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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칠흑의 원정대, 강림!
“죽어라 이놈! 이야아아압!”
수많은 기사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기사 크린이 선공을 가했다. 고풍스러운 롱소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강기는 그 어떤 장애물이라도 절단낼 듯했다.
“크큭, 귀여운 놈.”
푸확.
단 한차례의, 날카로운 무엇가가 살 속을 헤집고 지나는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용맹한 기사 크린의 양팔이 날아갔다.
“크아아아악!”
지온은 히죽 웃으며 자신의 얼굴에 뿜어지는 핏방울을 날름거렸다.
그는 단지 검지와 약지의 손톱만으로 상급 소드 마스터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재롱을 잘 부린 대가로 고통 없이 죽여주마.”
고통이란 고통은 벌써 다 주었음에도 그런 소릴 하는 지온의 모습이란 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있는 인간의 머리통을 집어 삼키는 것으로 유에센의 내로라는 기사의 목숨을 거두었다.
“맙소사.”
“천하의 크린을…….”
“저토록 잔인하게 죽이다니?”
이미 유에센 기사단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다.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르고 있는 것은 오로지 공포.
공포뿐이었다.
“모두들 진정해라!”
크라토르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하기야 상급의 소드 마스터를 우습게 죽이는 적에게 무슨 저항심을 가지겠는가?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의 격차였다.
“이봐, 지온! 그 쯤 했으면 어서 물러가!”
건너편에서 다이어의 외침이 들려왔다. 뱀파이어의 언어였기에 자연히 듣는 쪽은 지온 이하 100여명의 버서커들 뿐이었다.
“큭, 상대도 안 되는 놈이 이래라 저래라군!”
크린의 머리를 내뱉은 지온이 오만한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다이어의 말을 거스를 생각은 없었는지 잠시 후, 그는 휘하의 버서커들을 이끌고 숲 사이로 흩어졌다.
“뭐하는 짓이지?”
그들의 이상한 행동을 본 크라토르가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좋은 일이었다. 어떻게든 지휘체계가 무너진 이 기사단을 이끌고 본국으로 귀환해야만 했으니까.
“이때다! 모두 공격!”
때 맞춰 케이튼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이미 사건의 전말을 잘 알고 있는 그에겐 한 치의 두려움도 없었던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는 점에서는 크로프란의 기사들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했다. 그들은 버서커들이 유에센 기사들의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에 이상한 일만 벌어졌다고 생각했지, 그 어떤 모습도 못 봤던 것이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잔챙이 같은 놈들! 응전하라!”
같잖다는 표정을 지은 듀레스가 기사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기사들의 움직임에는 그 어떤 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지온이 보여준 압도적인 무위로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데다, 사라졌다곤 하지만 언제 덮칠지 모르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지휘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
채채챙! 챙챙!
약간의 문제가 생긴 것과는 별개로, 두 기사단간의 전투는 뒤늦게야 시작되었다.
일단 기세 상으론 크로프란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언제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지 모르는 적에 대한 불안감이 가중되고 있는 유에센의 기사들에 비해, 이들은 무척이나 여유로웠던 것이다.
“덤벼라, 이놈!”
일단 선두에 선 다이어의 상대는 듀레스였다.
챙 채채챙!
허공에서 불꽃이 몇 번이나 튀겼다. 듀레스의 새파란 오러 블레이드와 다이어의 새까만 오러 블레이드는 지칠 줄 모르고 서로의 급소를 노렸다. 하지만 서로의 무위가 워낙 막상막하이다 보니 번번이 실패할 뿐이었다.
다른 크로프란의 기사들도 숫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인간계 최강의 기사들을 맞아 선전하고 있었다.
“하아, 싸워야 하는 건가.”
크로프란에 맞서는 유에센의 기사들 중에서는 엘로나도 있었다. 그녀도 아까의 장면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터라 심신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덤벼드는 적군을 내버려둘 순 없었다. 가장 먼저 달려들어서 가장 먼저 적을 쓰러뜨린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기사관이었다.
“하아압!”
질풍같이 휘둘러지는 엘로나의 오러 블레이드에 크로프란의 기사들은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소드 마스터의 수가 적다보니 중급인 그녀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머지 않아 그녀는, 자신의 맞수를 만나게 되었다.
챙!
적들을 썩은 짚단처럼 베어 넘기던 그녀의 검이 처음으로 막혔다. 그리고 그 상대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인물이었다.
“오랜만이군! 유에센의 꼭두각시 인형!”
케이튼이 그렇게 소리치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짙푸른 오러 블레이드가 그녀의 가슴으로 쇄도했다.
“어림없다!”
하지만 엘로나도 만만찮았다. 상대의 일격을 막고 나자 그녀는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서로가 똑같이 중급의 소드 마스터였던 탓에, 둘의 전투는 그야말로 호각이었다. 어느 하나가 빈틈을 내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상황은 장시간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케이튼과 엘로나. 이 둘은 딱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엘로나는 전형적인 기사의 검술만 배워왔지만, 케이튼은 어린 시절을 줄곧 싸움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변칙공격에 능한 것이다.
휘각
케이튼의 날카로운 검날이 엘로나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볍게 상대의 일격을 피해낸 그녀는 다시 역습을 가하려 했다.
퍽!
하지만 그 순간, 강렬한 충격이 그녀의 배를 엄습해왔다.
“꺄아악!”
비명성과 함께 엘로나의 신형이 말밑을 향했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고삐를 붙잡고 낙마를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단 치명타를 한대 허용하자 그 다음부터는 돌이킬 수 없었다.
채채채챙! 팟
“으윽!”
케이튼의 검에 팔이 베어졌다. 육중한 풀 플레이트 아머임에도 불구하고 깨어진 갑옷 틈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하악 하악.”
엘로나는 계속해서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케이튼의 압도적인 완력을 기술로 완화시키면서 호각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완전히 압도당한 것이다.
“엘로나 님!”
엘로나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크라토르가 끼어들었다. 그는 곧장 케이튼의 뒤를 급습했다.
푸욱!
길쭉한 검이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큭! 이 비겁한 새끼!”
“흥, 전장에서 비겁함을 따지다니, 어리석은 놈!”
소중한 사람을 지키려고 하는 크라토르의 검은 가차 없었다. 상급 소드 마스터인 그의 검은 끊임없이 케이튼의 전신을 괴롭혔다. 그나마 중급이라 망정이었지, 조금이라도 실력이 뒤졌더라면 케이튼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막는 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잦은 출혈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진 케이튼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워낙 병력이 열세였던 탓인지 그를 도와줄 아군은 아무도 없었다. 혼자서 눈앞의 상급 소드 마스터와 싸우다 뒈져란 소리였다.
‘뭐, 여기서 죽여도 여한은 없겠지.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으니……, 그래도 행님이 보고 싶다.’
케이튼은 조만간 다가올 죽음에 대한 회한과, 남아 있는 한줌의 미련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제 죽는 것이다.
하지만 케이튼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에 대한 방관적인 상념을 떠올리는 와중에, 그의 두뇌는 더 높은 경지로 오르는 실마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죽음? 죽음이라……, 나는 왜 죽는 거지? 아냐…, 난 죽고 싶지 않아. 더 강해지고 싶단 말이다.’
“으아아아아!”
막 궁지에 몰아넣은 크라토르가 케이튼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을 무렵이었다. 케이튼이 고함을 지르며 그의 검을 쳐냈다.
챙!
“아니!?”
크라토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 그의 검은 상급 소드 마스터의 힘이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그 이하의 경지라면 절대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이, 이놈. 죽기 직전에 상급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인가?”
“받아라!”
케이튼은 크라토르가 당황해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느새 케이튼의 새파란 오러 블레이드가 크라토르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워낙에 강행한 기세였던지라 크라토르는 감히 반격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크라토르님!”
보고 있던 소드 마스터 하나가 싸움에 끼어들었다.
챙채쟁!
“크으으.”
그렇게 되자 케이튼은 다시 밀리기 시작했다. 깨달음을 얻어 똑같은 경지에 이르자 크라토르를 압도할 수 있게 됐지만, 이미 마나가 바닥을 기는 상황에서 적의 지원군이 오자 맥을 못 추게 된 것이다.
마치 아까 엘로나와 싸우다 크라토르가 덤벼든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두 명이서 협공을 하고 있었긴 하지만, 케이튼 자신도 든든한 구원군이 생겼기 때문이다.
푸우욱!
“끄어어어억!”
크라토르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그가 고개를 돌렸다.
“맙소사.”
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바로 최상급 소드 마스터인 듀레스가 함께 싸우고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복부를 꿰뚫린 것이다.
“잘 가거라.”
발로 듀레스의 복부를 밀어내며 검을 뽑아내었다. 그리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다이어의 눈에 협공을 당하고 있던 케이튼의 모습이 보였다.
“이놈들이!!”
분노한 다이어가 대번에 달려들어 두 명의 소드 마스터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 완강한 기세에 기겁한 둘이 뒤로 물러섰다.
“감히 나의 후예, 케이튼을 죽이려 했다니!”
“?”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다이어가 한말에 케이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면 제자지, 후예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지만 잠시 후, 케이튼은 뒤이어진 그의 포효에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내 이름은 쥬드 반 비크바스틴! 대제국 크로프란의 대들보다! 덤빌 놈은 어서 덤벼라!
“그럴 수가…….”
케이튼이 여전히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다이어만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을 5년 동안 가르치며 중급의 소드 마스터로 만든 스승이, 오랫동안 존경해왔던 수 백년 전의 조상, 쥬드라니?
“으으으.”
유에센의 기사들은 케이튼과는 다른 이유로 전율하고 있었다.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를 쓰러뜨린 절대무위의 기사! 듀레스까지 죽어버린 마당에 더 이상 그에게 덤벼들 상대는 없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또 한 가지 불안요소를 안고 있었다.
‘악마 같은 뱀파이어들이 또 다시 우리를 노릴지도 모르는데…, 더 이상 싸울 수는 없겠지.’
“후퇴하라! 모두 후퇴하라!”
“모두 후퇴!”
이제 최종지휘관이 된 크라토르의 명령은 유에센의 기사들에게 있어 마른하늘의 단비와도 같았다. 그들은 주저 없이 말을 몰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유리하게 돌아가던 전투였지만 상황은 급박했다. 그들로서는 일분일초라도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이, 이겼다!”
“우리가 이기다니?”
적들이 꽁무니를 빼는 것을 본 크로프란의 기사들은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크로프란 만세!! 부단장 케이튼 만세!!”
그들은 목이 터져라 조국의 이름과, 자신들을 승리로 이끌게 해준 기사의 이름을 불렀다. 케이튼도 그들의 호응에 맞춰주기 위해 피범벅의 갑옷을 벗으며 자신의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이렇게 하여, 인간계의 최대약소국, 크로프란은 초강대국 유에센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가져가는 대파란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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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2시간 늦었군요-0-;;
검도 갔다 오느라 깜빡했음
그러고 보니 오늘 올린 분량이 평소의 3배는 되는군요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