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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장으로서의 자격
“꼴이 가관이군.”
“카, 카시안!”
카시안은 크로뎀의 외침에 대답 하는 대신, 들고 있던 라이플 건과 활을 크로뎀에게 던져주었다.
“보관해라.”
단순한 한 마디였지만 크로뎀은 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카시안이 가지는 위압감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일단 통성명부터 해야겠군. 내 이름은 쿠스테로. 하이 오크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우두머리이다.”
“카시안이다.”
장황한 쿠스테로에 비해 카시안의 소개는 짤막하기 그지없었다.
“카시안이라. 그러고 보니 유로키로를 죽인 놈이 바로 너였군그래.”
“…….”
카시안은 침묵만으로 쿠스테로의 물음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유로키로는 하이 오크 내에서 자신 다음가는 강자다. 그런 그를 쓰러뜨릴 정도면 적어도 자신과 동급일 것이다.
“만만한 상대는 아니로군.”
쿠스테로가 크로뎀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적은 방금 전 싸웠던 상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한 상대였다.
별다른 대화가 없자 둘은 곧장 검을 뻗었다.
챙!
금속끼리의 맑은 마찰음이 생겨났다. 하지만 울려 퍼지기도 전에 카시안의 쾌검은 쿠스테로의 급소를 향하고 있었다.
쿠스테로는 직감했다.
‘이 싸움이 내 생애 최후의 대결이 되겠군.’
스르르렁!
스틸레토를 가까스로 피한 쿠스테로가 카시안과 바짝 붙어 힘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힘으로 싸울 생각은 추호도 없는 지 곧장 뒤로 몸을 뺀 카시안은 빠르게 그를 지나쳤다.
팟.
단순히 지나쳤음에도 불구하고 쿠스테로의 팔 언저리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크으으.”
쿠스테로가 인상을 쓰며 카시안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한 팔이 베인 탓에 상황은 절대적으로 위험했다.
그러나 카시안은 그런 그를 느긋하게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지혈할 때까지 기다려준다는 듯이. 말은 한 마디도 안했지만 그것은 일종의 도발이었다.
“놈! 나를 우습게 보지 마라!”
금방 지혈을 마친 쿠스테로가 자신의 완성형 오러 블레이드로 카시안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패도적이라고 하는 하이 오크 검술의 절정에 이른 것이었다. 적을 사정없이 몰아치는 묵직한 일검들!
휘휙 휘휘휘휙!
“이런!”
그러나 쿠스테로는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살갗을 베는 감각은커녕 쇠붙이와 부딪히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적은 자신의 공격을 너무도 쉽게 피하고 있었다.
‘제길. 팔이 두개였다면!’
하이 오크의 검술은 양손이 기본이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더라도 팔이 한쪽이니 반감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챙!
순간 가벼운 마찰음이 튀어나왔다. 바람만 가르다가 금속이 금속을 만났다는 것. 그것은 공격의 주도권이 바뀌는 시발점이었다.
챙채채챙챙!
“으으으.”
쿠스테로가 힘없이 밀리기 시작했다. 상대의 검술은 극쾌를 추구하는 초속의 검격! 거기에다 강력한 회색의 마나를 지니고 있어 자신의 완성형 오러 블레이드로 제압할 수도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크로뎀과의 싸움에서 힘까지 소진된 터라 쿠스테로는 결국 패했다.
푸욱.
차가운 금속이 부드럽게 살을 파고드는 순간, 시대를 잘못만난 비운의 군주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닥에 흥건히 고이는 핏물이 피부를 자극했지만 쿠스테로는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쿠스테로 전하!”
“이럴 수가. 전하께서 돌아가시다니.”
믿고 있던 유일한 버팀목이 무너지자 하이오크들이 절규했다.
“모두 최후의 한명까지 싸워라!”
정신적 지주가 죽은 이상, 그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적에 맞서 싸우는 것뿐이었다.
“총과 활을 다오.”
“휴, 알았어.”
카시안에게 총과 활을 건네준 크로뎀은 한숨을 쉬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외팔의 몸으로도 자신을 제압한 쿠스테로를 머리카락 몇 가닥을 담보로 죽여 버리다니! 물론 자신이 그의 힘을 빼놓긴 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애초에 저런 괴물을 상대하려는 것 자체가 실수였어!’
크로뎀은 결국 카시안에 대한 자신의 열세를 인정했다. 하프 뱀파이어라곤 하나, 그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였다.
이윽고 크로뎀에게서 받은 활과 총을 짊어진 카시안이 다시 전장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아직도 전투는 한창이었다.
1년 동안 오스베르 산맥을 장악하기 위해 벌였던 불의왕국과 하이 오크들간의 전쟁은 캄에덴에서 파견된 뱀파이어들의 지원에 힘입은 불의왕국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군주를 잃은 하이 오크들이 안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던 것이다. 이십 여명이나 되던 소드 마스터도 카시안을 위시한 배틀러들에 의해 모조리 죽음을 맞이했고, 그들을 마지막으로 잔존병력은 전멸 당했다. 동굴에 남아 있던 나머지 하이 오크들이 몰살당한 건 얘기할 가치도 없었다.
터벅 터벅 터벅
일단의 하이오크들이 급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일족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건지, 그들의 표정은 무척 어두워 보였다.
“서둘러라! 놈들이 언제 우리를 추격해올지 모른다!”
쿠에르가 언성을 높이며 이동을 재촉했다. 전원이 병사들이었던 탓에 진군속도가 그리 느리진 않았다.
“쿠에르님, 이제 휴식을 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어.”
에틴의 말에 그렇게 대꾸한 쿠에르가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몇 시간동안 강행군을 한 탓에 그들은 무척이나 지쳐보였다. 적들이 쫓아오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자신들은 이미 오스베르 산맥을 다 내려온 상태였다. 절대 쫓아올 리가 없었다.
“모두 정지! 휴식을 취하도록!”
쿠에르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뛰어난 육체를 가졌지만 그들도 체력엔 한계가 있었다.
“이제부터 뭘 하지?”
바위 위에 걸터앉은 쿠에르가 고민했다. 일족이 멸족당한 상황이라면 다시 올라갈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상에 정착하기엔 50명이란 수는 너무도 적었다.
“일단 인간의 땅에 가서 오크 행세를 하는 게 좋을 듯싶군요.”
“치욕적이군.”
에틴의 말에 쿠에르가 이를 악물었다. 인간의 땅이라곤 하지만 흑마대전이 벌어지기 전만해도 그 땅은 자신들의 것이었다. 그래도 놈들의 이목을 피하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다. 오크의 행세를 해야만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비록 오크들과 같은 계열이긴 하지만, 극도로 진화한 자신들은 그들과 엄연히 달랐다.
그러던 중, 쿠에르는 흑마대전을 떠올렸다. 한 뱀파이어가 연 지옥의 문 덕분에 자신들은 소수만이 살아 오스베르 산맥의 음습한 지하에서 살아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뱀파이어들은 또 한번 자신들의 꿈을 짓밟아 놓았다.
“빌어먹을 뱀파이어 놈들. 반드시 내 손으로 너희들을 멸망시킬 것이다!”
한 하이오크의 원한과 증오에 가득한 절규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정말 그대들은 우리의 은인들이오. 그대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죽었을지도 모르겠소.”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오.”
끊임없는 미사여구로 자신들을 칭송하는 왕에게 카시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마디를 보낼 뿐이었다.
카시안을 필두로 한 연합군이 하이 오크들을 멸족시킨 후 샐래맨더에서는 연일 축제가 터졌다. 술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지만, 술이 없더라도 드워프들은 기쁨에 취해 있었다. 뱀파이어들도 그들의 장단에 맞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무튼 그렇게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뱀파이어들은 캄에덴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이제 가는 거냐?”
“그래.”
모든 드워프들이 떠나가는 뱀파이어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에는 크로뎀과 크록도 있었다. 그동안 쌓인 정이 있어서인지 그들의 아쉬움은 다른 이들보다도 더 컸다.
“우리, 나중에 철의왕국과 전쟁할 때도 같이 싸우자.”
“철의왕국? 무슨 소리야?”
크록이 꺼낸 뜬금없는 소리에 크로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철의왕국을 친다니? 꼭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자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한 크록의 어조에 크로뎀은 수상쩍음을 느꼈다. 자신들의 약함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 그들이지 않은가.
‘분명히 내가 모르고 있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일까?’
“크로뎀 뭐해? 빨리 안가고.”
“알았어.”
하지만 이런 의문도 잠시, 동료들이 모두 수도의 정문을 나서고 있자 크로뎀은 급히 그들을 뒤따랐다.
“그럼, 나중에 보자!”
“그래, 잘 가라.”
크로뎀이 손을 흔들면서 크록과의 작별을 고했다. 하지만 끝내 크록이 한 말에 대한 의문을 지우지 못했는데, 그가 이 엄청난 계획의 전모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