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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캄에덴, 대륙을 제패하다
이상하게도, 크로프란을 향하는 원정병력마다 번번이 전멸을 면치 못했다. 그것도 전투를 치르다 죽은 게 아니라, 야밤의 수면을 틈탄 습격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 사건으로 인해 각국에서 보낸 원정 병력 60만이 고스란히 증발되었다. 하나하나가 강력한 기사들을 내세운 정예들이었기에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놀랄 틈도 없었다. 하프 뱀파이어들을 주력으로 하는 캄에덴의 대군이 유에센 전역을 점령시키는 데 성공하자마자 제국 연합을 침공한 것이다.
난데없는 습격을 당한 유에센과는 달리, 차르니아와 루세리안, 이 두 제국은 연합전선을 펼치며 1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제국 전쟁 당시 전면전을 펼쳤던 장소, 그론테스 평원에서 어둠의 군단과 맞닥뜨렸다.
“아무리 강하고 잔인한 뱀파이어들이라도 우리 기갑부대는 이기지 못할 것이오.”
이제는 제국 연합 기갑부대의 총대장이 된 라트비츠가 휘하 파일럿들에게 호탕하게 소리쳤다.
일단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뱀파이어들이 막강한 무위를 갖추었다고 해도 그 이상의 파괴력을 갖춘 기갑부대이다. 물론 100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갑부대만으로 저 많은 적들을 다 쓸어버릴 수는 없지만 아군은 적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승산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즌 카이져를 선봉으로 한 크로프란의 기갑부대가 등장하는 순간, 그들의 환상은 깨졌다.
“뭐야, 이놈! 도대체가 공격이 안 먹히잖아!”
자신이 시전한 윈드 스톰이 프로즌 카이져의 방패에 막혀 무위로 돌아가자 라트비츠는 경악했다. 하다못해 검성의 플레임 로드도 어느 정도 피해는 입었었다. 하지만 이 얼음의 마갑기는 그 어떠한 공격도 차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걸어 다니는 강철의 거성이었다.
그렇다고 전투력이 약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프로즌 카이져가 휘두르는 검에 상부 장갑이 여러 군데가 찌그러졌기 때문이다.
비록 상대적으로 방호력이 뒤지는 윈드 워리어라곤 하나 그래도 명색이 마갑기다. 헌데 이 현저한 힘의 격차는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아직까지 검성의 플레임 로드가 프로즌 카이져에게 참패를 당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던 라트비츠였다.
“사격 개시!”
그때였다. 기갑부대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뱀파이어 진영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왔다. 그들은 크고 기다란 쇠막대기를 들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무기처럼 보였다.
“하, 우리를 박살이라도 내겠단 소린가?”
라트비츠가 헛웃음을 흘리며 멍청한 이종족들을 비웃었다. 화살로도 제대로 흠집조차 낼 수 없는 자신들 기갑부대를 어쩌려고?
그는 모르고 있었다. 저 병기로 인하여 검성이 이끌던 60여 기의 기갑기들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는 사실을.
타타타타탕!
이윽고, 쉐도우 스나이퍼들의 총구에서 불이 뿜었다. 우뢰가 쏟아지는 듯한 고성과 동시에 조그만 쇳덩어리들이 직선을 그리며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제국 연합의 기갑기들을 명중시켰다.
그리고 뒤이어진 비명성.
“크아아악!”
“커어헉!”
곳곳에서 익숙한 이들의 비명이 라트비츠의 귓전을 울려왔다.
“맙소사!”
라트비츠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비명성의 주인공들은 모두 다 자신이 이끄는 기갑부대의 파일럿들이었기 때문이다.
‘기갑기의 상부장갑을 뚫고 파일럿까지 맞추는 무기라니!’
기갑기가 가진 상부장갑의 두께란 평범한 나무의 지름과 맞먹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으로도 장갑을 뚫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파일럿이 피격 당했다.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무기였다.
“으아아아.”
비명소리는 계속 해서 들려왔다. 라트비츠는 애써 이 상황을 무시하려고 했지만 110만의 제국 연합 병사들은 전투를 치르지 않았고, 싸우는 것은 자신들 뿐이었다.
파일럿 말고 누가 비명 소리를 지르겠는가?
“살아남은 파일럿은 응답해라! 응답해!”
크로프란의 기갑기들에게 공격받고 있음에도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있는 아군 기갑기들에게 소리쳤다. 허나 응답하는 파일럿은 겨우 20여명. 물경 70여명에 달하는 파일럿들이 죽은 것이다.
아직까지 적의 기갑기는 한기도 처치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말도 안돼!!’라트비츠는 속으로 절규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명색이 기갑부대의 지휘관, 자신마저 당황한 모습을 보여 대세를 그르칠 수는 없었다. 설령 소수의 기갑기들만 남았다고 할지라도.
물론 이 상황에서 그가 택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후퇴하라! 모두 후퇴!”
라트비츠의 명령에 살아남은 제국 연합의 파일럿들은 주저 없이 꽁무니를 뺐다. 이미 상황은 승리와는 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지금 물러서는 것이 완벽한 패배를 피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아니, 이게 지금 어떻게 된 일인가?!”
한편, 아군의 기갑부대가 적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뒤 후퇴만 하자 제국 연합의 진영은 크게 동요되었다. 기갑부대의 승패가 전쟁의 승패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병사들은 벌써부터 공포에 질려 있었다.
“라트비츠! 이 머저리 같은 놈이 도대체 지휘를 어떻게 한 거야!”
루세리안의 총사령관이 이를 악물며 저 멀리 달아나고 있는 마갑기의 파일럿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기갑부대의 전투에만 한참 신경 쓰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파일럿들이 저격당해 죽은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던 그였다.
“제길, 이렇게 된 이상 우리도 후퇴하는 것이 어떻겠소?”
차르니아의 총사령관은 벌써부터 온몸을 부르르 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루세리안의 총사령관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이곳에서 도망친다면 우리는 뒤쫓아 오는 기갑부대의 밥이 될 거요. 거기다 설령 성공적으로 후퇴한다고 한들, 어떻게 저항할거요?”
할말이 없었다. 그의 말이 구구절절이 옳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바에야 장렬히 싸우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는 수 없군. 모두 총공격!”
두 지휘관의 명령에 제국 연합의 병사들은 지옥에 가는 심정으로 무기를 쥐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바로 기갑부대를 향해.
아주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기갑부대는 뜻밖에도 병사들을 학살하려는 대신, 뒤로 물러났다. 의아한 생각이 들었지만 일순간 제국 연합 진영에 희망이 감돌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은 그것이 지옥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파콰콰쾅! 슈슈우우우웅~
“!?”
“저건 뭐지?”
제국 연합의 병사들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보다 더욱 더 어두운 무언가가 하늘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왠지 모르게 아름다워 보였다. 연인과 함께 있었다면 아주 낭만적이었을 것이다.
처맞기 전에는.
쿠콰콰콰쾅!!
“크아아아!”
“으어어!”
가히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제국 연합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마치 대지가 들끓는 것 같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는 이도 저도 아니었다. 그 폭발의 부산물은, 단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피와 살이 박살나 평원에 흩어지는 것뿐이었다.
“사,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아직 적들과 맞닥뜨리지 않았음에도 이할이 넘는 제국 연합의 병사들이 죽고 다쳤다. 단 한차례의, 뱀파이어들이 날린 마법으로 보이는 공격에 의해 말이다.
“놈들, 사기가 말이 아니겠구만.”
뱀파이어들 입장에서는, 장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오르시스가 호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비록 카이사르에게 져 오대패자에서 밀려났지만, 그는 여전히 캄에덴의 정예, 2전단 기마대의 전단장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100여명에 달하는 흑색 로브의 마법사들이 뻗고 있던 두 손을 내리고 있었다. 아주 막강한 흑마술을 사용했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그들의 주위에서는 강렬한 흑마기의 기운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다크 매지션들이 시전한 3서클의 흑마술, 다크 스피어의 일제 곡사 사격을 제대로 맞은 제국 연합의 꼴이란 정말 말이 아니었다. 20만에 달하는 인간들이 피떡이 되거나,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100여 년 전, 셀리온의 몬스터들도 이런 식으로 싹쓸이해왔던 그들이었다. 그 때에 비하면 지금 것은 아주 약과였다.
“크크큭, 자식들. 우리 때문에 먹잇감은 푸짐하게 차려놨군. 자, 어서 돌격하라!”
오르시르는 이미 제국 연합의 백만 대군을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크와아앙!
“가자!”
난폭한 크로펫의 포효를 시발점으로, 캄에덴 최강의 기병대, 2전단이 돌격을 시작했다. 4열 횡대로 늘어서 빠른 속도로 다가서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란 제국의 병사들에게 있어 지옥 그 자체였다.
“마, 막아라!”
다급한 외침과 함께 제국 연합에서도 기병대가 나섰다. 그 수는 2만. 보병 위주인 제국 연합의 편제를 감안해볼 때 아주 많은 수였다. 비록 엉성하게나마 기병의 대열을 갖춘 그들의 모습은 보병들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2전단의 병사들에겐 어디까지나 주문한 음식을 먹기 전에 드는 간식에 불과했다.
쾅! 촤라락!
히히히힝!
“으악!”
단 한차례의 격돌로 모든 무위의 격차가 여실히 드러났다. 적 기병들의 랜스를 가볍게 피한 뱀파이어들이 흑마기를 끌어올리며 살수를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나도 생소한 적들의 공격방식에 제국 연합의 기병대는 추풍낙엽이었다. 사방에서 붉은 피가 튀었고 날아오른 머리통이 바닥에 데굴 데굴 흩어졌다.
“말도 안돼!”
불과 한 시간 도채 지나지 않아 그렇게도 심혈을 기울여 편성한 기병대가 몰살당하자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이 맴돌았던 제국 연합의 진영에는 어두운 그림자만 짙게 내리깔았다.
피를 뒤집어쓴 채 달려오는 일만의 악마들.
이제 남은 것은 대학살뿐이었다.
“크크크, 죽여라!”
촤아악!
“으억.”
“이 악마 놈들! 으으.”
크로펫을 탄 일 만의 뱀파이어들은 마치 유희를 나온 듯, 웃으며 인간들을 학살해 나갔다. 검도, 갑옷도 다 부질 없었다. 기사단이 강력하게 저항했지만 노련한 수십의 뱀파이어들에게 둘러싸인 그들도 유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 때에 맞춰 캄에덴의 본군이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2전단에게 먹잇감을 빼앗지 않겠다는 듯, 속도를 점점 올리며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진 제국 연합의 병사들을 마저 학살해 대었다.
“이건 꿈일 거야.”
루세리안의 총사령관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앞의 지옥도를 바라보았다. 산적들이 비무장 상태의 마을을 습격할 때도 이렇게 일방적이진 않을 것이다. 이건 정말 인간이 개미를 밟는 수준이었다.
“꿈이 아니다.”
그런 그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특유의 흑안 흑발에 범상치 않은 눈빛의 소유자. 아마 그가 이 군대의 우두머리일 것이다.
“단지 우리의 꿈이 현실로 다가왔을 뿐. 오늘 부로 인간의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다.”
말을 마친 스탐은 수도로 총사령관의 목을 베었다. 미세한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그의 머리통은 저만치나 나가떨어져 있었다.
스탐은 가볍게 거둔 승리에 환호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부터는, 우리 뱀파이어들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