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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종교전쟁
“드디어 나타나셨군. 의문의 납치범.”
크라토르가 미소를 띠며 스탐을 바라보았다.
[저 놈, 기다리고 있었던 거로군.]
‘별 상관있을까?’
스탐은 느긋했다. 모든 소드 마스터들이 술에 빠져 제 실력을 못내고 있는 이상, 적은 크라토르 하나뿐이었다. 검성도 이긴 자신이―요행이긴 하지만― 그와의 맨투맨 대결에서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스탐은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르렁
방금 전만해도 술독에 허우적거리던 기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나 같이 자욱한 살기가 어려 있는 것이 술에 취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지?”
“후후후. 유에센의 기사를 우습게보면 섭섭하지. 적이 언제 목표를 납치해갈지 모르는 상황에서 술이나 마실 정도로 우린 어리석지 않다.”
“쳇, 그랬었군.”
스탐은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았다. 그들은 바로 술을 마시면서 섭취한 알코올을 마나를 끌어올려 태워버린 것이다. 물론 취한 척을 하기 위해서 약간은 받아들였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정상적인 실력은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큰일인걸.]
정작 당사자인 스탐보다 카스턴이 더 당황한 어조였다.
‘큰일은 무슨 큰일이냐.’
[그럼 뾰족한 방법이 있어?]
여유로워 보이는 스탐의 모습에 카스턴이 물었다.
‘뾰족한 방법은 무슨…, 그냥 싸우는 거지.’
[…무모한 녀석.]
카스턴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 스탐의 자세야말로 가장 뱀파이어다운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 않는 임전무퇴의 전사! 그것이 바로 그들 종족의 정신이었다.
“간다!”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먼저 공격을 펼친 쪽은 스탐이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상대가 검을 뻗어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선공을 가하는 것이 그나마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채쟁!
섬광과 섬광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크라토르가 카스턴에 맞선 것이다. 짐작하고 있었다곤 하나 스탐을 속이기 위해 술을 조금씩 들이킬 수밖에 없었던 부하들을 대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 하이 배틀러를 상대할 수는 없었다.
“크윽.”
스탐의 막강한 검세에 금세 밀린 크라토르가 신음성을 흘렸다. 다른 소드 마스터들이 달려든 것은 그때였다.
“단장님!”
“이 놈, 용서치 않겠다!”
순식간에 수많은 오러 블레이드가 쇄도했다. 비록 스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하나는 보잘것없었지만 대여섯이나 되니 그렇게 위협적일 수가 없었다. 스탐은 주저 없이 그것을 피했다.
“제길.”
좁은 실내이다 보니 공간이 제대로 생기지 않았다. 오러 블레이드 한발을 스쳐 어깨에 생체기가 난 스탐이 이를 악물며 그들에게 다시 검을 날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들 역시 초강대국 유에센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합격술로 스탐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4방을 점한 채 포위공격을 하면서 한명이 심한 상처를 입고 빠지면 다른 한명이 바로 그 공백을 메워주고 있었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스탐은 아직까지 처음의 비광살로 잡은 기사를 제외하면 단 한명도 죽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당하겠는걸.]
‘시끄러워.’
[당할 바에야 네 모든 힘을 드러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넌 아직까지 검술만 구사하고 있잖아.]
‘하지만 다른 걸 보여주게 된다면 내가 뱀파이어라는 게 드러나는 꼴이잖아.’
스탐은 검성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 냉철하고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만약 자신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깨달은 크라토르가 검성에게 사실을 보고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자니 결국은 당할게 뻔했다. 바람처럼 날아다니는 히든 브레이커의 능력은 이런 좁은 방에서는 절반으로 떨어진다. 적의 방심을 노리려고 벌인 실내전이 오히려 족쇄가 된 꼴이다.
[염령의 반지를 쓰는 게 어때?]
카스턴이 어느새 흑마기의 소모가 절반에 다가서고 있는 스탐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그걸 쓴다면 내 정체가 탄로 날 텐데…….’
그렇게 대꾸하던 스탐은 잠시 고민했다. 그것까지 제외한다면 방법은 없었다. 결국 길은 세 가지였다.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내느냐, 아니면 염령의 반지를 쓰느냐, 그것도 아니면 이대로 싸우다 죽느냐. 스탐은 결국 한 가지를 선택했다. 물론 후자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이걸 쓰는 수밖에.’
창!
소드 마스터들의 검을 차단시키면서 잠시 거리를 버린 스탐이 염령의 반지에 다크 오러를 들이부었다. 그러자 냉기를 풀풀 날리던 카스턴의 검신이 점차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백룡왕의 냉검은 지옥의 검으로 탈바꿈되었다.
화아아악!
“맙소사, 저건 뭐야?”
갑자기 적의 검이 불꽃으로 뒤덮이자 경악한 소드 마스터들이 놀라 소리쳤다. 뜨거운 열기가 먼 거리에서까지 느껴져 왔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당혹스러워하고 있는지 알 법도 했다.
하지만 크라토르는 달랐다. 그는 살기 어린 얼굴로 스탐을 노려보았다.
“바로 네놈이었군. 내 포로들을 빼앗아가고, 검성께 화상을 입힌 장본인이!”
“잘 아네.”
스탐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만약 그가 유에센에 가서 검성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면 계획에 크나큰 차질이 빚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은 지금 블리츠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크라토르는 검성의 측근이니 정보에 대해선 빠를 것이다. 그런 그이니 자신이 블리츠라는 인물과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지금쯤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 한방에 놈들을 섬멸시켜야 하는데 마그마 블레이드론 부족해. 아마도 한명씩 죽이다가 흑마기가 고갈될 것 같은데…….’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염령의 반지로 구현시킨 마그마 블레이드는 그 위력만큼이나 흑마기의 소모가 엄청나다. 따라서 일격필살로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적들은 9명이었다. 멕시안 후작이 술에 곯아떨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놈들은 단번에 해치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뭐? 그게 뭐지?’
뜻밖의 사실에 스탐이 정색을 하며 물었다.
[염령의 반지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화염 마법을 사용할 수 있지.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이 바로 지옥의 업화, 아포칼립스다. 비록 구동방법 자체는 다르지만 위력은 그 이상이지.]
‘이야, 대단한걸. 그럼 흑마기가 고갈되기 전에 써야겠군.’
결단을 내린 스탐은 카스턴의 말을 따라 검신을 휘감고 있는 화염을 검 끝에 모았다. 염령의 반지로 화염화시킨 흑마기를 모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까스로 모을 순 있었다.
“무슨 짓이지?”
“아무래도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쳐라!”
크라토르의 외침과 함께 소드 마스터들이 일제히 덤벼들었다. 일단 대기하고 있다가 상대가 이상한 조짐을 보이자마자 움직이다니, 과연 실력자들은 달랐다. 하지만 그래봤자 때는 늦었다.
“크으읍.”
스탐의 전신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고도의 집중을 강요당한 탓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 끝에 모인 광염의 집약체를 방치할 순 없었다.
“간다아!!”
단순한 기합이었을까, 아니면 눈앞의 화염 덩어리를 떨쳐버리기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어느새 카스턴이 사선을 그었다.
콰콰콰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