체내의 마나 자체를 잃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직이다. 이놈!”

기선을 제압한 하이 오크족 제일의 전사는 크로뎀에게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시퍼런 오러 블레이드가 또다시 다가왔다.

“으압!”

투아앙―

하지만 크로뎀도 상급의 배틀러다. 쿠스테로의 검을 피한 크로뎀은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챙챙 투캉!

일단 검을 다루는 쿠스테로보다 유효거리가 짧은 크로뎀이 그에게 바짝 달라붙자 뱀파이어 특유의 폭발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맛이 어떠냐!”

신이 난 크로뎀이 계속해서 주먹을 날렸다. 상황은 그에게 절대적이었다. 비록 경지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쿠스테로는 외팔이었기 때문에 공격의 주도권은 일지감찌 크로뎀 틀어 쥔 상태였다.

“하악 하악.”

하지만 시간이 점점 지날수록 지치는 쪽은 크로뎀이었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쿠스테로는 지치기는커녕 숨소리조차 내뱉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지금쯤이면 분명히 놈이 탈진했어도 한참 탈진했어야 정상인데!’

크로뎀으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이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방심은 죽음의 지름길이다!

너무 당황해한 탓이었을까. 그는 쿠스테로가 거리를 벌리면서 휘두른 검을 피하지 못했다.

“커헉”

단말마의 비명과 함게 크로뎀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치명타는 피했지만 승부는 이미 결판난 상태였다.

처억.

자신의 목 언저리에 쇠붙이가 놓여져 있음에도 크로뎀은 왜졌는지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했다. 그의 내심을 짐작했는지 쿠스테로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일족의 군주지만, 너는 일개 뱀파이어에 불과하다. 아무리 조건이 같아도 애초에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다르단 말이다!”

“그렇군.”

크로뎀은 솔직하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이 싸움은 자신의 완패였다. 쿠스테로의 말 대로였다. 자신은 단순히 카시안의 콧대를 누르기 위해 그에게 덤벼들었지만, 그는 일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시련도 맞이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팔만으로 혈기왕성한 상급의 배틀러를 쓰러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잘가라. 뱀파이어. 유쾌한 저승길 친구가 되겠군.”

쿠스테로의 사형선고에 크로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후회가 될 때가 없었다. 베르크 가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자신이 하찮은 공명심 때문에 허무하게 목숨을 내놓게 되다니!

타앙!

구원의 총성이 울려온 건 그때였다. 막 목을 치려던 쿠스테로가 깜짝 놀라 크로뎀에게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인근에 있던 하이 오크 하나가 머리통이 터져 나가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웬 놈이냐!”

처참한 시체가 된 하이오크를 바라보고 있던 쿠스테로가 소리쳤다. 모름지기 무기란 쓰는 자의 힘이 배여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오크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단순히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 라이플 건은 이단아였다.

터벅터벅

혼란스러운 난전의 와중에 다가오는 인물이 있었다. 그가 쥔 검에는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아마 주변에 있는 시체들의 것이리라.

쿠스테로는 조용히 그를 응시했다. 피가 묻어 윤기를 잃었지만 그 아름다움만큼은 가려지지 않는 은회색의 머리칼에 어둠이 약간 드리워진 창백한 피부. 거기에 연약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한 마리의 맹수 같은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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