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57 / 0217 ----------------------------------------------
41. 빛의숲 대저격전
“자신이 있다면 덤벼보시지, 카리오스.”
카시안이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데빌 핸드를 재장전했다. 방금 전의 총격은 일부러 명중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마음만 먹었다면 이미 카리오스는 카트리엘을 따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겠지만, 카시안은 그러지 않았다.
‘지옥의 끝자락에 떨어진 것과 같이, 고통스럽게 죽이겠다.’
지금의 카시안은 이미 평소의 무감정적인 하프 뱀파이어가 아니었다. 복수에 눈이 먼 살인귀였다. 그럼에도 이성의 끈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으니, 과연 그는 뼛속까지 스나이퍼였다.
핑!
분노를 담은 카리오스의 화살이 날아왔다. 오러를 머금은 이 화살은 집채만한 바위라도 관통할 듯 날카롭고 빨랐다.
하지만 카시안은 그 오러 애로우를 간단하게 피해낸 뒤, 데빌 핸드의 방아쇠를 당겼다.
탕!
“크으윽.”
어깨에서 고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 카리오스가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어깨에서는 약간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살짝 스친 것뿐인데 이 정도라면…….’
정통으로 맞았을 장면을 가정해서 떠올린 카리오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어차피 카시안도 자신의 화살에 맞으면 죽는 건 마찬가지다. 겁먹을 필요 없다.
‘그래, 카시안. 그때의 일은 미안하다만, 난 절대 카트리엘을 죽인 네놈을 용서할 수 없다.’
화살을 한발 날린 카리오스는 곧장 자리를 옮겼다. 그리곤 카시안이 있던 부근을 주시하며 전투의 전체적인 상황을 살펴보았다.
두 저격단간의 혈투는 아직도 한창이었다. 천지를 울리는 총탄과, 그와는 반대로 침묵을 싣고 날아가는 화살들. 서로 상반되는 무기들이었지만 목적은 같았다.
죽인다는 것.
‘난감하군.’
카리오스는 한숨을 쉬었다. 벌써 10명이 아르티시앙의 품 아래 사그라졌다. 물론 적들도 그만큼 죽였겠지만 애초에 엘븐 스나이퍼와 쉐도우 스나이퍼는 엘프와 뱀파이어, 두 종족 간에 차지하는 비중의 차원이 달랐다.
저 뱀파이어 저격수들은 전멸하더라도 뱀파이어들에게 그리 큰 타격이 되진 않겠지만, 엘븐 스나이퍼가 없는 빛의숲은 뱀파이어들을 막을 수 없다.
“음?”
그때였다. 두 눈을 부릅뜬 카리오스가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군 엘븐 스나이퍼 하나가 이마에 구멍이 뚫린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총탄이 발사된 부근은 바로 카시안이 있던 곳이었다.
‘자신과 싸우는데 치중하지 않으면 더 많은 엘븐 스나이퍼들을 죽이겠단 소린가?’
카리오스는 갑자기 몸 안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분노요, 증오였다. 갑자기 나타나 혈육 같던 동료들을 하나 둘씩 죽이는 뱀파이어의 무리들 중 선봉에 선 사내에 대한 절대적인 분노!
‘카시안, 네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들끓어 오르는 감정과는 반대로 카리오스의 몸은 세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왼손으론 활대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활시위를 당긴다. 피부는 풍향을 파악하고 반쯤 감은 두 눈은 표적을 찾는다.
그리고, 금세 찾은 표적의 그림과 자신의 감각이 일치하는 순간, 쏜다.
피이잉! 푹!
“제길.”
옆구리에 화살이 꽂힌 카시안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금방 손을 뻗어 뽑고 나서 지혈을 하고 있음에도 철철 흘러내리는 피는 도무지 멈추질 않는다.
하지만 미리 카리오스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화살은 자신의 목젖부터 시작해서 목덜미까지 뚫고 나왔을 것이다. 카리오스의 실력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카시안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반드시 죽이겠다.’
대충 지혈을 끝내고 재장전을 마친 카시안이 결연한 의지를 띤 표정으로 몸을 뒤척였다.
전력이 비슷한 세력들이 정면대결을 펼칠 경우에는, 어느 쪽의 대장이 이기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라진다.
저격전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마스터인 윈델이 죽었다곤 하지만, 이미 쉐도우 스나이퍼들은 카시안을 최고의 스나이퍼로 뽑고 있었다. 따라서 카리오스와 카시안. 이 두 우두머리들 중 누가 먼저 총이나 활로 상대의 머리통을 꿰뚫느냐에 따라 승리의 여신이 바라보는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카리오스는 더 이상 전투를 속행할 생각이 없었다.
‘벌써 15명이나 죽었다. 그 누구보다도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우리의 땅에서! 더 이상 싸우다간 끝장일지도 몰라.’
카시안에게 위협 삼아 한발을 날린 카리오스는 활을 한손에 쥔 채, 다른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삐이이이
굵은 휘파람소리가 숲 속을 울려 왔다. 후퇴을 알리는 신호였다.
적의 스나이퍼들이 이토록 강할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이런 불리한 위치에서 덤벼들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격전은 무엇보다도 위치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척 높은 전투니까.
지금은 일단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양패구상은 엘프족 멸망의 지름길이었으니까. 추격당하면서 몇 명이 죽더라도 전력을 보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도망칠 작정이냐, 카리오스?”
하지만 그걸 가만히 놔둘 카시안이 아니었다. 휘파람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 지 잘 아는 카시안은 수풀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렇게 소리쳤다.
소리를 지르는 것과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저격전에서 절대 금기시되는 짓이었다. 쉽게 말해 자살 플레이라고나 할까. 그걸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거리낌 없이 움직이다니?
“다 죽여 버리겠다. 네놈이 소중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 짓밟아 버릴 것이다.”
말을 마친 카시안이 곧바로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금세 그가 있었던 자리로 엘븐 스나이퍼들이 쏜 화살 서너 발이 박혀 들었다.
‘큰일이군.’
막상 베짱 좋게 소리치기는 했지만, 사실 카시안은 난감했다. 엘븐 스나이퍼들을 전멸시키는 것이 쉐도우 스나이퍼들이 창설된 궁극적인 목적이었으니, 양패구상을 하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적들이 도망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분명 추격하면서 서너 명 정도는 잡을 수 있겠지만 남은 수가 많다보니 다른 지역에서 다시 저격전을 벌인다면 쉐도우 스나이퍼들의 필패였다. 그들 중 반수는 빛의숲의 지리를 모르는 순수 뱀파이어들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추격을 하면서 최대한 많이 죽여야겠어.’
그렇게 결심한 카시안은 휘파람을 불며 쉐도우 스나이퍼들에게 추격명령을 내렸다. 비록 음색은 달랐지만 이들도 엘븐 스나이퍼들과 신호는 같았던 것이다.
숲 사이로 은밀하게 움직이는 쉐도우 스나이퍼들을 확인한 카시안이 곧바로 몸을 날렸다. 탑에 배치된 병력은 추격전에 동참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다 내려오고 나면 놈들은 이미 한참 멀리 달아났을 테니까.
철컥
데빌 핸드의 노리쇠를 후퇴시킨 카시안이 목표물을 찾았다. 분명히 적 엘븐 스나이퍼들은 라이플 건을 의식해서 빠르게 움직이진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화살보다 빠른 총탄을 피해낼 순 없을 테니까.
아무튼 그렇게 은밀한 추격전을 전개해 나가던 중, 카시안은 드디어 저격하기에 적당한 엘븐 스나이퍼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한 없이 구겨지고 있었다.
‘긴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
너무도 낯익은 뒷모습이다. 카시안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엘프들은 머리색이나 스타일이 다 거기서 거기였다.
하지만 목표로 한 엘프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카시안은 잠시나마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에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