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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카시안의 슬픈 운명
“카시안, 거기 안서?”
“헤헷, 잡아볼 테면 잡아봐!”
“너 정말 잡히면 알아서 해.”
빛의 숲 깊은 숲 속, 두 명의 엘프 남녀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쫓아가는 엘프 소녀는 무척 화가 났는지 볼을 있는 힘껏 부풀리고 있었고, 쫓기는 엘프 소년은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연신 웃으며 뛰어가는 와중에서도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씹어 먹고 있었다.
“넌, 왜 맨날 내가 딴 사과를 훔쳐 먹는 거야?”
“맛있으니까 그렇지! 남에 걸 먹는 게 얼마나 맛있는지 넌 모르지?”
“아무튼 잡히기만 해봐.”
한참 뛰어가던 둘은 한 엘프 사내가 나타나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엘프 사내는 도망치던 엘프 소년의 목덜미를 붙잡으며 혀를 찼다.
“카시안 이 녀석, 또 에레인 사과 훔쳐 먹은 거냐?” “헤헷, 카리오스. 그게 어쩌다 보니…….”
카시안은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그 사이 그의 코앞까지 온 엘프 소녀, 에레인이 그의 배를 때렸다.
“아야야.”
“씨이, 너 또 한번만 더 그래봐.”
숨을 헐떡이며 말하던 에레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러자 일순간 당황한 카시안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에레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그래, 에레인? 울지 마.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
“흑흑. 다시는 안 그럴 거지?”
“응. 약속할게.”
말을 마친 카시안이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내민 새끼 손가락으로 카시안의 것과 감아쥔 에레인이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약속했어. 다시는 그러지 마.”
“알았어.”
“훗, 녀석들.”
카리오스는 금세 앙금이 풀린 둘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때였다.
“헥헥, 너희들 여기서 뭐하는 거냐?”
“아, 카트리엘.”
셋의 눈앞에 나타난 카트리엘이라는 사내는 언뜻 보아도 급하게 달려온 모양인지 연신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빨리 마을로 와. 오늘이 너희들 입단식이잖아.”
“정말이야?”
카트리엘이 손가락으로 자신들을 가리키자 에레인과 카시안의 얼굴에 기쁜 빛이 서렸다.
“빨리 가자.”
“응…, 야. 카시안! 같이 가!”
에레인이 먼저 뛰어가는 카시안을 뒤쫓아 가며 소리쳤다. 그럼에도 카시안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열심히 숲 속을 달렸다. 그의 얼굴엔 희열이라는 감정이 샘솟고 있었다.
“참 추억이 많았었지.”카시안이 피식 웃으며 라이플 건을 두 손으로 잡고 가늠쇠에 시선을 붙였다.
행복하기만 하던 엘프일 때의 추억. 하지만 그것은 과거일 뿐이었다. 현실은 냉정하면서도 참혹했다.
탕!
무시무시한 총성과 함께 섬광을 실은 탄환이 숲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으윽.”
한 엘프 여성의 신음소리가 카시안의 귓가를 자극했다. 평범한 엘프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들리지 않았을 소리지만, 거듭된 훈련으로 고도의 감각기관을 가진 그에겐 생생히 들려왔다.
‘부상을 입은 듯하군. 도망친다 해도 멀리 가진 못할 것이다. 어서 죽이고 다음 표적을 찾아야겠군.’
상대가 모르든, 한때 소중했든, 지금의 카시안에겐 제거의 대상에 불과했다. 다가가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던 카시안은 허리춤에서 서서히 날카로운 곡선미를 가진 소검, 스틸레토를 꺼내들었다.
“카, 카시안!?”
깜짝 놀란 에레인의 음성이 들려온다. 그리고 에레인의 얼굴을 정면에서 확인한 카시안이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식된 심연의 바다에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카시안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마음을 바로잡았다.
‘정신 차려라, 카시안! 눈앞에 있는 엘프는 나의 적이다. 한때는 사랑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배신자, 복수의 대상일 뿐이다.’
“죽어라, 에레인.”
살기를 띤 한 마디와 함께 카시안이 스틸레토를 역수로 감아쥐고 들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외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장인들이 만든 엘프족의 명검, 스틸레토의 날은 다름 아닌 엘프를 향하고 있었다.
“네가 원한다면, 날 찔러.”
한참 카시안을 바라보던 에레인은 묵묵히 말하고는 두 눈을 감았다. 양팔을 뒤로 젖히며 가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결코 엘븐 스나이퍼의 일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크으으…….”
카시안은 아직까지 그녀를 향해 스틸레토를 찌르지 않고 있었다. 분명히 적이니, 찔러야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마법이라도 걸린 것일까? 카시안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이라도 하는 듯 연신 역수로 감아쥔 스틸레토를 움직이려고 힘을 썼다.
‘왜 이러는 거냐. 카시안! 벌써부터 마음이 약해진 거냐? 그녀는 배신자다. 나를 버린 배신자라고!’
카시안의 머릿속은 혼돈의 늪에 빠져 있었다. 적을 죽여라는 본능이 팔을 에레인 쪽으로 가져가고 있는 반면에, 백여 년 만에 재회한 옛사랑에 대한 애정이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고민을 거듭하던 카시안을 도와준 것은 우습게도 데빌 핸드였다.
[죽여라아…. 어서 엘프의 심장을 찔러, 내 몸에 피를 적셔라.]
“크아아아!”
평소였다면 코웃음을 치고 넘어갈 유혹이다. 하지만 고민을 겪고 있는 지금의 카시안에게 있어선 둘도 없이 달콤한 유혹이었다.
휘이이익
드디어 스틸레토가 에레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머지않아 저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머리칼의 엘프는, 자신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푹
스틸레토가 무언가를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카시안은 날 끝의 감촉을 느끼는 순간, 자신이 찌른 것이 엘프의 육신이 아닌 맨바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엘븐 스나이퍼들을 후퇴시킨 장본인, 카리오스가 에레인을 안은 채 살기 어린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개자식, 에레인 마저 죽일 작정이냐?”
“당장 꺼져라. 머리통이 날아가기 전에.”
카시안이 냉랭한 어조로 소리쳤다. 그러자 카리오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변했군, 변했어. 역시 뱀파이어의 탈을 썼다는 건가? 예전의 그 카시안이 맞는지 의심스럽군 그래.”
“100년 전의 유순한 엘프 카시안은 죽었다. 지금 네놈 눈앞에 있는 나는, 하프 뱀파이어 카시안 류카슬리일 뿐이다.”
카시안이 카리오스를 향해 스틸레토를 뻗었다. 그들 둘 간의 거리는 불과 다섯 보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금세 목 없는 시체가 될 것이다.
물론, 그 점은 카시안도 마찬가지였다.
챙!
섬광처럼 튀어 오른 카리오스의 발검이 카시안의 스틸레토를 쳐내 뒤로 물러나게끔 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에레인이 품에서 물러나는 순간 전격과도 같은 화살 한발이 카시안을 향했다.
핑!
“제길.”
화살촉에 뺨을 스친 카시안이 욕지기를 내뱉으며 흘러내리는 피를 닦았다. 카리오스는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고 에레인과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서 뛰어, 에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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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방학도 얼마 안남았는데 연재가 왜이리 늦은 지 원 ㅠㅠ
최대한 노력해보겠습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