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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카시안의 슬픈 운명
“물론이지. 하지만 넌 이제 단순한 엘프가 아니야. 이 자랑스러운 엘븐 스나이퍼의 일원이라고.”
“쳇, 또 그놈에 자랑스럽다는 소리. 지겹지도 않아?”
카시안이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시간이 끝난 듯 어느덧 모든 엘븐 스나이퍼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소식이 왔다.
“큰일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엘븐 스나이퍼의 마스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급하게 달려온 엘프 전사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가 한 말을 들은 순간,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간악한 뱀파이어들이 또 다시 빛의숲에 쳐들어왔습니다. 벌써 고귀한 빛의 전사들이 20명이나 아르티시앙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으으음, 이놈들, 잊을만하면 다시 화를 돋우는구나.”
노한 마스터의 입에서 곧바로 출전명령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빛의숲의 정예 전사들, 엘븐 스나이퍼들은 성역을 침범한 어둠의 종족들을 요격하기 위해 엘프 전사의 안내에 따라 곧장 피격지인 크루엘라 마을 부근을 향했다.
엘프족은 인구가 적은 탓에 수도 엘라시안을 제외한 빛의숲 곳곳에는 많아봐야 3천을 넘지 않는 마을만 있을 뿐이었다. 거기다 엘프 전사들은 드넓은 빛의숲에서도 겨우 10만에 불과한데, 아마 크루엘라 마을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엘프 전사들은 1만도 채 되지 않으리라.
아무리 엘프 전사들이 지형의 잇점을 이용해 최대한 방어를 펼치더라도 최정예 전사들인 자신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막기 힘들었다.
“쉴 틈이 없다! 빨리 뛰어라!”
카리오스가 엘븐 스나이퍼들을 독려하며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다행히도 크루엘라는 자신들이 있는 지점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계산대로라면, 도착할 즈음에 한참 전투가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악, 하악!”
카시안은 이번에도 뒤처지고 있었다. 숲속을 빠르게 헤쳐 나가고 있는 엘븐 스나이퍼들은 강행군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기동력이 거의 기병대가 허허벌판을 달리는 것에 버금갈 정도였다. 훈련 때보다 훨씬 더 빠른 것이다.
“정지!”
숨을 헐떡이며 한참을 뒤쫓아 온 카시안은 카리오스의 외침의 듣자마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너무 뒤처진 나머지 동료들을 놓칠 뻔했기 때문이다.
“나 참, 카시안. 너 또 늦었지?”
에레인이 그런 카시안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리 핀잔 섞인 말투는 아니었다. 진심으로 걱정이 배여 있었다.
“카리오스나 카트리엘처럼 빠르지 못하면 뱀파이어에게 잡힌단 말이야. 이번이 우리의 첫 실전인데…….”
“나도 알아.”
카시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속은 에레인처럼 걱정투성이였다.
뱀파이어들이 한 차례 대규모의 침입을 해올 때 마다 항상 한두 명의 엘븐 스나이퍼들이 죽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카시안이나 에레인처럼 처음으로 실전을 벌이는 신참들이었다. 뱀파이어들의 침입만 제외하면 항상 평화로운 빛의숲이니 실전이 전무한 것도 당연했던 것이다.
“전투가 한창이군.”
어느 한쪽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카리오스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다른 엘븐 스나이퍼들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련하면서도 자욱하게 퍼져 나가는 혈향에 슬퍼하는 정령들의 감정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마을이 습격 받지는 않은 모양이군.”
엘프 전사들이 시간을 잘 벌어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전투는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마을과는 달리 숲 속은 엄폐물의 천국이었으니까.
엘븐 스나이퍼의 마스터는 뱀파이어들을 요격하기 위해 엘프와 뱀파이어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는 부근에 저격 포인트를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리 없이 날아드는 엘븐 스나이퍼의 화살이었기 때문에 위치만 잘 잡으면 앉아서도 100명도 죽일 수 있었다.
그게 바로 저격이다.
엘븐 스나이퍼들이 소리 없이 뛰어 다니며 저격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싸움소리는 점점 격해져 갔는데, 그것이 말하는 바는 엘프들이 밀리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어차피 엘프는 활에만 타고날 뿐, 근접전과는 동떨어진 몸을 가진 종족이다. 그런 그들이 근접전 최강의 전사들인 뱀파이어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핑~
허공으로 화살 한발이 날아올랐다. 바로 마스터가 쏘아 올린 일종의 신호탄으로, 이것을 시발점으로 엘븐 스나이퍼들은 일시에 적에 대한 저격을 행사하는 것이다.
푹, 푹, 푸푸푹!
“으아아악!”
“크어헉!”
뱀파이어들의 비명소리가 사방에 비산했다. 방금 전만해도 패주하고 있던 엘프들을 베어 넘기며 승승장구하고 있던 그들은, 갑자기 날아온 침묵의 화살에 이렇다 할 대책조차 세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할 뿐이었다.
한발을 쏠 때마다 한명의 뱀파이어가 죽어갔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대부분이 그렇다보니 어느새 5000에 달하던 뱀파이어의 무리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좋아, 그럼 나도 한번 쏘아 볼까?”
나뭇잎이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숨어 있던 카시안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활시위를 당겼다. 그가 정한 표적은 영락없는 뱀파이어 졸개였는데, 어찌나 겁에 질렸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고 있었다. 카시안은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그대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손을 놓았다.
피이이잉~ 푸욱!
“아자, 잡았다!”
표적으로 삼고 쏘았던 뱀파이어가 쓰러지는 것을 본 카시안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미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뱀파이어들이었기에 엘븐 스나이퍼의 금기중 하나인 침묵을 깬 것이다.
“으이구, 바보야. 그렇게 소리 지르지 말라고 훈련받았잖아.”
“상관없어. 벌써 한참 멀리 도망가는데 뭘.”
“에휴, 아무튼 대충 끝난 것 같네…….”
“에레인. 넌 몇 명이나 쏘았어?”
“두명.”
“헉, 정말?”
카시안이 에레인을 바라보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얼굴엔 질투심이 생겨났다.
‘에레인은 두 명이나 쏘았다는데, 난 겨우 한명이라니…….’
그때였다. 저격 포인트에서 빠져나온 마스터가 엘븐 스나이퍼들에게 소리쳤다.
“자, 이제 뱀파이어들을 추격한다. 추격제한은 빛의숲안까지만이다. 빛의숲 밖으로 나가는 만용은 부리지 말도록.”
말을 마친 마스터는 제일 먼저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카리오스, 카트리엘 등 70여명에 달하는 엘븐 스나이퍼들이 뒤따랐다.
“추격하려나본데.”
“에레인, 우리도 같이 가보자.”
마스터의 추격령에 구미가 당긴 카시안이 말했다. 하지만 에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됐어. 첫 실전인데 무리할 필요 없잖아.”
“야, 빛의숲에서 실전이 어디 자주 있는 일인줄 알아? 이곳에 쳐들어 오는 유일한 종족인 저 뱀파이어들도 수십 년에 한번 처들어올까말까한 녀석들이잖아.”
“카시안. 난 무언가를 죽인다는 게 그리 내키지는 않거든? 갈려면 너나 가.”
“야…….”
갑자기 에레인이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당황한 카시안이 에레인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것을 뿌리친 그녀는 천천히 마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쳇. 떨려서 못가겠다고 솔직히 말하지, 소심하긴. 뭐, 네가 안가면 나야 좋지. 더 많은 뱀파이어들을 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카시안이 미소를 띠며 먼저 간 엘븐 스나이퍼들을 따라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