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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캄에덴, 대륙을 제패하다
“하악 하악.”
“서두르십시오!”
다그닥 다그닥
비명소리와 함께 다급한 외침이 숲 사이를 뒤덮었다. 30대중반 즈음으로 보이는 사내는 말을 타고 정신없이 달리는 와중에서도 옆에 나란히 가고 있는 20대중반의 젊은 여기사를 끝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
‘이건 재앙이다.’
크라토르는 속으로 절규를 토하고 있었다. 유에센 제국의 고풍스러운 갑옷은 이미 피가 튀어 더럽혀진 상태였고, 지금은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이었다.
“으아아아악!”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기사의 비명소리가 귓전을 짜르르 울렸다.
비명소리는 벌써 30번째를 넘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는 소드 마스터들도 적지 않았다.
‘도대체 놈들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세상에 소드 마스터를 사냥하듯이 뒤쫓아 죽일 정도라니, 그 압도적인 무위란 정말 기가 질릴 만했다.
“으아아아!”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크라토르의 심장을 터질 듯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방금 전 지른 비명소리의 장본인이 바로 크로프란의 기사단을 끝장내기 위해 나선 수백의 기사단들 중, 자신과 엘로나를 제외한 마지막 기사였기 때문이다!
“엘로나님…!”
“…….”
엘로나는 이미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검성이라는 온실 속에서만 자라온 그녀로서는 이 충격적인 사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어느 정도 죽음에 대한 경험이 있는 기사들도 충격적이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 한번 제대로 죽여본 적이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정신 이상이 돼 버릴지도…….’
그렇게 생각하던 크라토르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런 생각은 그 뒤에 떠올려도 문제없었다. 지금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그녀를 데리고 저 악마 같은 존재들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다.
스스슥
“크흐흐, 신선한 피냄새가 진동하는군!”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수풀 사이에서 뱀파이어 하나가 뛰쳐나와 엘로나에게 기다란 손톱을 휘둘렀다. 엘로나는 오러 블레이드를 머금은 검을 들어 가볍게 막아내었다.
촥!
“아아악!”
가냘픈 비명소리가 크라토르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문제의 뱀파이어는, 처음의 일수를 미끼로 던지면서 다른 손으로 말을 탄 그녀의 허벅지를 벤 것이다.
주르륵
무시무시한 이종족의 손톱 앞에선 두툼한 방어구도 필요 없었다. 어느새 그녀의 허벅지에서 선홍빛 피가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히히히힝!
“엘로나!”
깜짝 놀란 크라토르가 손을 뻗어 엘로나의 팔을 잡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다리를 벤 뱀파이어가 타고 있던 말의 뒷다리까지 잘라버린 것이다. 정말 괴물 그 자체였다.
크라토르는 바닥을 뒹구는 백마를 보며 치를 떨었다. 엘로나 옆으로 바짝 붙여서 말을 달리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조금이라도 멀어졌다면 낙마한 그녀는 벌써 뱀파이어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으으으.”
한참 쾌속질주를 하는 마상상태인데다 갑옷을 입었음에도 그녀는 어렵잖게 크라토르의 뒤쪽 안장에 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허벅지가 깊숙이 베였는지 계속해서 신음성을 흘려대었다. 거기다 뒤에서는 수십에 달하는 뱀파이어들이 미친 듯이 자신들을 쫓아오고 있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제 아침이 다 되어 갑니다!”
한 손으로 그녀의 팔을 잡아 자신의 허리를 두르게 한 크라토르가 독려를 해 주었다. 그의 지식대로라면 뱀파이어들은 해가 뜨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일단 자신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크라토르의 바램이 현실로 다가온 것일까? 해는 그의 생각보다 일찍 떴다. 자욱히 깔린 어둠을 가르며 솟구쳐 오른 아르티시앙의 상징은 두 인간에겐 축복을, 뱀파이어들에겐 재앙을 가져다주었다.
“하아, 일단 고비는 넘겼구나.”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태양빛을 가리더니 이내 꽁무니를 뺀 뱀파이어들을 본 크라토르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요새로 돌아가도록 하지요.”
“네.”
조그맣게 중얼거린 엘로나는 곧 잠이 들었다.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런 그녀가 귀찮지도 않은지, 크라토르는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을 타고 요새를 향했다.
일단 크로프란군을 쫓아오면서 데리고 온 병력 5만은 요새에 주둔시키도록 했으니 거기서 휴식을 취한 다음, 황성으로 귀환할 생각이었다.
비록 기사단의 대부분을 잃긴 했지만, 전장의 주력은 기갑부대다. 아마 지금쯤 검성이 이끄는 기갑부대가 크로프란의 기갑부대를 보기 좋게 작살내 놨을 것이다. 검성이 빈틈을 타 제국 연합의 기갑부대가 급습해올지도 몰랐지만, 수도에도 30의 기갑부대가 있었고, 마갑기가 둘이나 있지 않았던가?
‘크로프란 놈들, 머지않아 네놈들의 건방진 행보에 종말이 올 것이다.’
크라토르가 이를 갈며 자신과 악연이 깊은 국가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의 생각대로라면 유에센의 병력이 재정비되는 그날이 크로프란이 멸망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생각이 현실과 매우 동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저건 도대체 무슨 깃발이지?”
크라토르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요새 위에 꽂혀 있는 깃발을 살펴보았다.
깃발 안의 그림은 유에센을 상징하는 푸른 독수리가 아니었다. 피처럼 붉은 바탕에 검은 손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크라토르의 생애 30여 년 동안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군사들이 황성으로 빠진 모양이군. 그 틈을 타 일개 산적 패거리가 점령했고.”
단순하게 판단한 크라토르는 요새를 지나쳐 황성을 향했다. 비록 자신과 엘로나가 소드 마스터라곤 하나, 요새에 꽂힌 깃발은 왠지 모르게 불길했다.
하지만 잠시 후, 수도가 훤히 보이는 언덕에서 말을 세운 크라토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엘로나님.”
“으으음. 무슨 일이죠?”
상황을 전혀 모르고 있는 엘로나는 크라토르의 부름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건틀렛을 벗어 눈을 비비고 있는 것을 보면 아직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했다.
“저곳을 보십시오.”
“어디를 말인가요?”
“수도…, 황성을 말입니다!”
“황성이 왜요?”
고개를 갸웃거린 엘로나의 시선이 크라토르가 부르르 떨며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했다.
툭
건틀렛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그것을 주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지금은 눈앞의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기에도 급급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없어…….”
말 위에서 내린 그녀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몇 발짝 앞으로 다가서더니, 이내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젊고 여린 여기사의 두 눈에서 슬픔의 결정이 뺨을 스쳐 턱밑으로 한 방울 떨어졌다.
화르르르르
이른 아침임에도 수도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르티시앙의 축복?
절대 아니었다. 성신인 그녀가 이런 재앙을 내릴 리가 없잖은가. 황궁부터 시작해서, 구석 변두리까지 타오르고 있는 것은 분명히 거센 불길이었다.
그랬다. 황성은 불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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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주말인데도 시원하게 안올려주는 작가의 게으름 ㅠㅠ
혼내주세요-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