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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종교전쟁
순간 큰 폭발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지옥의 불길이 소드 마스터들에게 쇄도했다. 주변의 사물들을 사정없이 녹여버리는 아포칼립스는 그들이 미처 경악할 시간도 주지 않고 덮쳐 버렸다.
화아아아아!
비명소리도 없었다. 성대가 뇌의 명령에 따라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단 한명만 빼고.
“크어어억!!”
간발의 차이로 아포칼립스를 피한 크라토르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피했다곤 하지만 그의 몰골도 온전하진 못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은 어느새 녹아 내려 흉측한 쇳덩어리가 되었고 팔다리는 심한 화상을 입어 앙상하게만 보였다.
[저 놈은 어쩔 거야?]
“글쎄…….”
스탐은 턱을 매만지며 크라토르를 바라보았다. 반드시 다 죽여야 했지만 거의 사경을 헤매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내키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저항하는 적만 죽일 뿐이야.”
결국 스탐은 그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저대로 둬도 고통의 후유증으로 죽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휴우, 흑마기의 소모가 엄청난데? 웬만하면 쓰지 말아야겠어. 마치 아이슬로너의 헬 스피어를 쓰는 것 같군.”
체내의 흑마기가 텅텅 빈 것을 느낀 스탐이 한숨을 쉬며 아직까지 술에 취해 잠을 자고 있는 멕시안 후작에게 다가갔다. 그는 전투가 벌어질 때 유에센의 소드 마스터들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 난리 속에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참 억세게 운이 좋은 놈이로군.]
“한심한 놈이기도 하고.”
카스턴에게 그렇게 대꾸한 스탐은 후작을 들쳐 업고 성밖을 향했다. 어느새 소리를 듣고 달려온 병사들이 방안으로 몰려들고 있었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진 범인은 종적조차 찾아볼 수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건 녹아내린 방 안의 시체로 보이는 잿더미, 그리고 심한 화상을 입은 한명의 기사뿐이었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이 날은 결전의 날이기도 했다. 트로비츠 후작이 국왕파에게 전면전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나오지 않는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국왕파는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유리했기 때문에 당연히 나오는 것이다. 귀족파의 소드 마스터가 실종되는 괴사건으로 한명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린 상태였으니까.
“후후후. 멍청한 국왕파 놈들. 우리에게 막강한 지원군이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군.”
전방에 배치된 국왕파의 군세를 둘러보던 트로비츠 공작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유에센의 소드 마스터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공작은 어제 아침에 그들을 만났었다. 무려 10명이나 되는 초강대국의 실력자들. 그들이 자진해서 자신을 찾아온 것이었다. 멕시안 후작을 호위한다면서 그의 성에 갔었기 때문에 이제 후작의 군대만 합세하면 바로 전면전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멕시안 후작의 군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약속했던 시간이 한참 흘렀음에도 아무런 기별이 없자 트로비츠 후작은 초조해졌다. 후작이 약속시간을 착각한 거라고 애써 마음을 다스려 보기도 했지만 한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한계에 이르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급기야 화가 난 공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라면 병사들의 사기도 사기지만, 국왕파의 병력도 곧 덤벼들 것이다.
“공작 각하. 멕시안 후작의 영지에서 파견된 전령이 왔습니다.”“전령이라니?”
뜻밖의 보고에 공작의 두 눈이 왕방울 만해졌다. 오라는 군대와 소드 마스터들은 안 오고 전령 하나만 달랑 보내오다니? 뭔가 불안했다.
“일단 데려 오거라.”
“예.”
이윽고 전령이 공작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는데 마치 지옥을 경험한 인간의 모습 같았다.
“무슨 일인가? 왜 후작의 군대는 오지 않는 건가?”
“그게…….”
전령은 어제 있었던 일을 보고했다. 그가 한 마디, 또 한 마디를 토해낼 때마다 공작의 얼굴은 시시각각 어두워져 갔다. 급기야 소드 마스터들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그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아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그게 말이나 될법한 소리인가!”
“거짓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소드 마스터는 유에센의 기사 단 한명뿐이었습니다.”“닥쳐라! 거기 뭣들 하느냐? 어서 이 거짓말쟁이의 목을 베어라!”
공작이 주변에 있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터무니없게 느껴진 건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설령 그의 말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인정하게 돼 버린다면 이 전투는 어떡할 것인가? 단 한명의 소드 마스터도 없는데!
“공작 각하, 앞을 보십시오!”
병사들이 막 전령에게 다가갔을 때였다. 한 귀족의 말에 공작이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맙소사!”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아니, 이것을 꿈이라고 단정해야만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면 그의 눈앞에는 국왕파의 진영에서 다섯 명의 인간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며칠 해도 귀족파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소드 마스터들이었다!
“돌격!”
국왕의 한 차례 포효와도 같은 고함성이 대지를 울렸다. 그와 동시에 수만에 달하는 국왕파의 병사들이 먼지를 뒤덮으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헹, 이거야 식은죽먹기군?”
국왕파의 선봉에 선 케이튼이 콧방귀를 뀌며 적군과 아군을 비교해 보았다. 단 한명의 소드 마스터도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고 있는 귀족파와 네 명의 소드 마스터를 앞세운 국왕파의 위풍당당한 모습. 비록 병력면에선 약간 밀렸지만 어느 쪽이 이길지는 뻔했다.
‘정확히 말하면 4명은 아니지. 내랑 스탐 행님을 합하면 여섯이구만.’
“부단장님, 뭘 그렇게 고민하고 계십니까?”
옆에서 달려가고 있던 용병 하나가 웃으며 물었다.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런다.”
가볍게 대꾸한 케이튼이 자신의 뒤를 따르는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스탐은 자신이 오자마자 공석으로 두고 있던 부단장의 자리를 주었다. 그 일에 용병들은 일언의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5년 전에 크로프란의 암흑계를 누비고 다녔던 케이튼의 위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제 전투가 시작되겠군. 자, 다들 공격 개시! 가급적 죽이지는 마라!”
그렇게 외친 케이튼이 어쩔줄 몰라하고 있는 귀족파 병사들의 대열을 파고들었다. 그리곤 양떼에 들어온 늑대처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다른 국왕파의 소드 마스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제각각 선두를 달리던 그들은 단신으로 귀족파의 속을 파고들어 병사들을 제압하면서 수뇌부만을 골라 죽이기 시작했다.
푸욱
“아악!”
귀족파에 가담했던 고위급 귀족들이 날카로운 오러 블레이드 아래 머리통이 맥없이 날아갔다.
“항복!”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부분의 귀족들이 죽임을 당하고 우두머리인 트로비츠 공작까지 사로잡히자 전투는 싱겁게 끝났다. 애초에 소드 마스터가 없는 군대가 소드 마스터가 있는 군대를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전투가 끝난 직후, 국왕은 바로 즉결 재판에 들어갔다. 살아남은 귀족들과 기사들에 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이다.
“트로비츠 공작. 그대는 국가에 대한 대역죄를 저지른 대가로 사형은 물론이고, 삼족을 멸하겠소.”
국왕의 한 마디를 끝으로 트로비츠 공작은 단두대의 이슬이 되었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그의 머리는 곧장 왕성의 성문에 효시되었다.
공작이 그 꼴이 되자 살아남은 귀족들과 기사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들은 국왕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을 맺고, 그 증거로 가까운 혈육을 수도에 보내 볼모로 삼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크로프란에서 벌어진 내전은 수많은 의문을 남긴 채, 너무도 싱겁게 끝났다.
하지만 인간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사건이 곧 벌어질 제국 전쟁과 큰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시간에도 혈왕성의 군주는 입맛을 다시며 인간들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