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7 / 0217 ----------------------------------------------
38. 제국전쟁
“후후후. 폭염 대, 풍과 수라.”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눈빛이다. 검성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둘 중 누가 이길지 궁금해 했다.
물론, 그런 여유를 보이는 것 자체가 이길 것을 장담하고 있다는 소리겠지만.
챙!
플레임 로드가 제일 먼저 부딪힌 것은 포세이돈의 장창 롱기누스였다. 자신의 양손검보다 더 긴 그 거병은 세찬 물줄기를 뿜어내며 끊임없이 공격해 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포세이돈과 격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윈드 워리어의 간접적인 공격이 계속되었다. 빠른 스피드를 이용한 히트 앤 런을 기본으로 갖가지 공격마법을 들이붓는 것이다.
아마 웬만한 마갑기였다면 한참전에 이들의 합공공격의 제물이 되었을 것이다.
“우습군.”
하지만 검성의 얼굴에서는 단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화아아악
강렬한 불꽃을 머금은 거대한 양손검이 포세이돈을 찔러 들어갔다. 너무도 무시무시한 일격이었던 탓에, 생명에 위협을 느낀 알프레드는 급히 뒤로 물러섰다.
“큰일날 뻔했군.”
알프레드의 미간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분명히 자신은 물의 마갑기, 포세이돈을 몰고 있었다. 상대는 불의 마갑기이니 충분히 상대가 될 거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제대로 대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쥐새끼는 이제 꺼져주는 게 어떨까!”
포세이돈이 물러서자 한층 여유가 생긴 플레임 로드의 불꽃검이 윈드 워리어를 향했다.
“헉, 대쉬!”
막 상대의 뒤를 치려고 했던 라트비츠는 갑자기 쏟아지는 거대한 불꽃에 기겁해 마법을 구사하며 자신의 마갑기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사정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으니, 어느새 윈드 워리어의 가슴이 길게 베어져 있었다.
아니, 녹여졌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리라.
“괴, 괴물!”
급기야 알프레드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라트비츠의 윈드 워리어는 자신의 포세이돈과 함께 최정상을 다투는 마갑기다. 비록 스피드에 중점을 두어 방호력이 비교적 떨어진다곤 하나 단 한방으로 방어마법진이 새겨진 갑옷이 저렇게 간단히 녹아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후후후. 이 정도에 놀라다니. 아직 각오가 덜 된 모양이군.”
어느새 1대2로 혈투를 벌이던 마갑기들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일단 윈드 워리어가 상당한 타격을 입은 이상 섣불리 움직이기 힘든 것이다.
물론, 검성은 아니었다.
“한 가지 멋진 묘기를 보여주지. 이 플레임 로드의 진정한 힘을 말이야. 나도 이걸 써보기는 지금이 처음이다.”
검성이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꺼내었다. 라트비츠와 알프레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행여나 벌어질 상대의 기습공격에 대비했다.
‘무슨 속셈이지?’
하지만 그들의 궁금증은 머지 않아 풀렸다. 검성이 돌연 고함을 지른 것이다.
“블레이즈 발동!”
화아아악!!그와 동시에 플레임 로드의 근처에서 엄청난 양의 불꽃이 뿜어져 올라왔다. 분출하는 용암에서 막 솟구쳐 오른 듯한 그 불꽃들은 시전자의 주위를 둥글게 감싸기 시작했다.
“마법 폭참인가!”
알프레드와 함께 마갑기를 뒤로 물린 라트비츠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둥그런 형상을 띤 파멸의 불꽃은 인근의 모든 생명체를 녹여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듯했다. 물론 일정 거리 밖에 있으면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방어마법으로 보였다.
하지만 마법 폭참은 연계기였다. 다시 말해, 지금 플레임 로드를 감싸고 있는 화구는 초타에 불과했다.
“헬 어스퀘이크!”
검성의 외침과 동시에 플레임 로드가 양손검을 바닥을 찍었다. 그러자 플레임 로드의 앞으로 바닥이 세 줄기로 무너져 내리면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한참 전투를 벌이던 기갑기들의 신형이 흔들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쿠콰콰콰쾅!!
꺼진 땅에서 마수의 포효와도 같은 폭발이 터져 나왔다. 그것도 용암과도 같은 불꽃을 동반하며 말이다. 세 줄기로 뻗어나간 그 염폭은 제국 연합은 물론이고, 아군의 기갑기들까지 단숨에 집어삼켜버렸다.
“맙소사!”
라트비츠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은 한 마디로 지옥도였다. 마치 전설 속에서나 나타났을 지옥의 사천왕이 일시에 강림한 것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덧 검성이 시전한 헬 어스퀘이크가 서서히 사그라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지는 바닥이 갈라진 채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파일럿이라는 명칭을 가진 생명체들과, 그들이 다루고 있던 철의 거인들도 폐허가 된 대지과 똑같은 전철을 밟게 되었다.
“이럴 수가…….”
알프레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저으며 눈앞의 광경을 둘러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수백 개의 고철덩어리가 불탄 대지 위에서 나뒹굴고 있었다. 모두 다 지옥의 불꽃 앞에 녹아버려 형체도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었다. 고철 덩어리들이 드문드문 놓여져 있는 것이 꼭 용광로에서 즉석으로 녹여진 철광석처럼 보였다.
“이 놈! 같은 편까지 다 죽여 버리다니!”
라트비츠의 절규는 유에센군의 기갑기들이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대규모의 기갑부대를 단방에 쓸어버린 검성의 무자비함에 대한 분노였다.
“후후후. 아직 우리 기갑부대는 반수 이상이 살아 있다. 미리 퇴각령을 내렸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대들의 기갑부대는 그렇지 못했군.”
검성의 말 대로였다. 지금 살아남은 제국 연합의 기갑기는 단 42기. 처음의 3할도 안되는 수였다. 이에 비해 유에센의 기갑기는 거의 90기에 가까운 수가 살아남았다. 물론 그것 또한 엄청난 피해였지만, 이미 승부는 정해졌다.
마갑기들은 모두 살아남았지만, 플레임 로드의 무위로 볼 때 제국 연합이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웠다.
“모든 마갑기들은 검성을 집중 공격한다! 반드시 박살을 내버리겠다, 이놈!”
라트비츠의 비상령에 정신이 퍼뜩 든 나머지 마갑기들이 일제히 플레임 로드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무려 다섯 기나 되는 마갑기들이 각자 마법 폭참을 구사하려고 하는 그 모습이란 전율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잊고 있었다. 비록 화염의 배리어와 헬 어스퀘이크가 사라졌지만, 아직 플레임 로드의 마법 폭참, 블레이즈의 종타가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쓰로우 헬 블레이드!”
어느덧 사그라져 있었던 플레임 로드의 양손검에 다시 한번 무시무시한 불꽃이 수놓아졌다. 검성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검을 던져 블레이즈의 마지막 비기를 선보였다.
휘릭 휘릭 휘릭
어마어마한 크기의 양손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한 마갑기에게로 날아들었다. 너무도 돌발적인 사태였기 때문에 마갑기는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목이 날아갔다. 공교롭게도 목이 날아가 훤히 비치는 조종석안에는 파일럿의 머리통도 온데간데없었다.
“조심햇!”
경악에 경악을 금치 못하던 라트비츠가 소리쳤다. 문제의 양손검은 검성의 의지대로 움직이는지 자유자재로 포물선 운동을 하며 마갑기라는 먹잇감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다음 목표는 루세리안의 두 번째 마갑기, 불을 다루는 필스테인이었다.
“이까짓 거!”
필스테인의 파일럿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불길을 머금은 자신의 검으로 날아드는 양손검을 막을 자세를 취했다.
똑같은 불의 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마갑기들처럼 플레임 로드에게 일방적으로 꿀릴 것이 없다고 파일럿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채캉, 푸확!
검과 검이 충돌하는 순간, 플레임 로드의 양손검이 필스테인의 검에 담긴 화염을 흡수하며 검을 두동강낸 뒤, 검의 주인까지 두동강낸 것이다!
“말도 안돼.”
“훗, 화는 염을 이길 수 없다. 단지 먹힐 뿐이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라트비츠에게 검성은 뜻 모를 조언을 내릴 뿐이었다. 어느덧 불꽃을 머금은 양손검은 마지막 표적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표적은 본능적으로 방어를 위해 무기를 들었지만, 부질없는 짓이리라.
쿵쿵쿵!
그때였다.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포세이돈이 빠른 속도로 플레임 로드에게 달려들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당사자인 검성까지 깜짝 놀랐다.
“죽어도 같이 죽자, 검성! 내 애창 롱기누스로 널 지옥으로 안내하겠다!”
캉!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플레임 로드가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갑옷이 깊숙이 패여 들어갔다. 아마 조종석이 있었다면 검성이 찔려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창차차창!
알프레드는 죽을 각오로 창을 쉴 새 없이 휘둘러대며 플레임 로드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유일한 무기는 양손검 하나뿐이었기에, 무기 없는 눈앞의 마갑기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마갑기가 희생자가 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르니아의 것이었음에도 알프레드는 거기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불구대천의 원수 검성 게르델피안을 죽여 없애는 것이 조국을 위하는 일이라는 사명감이 가슴 깊숙이 내재되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끝이다!”
플레임 로드를 궁지로 몰아붙인 알프레드가 혼신의 힘을 실어 검성이 있는 머리통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이것만 성공하면 자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쾅!
“으으윽!”
폭발과 함께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마갑기 한기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대의 용기는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
“하지만 나는 그랜드 마스터다. 그대보다 한수 위지.”
알프레드는 분하다는 얼굴로 태연히 서있는 적의 마갑기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일말의 희망이 분명히 남아있었던 그의 작전은 실패했다. 마지막 순간, 플레임 로드가 손에서 거대한 파이어 볼을 쏘아 올린 것이다. 그런 하급의 마법 따위야 간단히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평상시의 경우였다. 눈앞에서, 그것도 극적인 순간에서 터진 그 한발의 화구를 포세이돈은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덥썩.
어느새 플레임 로드의 손에 애검이 잡혔다. 절정의 소드 마스터들을 동반한 세 기의 마갑기를 나락의 세계로 떨어뜨린 지옥의 염검이!
“알프레드!”
“크으윽, 라트비츠. 나도 어쩔 수 없나보군. 검성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아. 반드시 내 복수를 갚아다오.”
알프레드는 두 눈을 묵묵히 감은 채 타국의 기사이자 자신의 파트너였던 라트비츠에게 최후의 한 마디를 전했다. 그리고 잠시후, 그것은 유언이 되었다.
휘익! 쩌저적
단순히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홍염의 검신은 눈앞의 마갑기를 두 조각의 고철 덩어리로 만들어버렸다.
쿠궁!
잿더미가 된 알프레드의 시신과 함께, 그의 마갑기가 서서히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렇게 차르니아 제국 최강의 마갑기. 포세이돈은 플레임 로드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했다.
“모두 후퇴! 후퇴하라!”
승산이 없음을 확인한 라트비츠가 눈물을 머금고 소리쳤다. 그러자 뒤편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제국 연합의 병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몇 십만에 달하는 대군이었지만, 그들이 한 것은 약간의 전투에 불과했다.
“패잔병들의 꼬락서니라. 볼만하군.”
그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보고 있던 검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패잔병들을 추격하지 않았다. 전투도 끝난 마당에 굳이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플레임 로드의 마나 스톤에 내재된 마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겼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유에센 제국 병사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마, 만세!”
“유에센 대제국 만세!”
“검성 만세!”
어느새 병사들의 칭송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을 향했다. 플레임 로드에 내린 뒤, 아공간으로 되돌린 검성은 병사들이 만들어주는 길을 따라 걸으며 검을 빼들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제 천하는 우리 유에센 제국의 것이다! 질주하라, 그리고 포효하라! 빛과 정의를 관장하는 아르티시앙께서 우리를 굽어살필 것이다!”
“와아아아!!”태양에 반사되어 한껏 찬란함을 불태우는 스톰 블링거를 보며, 유에센의 병사들은 목이 떠나가라 함성을 질러대었다.
이리하여 30여년 만에 벌어진 제2차 제국전쟁은, 또 다시 유에센 제국의 승리로 마무리 지어졌다. 이제 이 제국은 명실상부한 인간계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 것이다.
----------
이 파트 마지막입니다.
오랜만에 필이 들어가서 잘 써내려가지더군요 ㅎㅎ
빠른 완결을 위하여+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